헛손질의 향방

by 자진유리




다름없이 일어나 세수를 하고 커피를 내린다. 아직까지는 아무렇지가 않다. 보통은 커피를 내리면서 첫 담배를 입에 무는데 별다른 마음이 일지 않아 어쩌면 지레 너무 겁을 먹었던 건 아닌지, 실은 별것도 없는 게 아닐까 싶은 가느다란 물줄기가 커피밭을 노긋하게 적셨다.


탁상달력을 한 장 넘기고 필요한 음악을 들리게 하고는 읽을거리를 펼쳤다. 책 모서리에 적힌 숫자가 조금씩 늘어날 때마다 두터운 대지의 층이 벗겨져나갔다. 늘어나는 것은 사람의 헤아림이었으니 헤아릴수록 진실은 줄어드는 것 같았다.


헤아림은 지금에 머물지 못하고 과거라는 수량으로만 변환되었다. 대지의 풍요에 빠져들수록 죽음은 관념 밖으로 밀려났다. 삶만 남은 두려움들이 더 많은 숫자를 갈망케 했다.


진실이 침묵 속에 잠들어있다는 것을 알아챈 사람들은 실제로 무덤을 파헤쳤다. 같은 이유로 책을 펼쳐든 사람들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여지없는 생명 같아서 함부로 페이지를 넘기기가 어려웠다. 내가 만든 과거는 진실 위에 쌓이고 머뭇거린 순간들은 미래가 될 거였다. 거기서도 사람들은 무덤을 파헤치거나 묫자리를 궁리하고 있었다.


무덤은 잊히고 헤아림도 잊힌다. 그러니 책을 덮기도 어려웠다. 우리도 덮어지면 또한 허무와 망각에 이를까 두려웠다.


이제와 새로운 이야기라는 게 있을까.

우리에게 마지막 페이지라는 게 있을까.


언제고 나를 덮어버릴 존재에게 물었다.








읽기를 멈추자 왼손이 뻗어나갔다.

평소라면 거기 무언가 있었을 자리로.


거기엔 담배가 없었지만 있었다.

셀 수 없는 과거들이 겹겹이 쌓여있었다.


철렁했다. 철렁해서 철렁한 가슴과 아무 관련 없는 외계인 손 증후군에 대해 검색했다. 없다는 생각에 빠져들수록 흡연 욕구가 되살아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그렇다는 것을 기록하는 쪽으로 황급히 주의를 옮겼다. 머지않아 가슴을 쓸어내렸는데 기록하는 데에 담배의 부재가 별 영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투가 바뀌지도 않았고 쓰고 싶은 마음도 남아 있었다.


한 갑만.

한 갑만 더 피지 뭐.

딱 한 갑만 더 어때?


빌어먹을 외계인 손 증후군. 증후군이. 외계인의 속삭임이 점점 또렷해진다. 이미 진작 손을 허공에 냅다 뻗었을 때 교신 테스트가 완료된 것이다.


눈을 감고 단주를 굴리며 주를 찾는다. 이대로 마음이 홀랑 넘어가뻐리면 그때부터는 참는 것이 되고 참는 고통이 찾아올 것이다. 고통은 견디기 점점 어려워질 것이고 있음에 대한 집착은 더욱 강력해질 것이고 강력한 집착이 금연 다짐을 홀랑 깨부술 것이고 부서져 나는 흩어질 것이고 흩어져 나를 찾지 못할 것이고 찾지 못해 결국 나를 믿지 못하게 될 것이다.


지금 웃으며 맞이해야 한다. 차분히 돌아갈 길을 열어주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들러줘서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시길 바랍니다.


비록 내일은 참지 못할지라도 일단은 지금을 견뎌보자. 계속계속 지금을 견뎌내 보자. 지금의 아슬아슬한 곡예를 좋아해 보자. 그것이 아무 일이 아니도록.








어느덧 마음은 편안해지고 표정이 밝아지고 몸도 가벼워졌다.


그야말로... 날아갈 듯했다.


담배를 사러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쉽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간단히 무너질 줄은 몰랐다. 편의점을 향하는 외계인의 촐랑대는 발들이 거들어 말했다.


단번에 끊는다면 공감이 안 될 테니 한두 번의 실패는 끼워 넣는 게 자연스럽지 않겠어요?


염병하고 있네.


하지만 성공하려면 실패를 겪어야 한다. 우리 중 누구도 성공은 가지지 못했지만 적어도 실패가 쌓여야 성공처럼 보인다. 그런 것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다 떨어진다.


어둠은 빛을 키우고 빛은 어둠을 몰아낸다. 따라서 실패가 들어있지 않은 성공은 위험했다. 자만하고 업신여기는 태도를 만들었다. 왜 이게 안 되고 왜 그걸 못하는지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부터 빛은 다시 어둠을 만들었다. 빛은 다만 강력한 어둠의 결과였다. 스스로가 만든 어둠을 알아보지 못하는 등불은 스스로를 더욱 눈멀게 할 뿐이었다.


실패의 교훈으로 어둠을 늘려나가면 된다. 경우에서 뜻대로 되지 못한 상황에 다시금 이르렀을 때 다른 선택을 해나가면 된다. 그것이 지난하게 누적돼 금이 가야 빛이 나고, 그 빛을 통과해야 빛도 어둠도 아닌 상태에 이른다. 그제야 담배 없는 본래와 마주할 것이다.


그렇다고 말하면서 기운은 왜 이렇게 없을까.

삶을 말로, 법칙 따위로 풀면 이다지도 피곤하다.

담배 한 모금에... 아무래도 상관이 없을 것 같다.







keyword
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