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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버트 Apr 25. 2022

나를 위로하는 공간

커피 한 잔을 내리고 블루투스 스피커를 껴안고 밖으로 나왔다. 갓 내린 커피의 거품이 사라지기 전에 한 모금 홀짝거렸다. 언제나 그렇듯 커피는 맛으로 느껴질 뿐 향기는 나지 않는다. 슬리퍼를 끌고 화단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며 활짝 핀 백합, 로즈메리 등에 코를 바싹 갖다 대 보았다. 꽃 잎에 코를 박듯 들이밀면 그래도 백합 향기가 느껴진다. 다행이다.


그 언젠가 한여름 밤, 잠을 자다 일어나 거실로 나왔을 때, 오히려 밤에 더 진하게 풍겨오던 마당 백합들이 뿜어내던 그 향기가 놀라웠다. 한 밤을 백합 향에 취해 황홀하게 보낸 후 그 느낌을 잊지 못해 그 몇 배에 해당하는 백합의 구근을 사다 심고 가꾸었다. 그러나 이제 마당에서 풍겨오는 꽃들의 향기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맡을 수 있어도 나에게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저 한 여름밤에 나를 덮쳤던 그 향기를 기억으로 즐길 뿐이다.


봄이면 작년 그 자리에서 백합은 키를 키우며 자란다. 햇빛이 따스한 새 날, 어느 공간에서 이들이 불쑥 등장할지 작년을 떠올리며 찾는다. 실망시키지 않고 얼굴을 내미는 그들을 보면, 가끔 변수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굳건한 믿음이 느껴진다. 그래서 그들을 하염없이 사랑하고 가까이 두고 싶은지도 모를 일이다.


피아노 건반 위에서 움직이는 손가락을 따라 Ludovico Einaudi의 Gravity가 흘러나온다. 이런 음악을 만든 사람들, 연주하는 사람들은 어떤 재능을 가진 사람들일까? 혹은 이들의 삶은 어떨까 생각하며, 그저 먼 곳에 있는 그들도 세상을 향해 자신을 표현하며 살아가겠지 맘대로 생각한다. 아무도 방해 않는 아침, 이리저리 스쳐가는 생각은 마당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맘대로 뿌려 둔 야생화 씨앗들과 상추와 들깨 같은 것들이 오늘은 어느 만큼 자랐는지 꼼꼼하게 들여다보는 동안 흔적 없이 사라진다. 


생각보다는 내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들이 힘이 세다. 나에게는 그렇다. '보고 싶다. 혹은 고맙다' 이런 말보다는 그 말을 행동으로 보이며 나에게로 다가오는 사람을 신뢰한다. 오래 만났고 많은 기억을 공유해도, 시간을 건너 내 앞에 나타나고, 내 휴대폰을 을리며 나에게 오지 않는 이들과의 관계는 분명 멀다. 아마도 나부터 이름뿐인 그들을 모두 다 보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 나 또한 그런 사람일 테니. 어느 날엔가 그렇게 될 것이다. 



새들이 물을 먹으러 와서 며칠 새 증발해 버린 물 때문인지 망설이다가 돌아가는 것 같아 급하게 뛰어가 양동이 한가득 물을 받아와 부어두었다. 찰랑찰랑 넘실대며 유혹하는 물 냄새에 산비둘기, 물까치 그리고 크고 작은 온갖 이름 모를 아름다운 새들이 날아올 것이다. 물을 마시거나 물에 들어가 첨벙거리며 부르르 목욕하는 새들을 바라보면 행복하다. 소나무 가지에 앉아 깃털을 다듬기도 하고 때론 짝의 깃을 매만져 주기도 한다. 내 마당에서만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고 보니 아직 얘들이 다른 새들끼리 공격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어떤 경우에는 그렇다 하더라도 내 마당에서는 평화롭다. 


식어가는 커피 잔을 들고 마당을 천천히 돌아본다. 쪼그리고 앉아 어디에 무엇이 돋아나는지 주의 깊게 살펴본다. 혹시라도 내 발에 밟히는 새싹이 없도록 발걸음을 주의하면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무려 십 수 봉지의 야생화를 종류별로 뿌리고, 상추, 들깨, 로즈메리와 라벤더도 뿌렸다. 심지어 올리브 나무, 커피나무 씨앗도 곱게 묻어두었다. 과연 싹 터 자라, 나를 행복하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자라는 모습을 상상하는 동안은 즐거우니 어쩌면 그걸로 충분할지 모른다. 마당의 생김새와 해가 드는  곳 그리고 그늘 등을 고려해 씨앗을 뿌렸는데, 이들이 자랄 때가 되니 어디에 무엇이 싹 터 나올 것이라는 것을 전혀 알 수가 없다. 시간이 갈수록 기억력이 없어진다. 사실 어디에 어떻게 있든 그 모든 것은 사랑스럽기에 자라기만 한다면 상관없는 일이다. 다만 그들이 무사히 세상 밖으로 나와 햇빛과 바람 속에서 무럭무럭 커갈 때, 운 좋게 내가 그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아는 사람 그 누구가 기대하지 않았던 보습을 보일 때, 말 뿐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필요할 때만 나를 찾으며 나를 도구처럼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친구라는 이름을 달고 살면서도 그런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이기적인 모습을 볼 때....... 그렇게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지친 나를 위로하는 것 또한 나에게로 걸어오는 사람들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 내가 겪는 그 모든 시간을 말없이 지켜보는 것들은 제 자리에서 물을 뿜어 올리며 자기에게 주어진 숙명대로 꽃피우고 키를 뽑아내며 살아내는 마당의 나무와 풀들과 꽃들과 그리고 새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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