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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고비 Oct 15. 2023

섭동

진동 전달 서비스 : 당신의 진동을 전달해 드립니다 #15. 마지막 편

* 섭동(perturbation) : 불안정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진동과 파동은 마찰과 같은 항시적 소산 과정 때문에 지속적, 강제적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흐름은 기본 흐름 위에 얹힌 작은 섭동들로 간주한다.

                                                                                                                         - 기상학 백과 -



2022년 12월. 오로라빌리지.

“이제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신 핸드폰으로도 오로라를 충분히 촬영할 수 있어요. 저는 기본적인 ISO, 노출시간, 조리개, 화이트밸런스 수치만 알려드렸어요. 기종마다 조금씩 차이도 있고 사진도 취향이 있어서 어떤 값이 가장 좋다고 말씀드리기는 어려워요. 오로라 밝기도 제각각이고요. 제일 좋은 건 오로라가 나타났을 때 찍어보면서 가장 좋은 수치를 찾아가는 거예요. 찍어 보시면서 잘 모르시겠으면 손만 들어주세요. 제가 가겠습니다. "


은우가 사진 촬영을 하는 관광객들을 살피다 정말일까 하는 눈빛으로 한 사람에게 시선을 멈춘다. 패키지 업체에서 빌려준 같은 방한복에 같은 방한모, 같은 신발을 신고 있는 데다 가장 먼 곳에 있어 확신할 수는 없었다. 밤만 아니었더라도 이렇게까지 안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은우가 망설이며 다가가지 않자, 이번에는 손을 들어 보인다.


“혹시 핸드폰이 꺼지신 건가요? 오래된 기종은 영하 10도가 넘으면 꺼지기도 해서요. 한번 보여주실래요?”

은우가 손을 든 손님에게 다가간다.

“제 핸드폰은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요. 그쪽 핸드폰이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요. 도착한 후에 연락처를 남겼는데도 연락이 없으셔서요."

언제까지 모르는 척할 건지 이미 누군지 알면서도 먼저말하지 않는 건 둘 다 마찬가지이다.

“아. 개인 가이드를 원하셨던 건가요? 그런데 혹시 제가 손님을 가린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나요?"

"아직."

은우가 웃음을 누르며 진지하게 말한다.

"저는 일반적인 오로라 투어를 진행하지는 않고요. 오로라 사진을 잘 찍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특별한 장소를 소개해 드려요. 혹시 일정은 언제 까지신가요?”

"아직 리턴티켓을 끊지 않았어요. 꼭 보고 싶은데 언제 나타날지 몰라서요."

"나타난 것 같은데요? 기다리셨던 거."


사람들이 웅성거리가 시작했다. 주변에서 탄성 소리가 나오고 셔터소리가 들렸다. 오로라가 나타나자 여기저기서 축제가 시작되었다.

"손님 운이 좋으시네요. 분홍색 오로라를 만나기는 쉽지 않은데. 사진 안 찍으시나요?"

"찍어야죠. 오래 기다렸거든요."

“그럼 찍고 계세요. 다른 분들도 봐 드려야 해서요.”

은우의 얼굴과 말투에 꾹 참았던 웃음이 묻어 나온다. 은우가 뒤돌아서 가버리려 하자 다급해진 손님이 은우를 돌려세운다.

"도와주고 가. 여기를 봐야 찍잖아."


은우가 뒤를 돌아본다. 이미 은우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 차 있다. 다급하게 셔터를 누르자 은우가 활짝 웃는 모습이 손님의 핸드폰 속에 담겼다.

“사진 괜찮은가요? 개인 가이드 해 주실 수 있으신 거죠?"

"오. 제법이신데요. 일정 확인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저걸 찍으셔야죠."

은우가 손을 길게 뻗어 손님의 시선을 하늘로 돌린다.

"어떠신가요. 여기까지 오신 게 후회되지 않을 만큼 아름답죠?"

손님의 시선은 여전히 같은 방향이다.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바라보고 있던 건 한 사람뿐이다.

”눈이 부셔. 은우야. 보고 싶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환영합니다. 단서윤 씨."


2021년 7월 20일

'연락이 늦었습니다. 김나연 씨에게 연락 전해 들으셨을 것 같아 연락을 또 해야 할까 망설였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정은우'

은우에게 메시지가 도착하자마자 서윤이 은우에게 전화를 한다. 통화음이 길게 울린다. 은우가 전화를 받지 않을까 초조한 마음이 든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에 전화기를 내려놓을 수가 없다. 긴 연결음에도 통화가 되지 않자 그제야 문자를 남긴다.

'한번 만나자. 장소랑 시간은 네가 정해서 알려줘. 단서윤'


2021년 8월 21일

"서울에 가끔 와요?"

"가끔 오지. 그래도 올 때마다 달라. 여기는 처음이고."

"엄청 골랐어요. 저도 처음 와 봤거든요. “

골목골목 개성 있는 가게들로 채워진 서울의 번화가에는 사람이 많았다. 해가 지고 있는 주말의 거리에는 아직 더위가 남아 있었다. 한참을 걸어 들어가서 찾아낸 레스토랑의 문을 열자 에어컨 바람의 냉기가 차게 다가왔다. 은우가 예약한 자리는 테라스 쪽이었다.


"야외에 앉아도 좋을 것 같아 골랐는데 선선하지는 않네요."

둘은 조금은 어색하고, 약간은 친밀한 사이처럼 한참 동안 별거 아닌 이야기를 하고, 간간이 웃음을 주고받으며 식사를 마쳤다.

"맛있었나요?"

"엄청."

"다행이에요."


은우가 서윤을 한번 쳐다본 후 어렵게 말을 꺼냈다.

"왜 만나자고 했는지 물어도 될까요?"

"거절하지 않을 것 같아서. 고맙다는 말이 진심인 걸 알아서."

은우가 얼음이 녹지 않아 차가운 물 잔을 들어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물 잔 속의 민트잎이 얼음 사이에서 빙글 돌아간다.


"이상해요. 저는 늘 고맙고 미안한 사람이 될 때만 오빠를 만나게 되는 게 이상해요. 왜 그럴까. 저는 왜 이 무거운 마음을 자꾸 오빠한테 내려놓게 되는 걸까요. 그런데도 왜 계속 받아주는 걸까."

은우를 가만히 바라보는 서윤을 한번 쳐다 보고는 은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들 나를 떠나잖아요. 반복되는 일인데도 익숙해지지는 않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해보려고 했어요. 너무 슬퍼하면 사람들이 위로하고, 그러면 더 슬퍼지고 울고 싶어 지잖아요.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했는데요. 그래서 그런가. 사람들이 더 잘 떠나게 되는 것 같은 거예요. 나는 괜찮은 사람이니까. 떠나도 아무렇지 않게 잘 살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제가 괜찮지가 않았어요. 누구한테라도 말을 꺼내고 싶을 만큼. 내가 괜찮지 않다는 걸 티 내고 싶은데, 그럴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었어요. 내가 짐을 내려놓아도 될 사람. 다 아는 사람. 연락하자마자 내 앞에 나타나 주는 사람. 나도 괜찮지 않아요. 누군가가 떠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은우가 쥐고 있던 물컵 속의 얼음이 녹아서 이제 마지막 조각마저 사라지려 한다.


"오빠도 이제 웃게 해 주는 사람 만나요. 자꾸 나처럼 무겁게 만드는 사람 말고. 문자를 보내고 나서는 금세 후회하고 이 말을 하고 싶어서 나왔어요."

서윤이 빨갛게 된 은우의 손에서 컵을 빼낸다.

“내가 아니면 울 수도 없을 거잖아. 나 말고도 괜찮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그때까지 있을게. 너 때문이 아니야. 나 때문이야.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 이번엔 내가 기다릴 차례야.”

은우의 눈에서 참고 있던 눈물이 떨어진다. 서윤이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은우의 손에 냅킨을 건넨다.


“계속 기다리게만 할 수도 있어요.”

“괜찮아.”

“그거 엄청 힘든 건데."

”나도 해 봐서 알아. 기다릴게."


2021년 9월 20일

날씨가 서늘해졌습니다. 시원해질 때 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지키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건강하세요. 정은우

서늘한 계절은 다시 오니 기다릴게. 건강해라. 단서윤


2021년 10월 5일

술을 마셨습니다. 이제는 떠나간 사람들이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덕분입니다. 정은우

나도 떠났던 사람이라 반갑게 들리지만은 않지만, 덕분이라는 말은 오래 남는다. 무슨 술을 누구와 먹었는지 궁금하다. 단서윤


2021년 12월 28일

학교가 어렵습니다. 다른 일이 어려워 잠시 잊고 있었는데 예전에도 지금도 계속 어렵습니다. 정은우

네가 억지로 참고 있는 게 아니면 좋겠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단서윤


2021년 1월 10일

만나자는 약속은 미뤄야겠어요. 방학 동안 하고 싶은 일이 생겼습니다. 정은우

조르고 싶은 마음을 참고 있지만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는 말이 반갑게 들린다. 단서윤


2022년 3월 18일

학교를 그만두었어요.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학교가 제 자리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바라는 일을 이뤄보려 합니다. 정은우

기쁜 일이다. 단서윤


2022년 6월 1일

당분간 연락하기 어렵겠어요. 기다려 주세요. 정은우

기다릴게. 보고 싶다. 단서윤


2022년 10월 10일

다시 서늘한 계절이다. 바라던 날이 이루어졌니. 단서윤


2022년 12월 1일

옐로나이프에서 오로라 사진 촬영 가이드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캐나다를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만 2023년은 태양활동극대기라서 옐로나이프에 겨울 내내 머무를 예정입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정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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