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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치 May 14. 2021

삐뚤빼뚤 조선 백자

현대인의 미감 이야기

조선시대 미감에는 소박하고, 단아한 절제미가 있다고들 합니다. 오랫동안 전혀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달항아리로 대표되는 조선의 예술품은 아무리 봐도 별거 아닌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대칭도 맞지 않고, 온전히 원의 형태가 되지도 않으며 밑바닥, 윗 주둥이 역시 온통 삐뚤빼뚤합니다. 동그랗게 만들려다 실패한 것만 같았습니다. 이걸 보고 어떤 멋을 느낄 수 있나 싶었습니다. 저는 자극적이고, 강렬한 미술 작품을 좋아했습니다. 야수파, 나비파 작품에서 보이는 거칠고 강한 느낌에 빠져 있었습니다.

항아리, 도자기를 보면 화려하고 멋진 것들이 참 많습니다. 고려 청자는 완벽하고 세련된 맛이 있었습니다. 저 은은한 청록색과 부풀어 오르는 듯한 형태, 그리고 화려하고 눈을 휘어잡는 엄청난 패턴. 누가 봐도 명품 고급감이 스물스물 삐져 나오는 ‘작품’입니다. 저런 청자 하나 집 어딘가에 고이 올려두면 감상하는 맛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도자기를 한 번 더 보겠습니다.

청나라의 도자기입니다. 식물이 감싸며, 알록달록, 꽃도 피어 있고, 정말 멋있고 예쁩니다. 아르누보 저리가라입니다. 수백 년 전 사람이 이런 예술품을 감상하며 살았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화려합니다.


다시 조선 달항아리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렇게나 화려한 도자기들 속에 대체 삐뚤빼뚤, 만들다 실패한 것 같은 달항아리가 웬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절제미’라는 말로 포장하는 것이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많지 않은 나이지만, 나이가 들다 보니 그 멋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화려하고 강렬한 색, 거친 느낌만을 좋아했던 제가 달항아리의 멋에 휘어잡혔습니다.


미니멀리즘 있습니다. 본질을 드러내는 미술 사조입니다. 재료의 특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기본적인 형태를 고스란히 받아들여 느끼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연상되지 않게, 실제 존재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달항아리라고 했지만 사실 달을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백자 그 자체가 눈을 통해 내면으로 그대로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그저 하얀 형태, 하얀 형태가 내 안으로 스며듭니다.


완벽한 동그라미였다면 오히려 느낌이 죽었을 것 같습니다. 엉성하게 만든 듯한, 크게 신경 쓰지도 않은 듯 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잘 다가옵니다. 자연에는 완벽한 직선, 완벽한 호가 없습니다. 그런 것에 집착할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드로잉을 할 때, 뭔가를 완성해내려고 애쓰지 말고, 선을 잘 그리려 끙끙대지 않을 때 훨씬 멋있는 선이 나옵니다. 손 가는 대로, 내 마음 그대로 손을 통해 뽑아져 나오는 선, 그런 선 하나가 사람의 심금을 울리곤 합니다. 달항아리에서 그것을 느낍니다. 애쓰지 않고, 백자 그 자체를 그저 보여줄 뿐입니다. 다른 장식은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백자는 백자이니까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처럼 말입니다.


달항아리를 달항아리를 보게 된 이후로 조선 예술의 미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백자의 외관을 둘러싸는 자연스러운 선, 그 선은 보는 각도에 따라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입니다. 본 적은 없지만 말입니다. 여러 장식과 색으로 둘러 싸인 오늘날의 어느 곳에 달항아리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다면 그것이 새로운 공간성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하얀 구체가 휘어잡는 공간입니다.


현대인이라면 달항아리를 좀 더 본격적으로 즐길 수 있겠습니다. 항상 고리타분한 박물관에서, 미술 교과서에서, 어르신들의 안방에서 봤기 때문에 이미지가 묻힌 느낌입니다. 미니멀리즘의 시대를 지나, 심플함이 최고의 멋으로 자리잡는 2021년입니다. 가전에서도 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삼성의 비스포크 냉장고입니다. 아무런 무늬도, 장식도 없이 그저 색면만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요즘 엄청나게 핫합니다. 예쁘다고, 멋있다고 말입니다.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이런 제품은 밋밋하고 볼품없어 정말 외면 받았을 것입니다. 비스포크 냉장고는 색면의 표면까지 신경썼습니다. 그러니까 미니멀리즘 작품과도 같습니다. 칼 안드레의 작품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그냥 판을 깔아 놓는 것입니다. 사람이 밟고 있습니다. 제대로 감상하는 겁니다. 미술관 공공예절로는 밟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작품이니 손대지 않는 것이 ‘상식인’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감상하려면 물성을 느끼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밟고, 혀로 핥아 보고, 오감으로 즐기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오버했지만 비스포크 냉장고를 보면 50년을 앞선 미니멀리스트들의 시대가 이제서야 온 것만 같습니다. 현대인들은 이제서야 그 미감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한때 엄청 유행하던 노출 콘크리트 카페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스타에 올리는 사람들은 힙하고 멋있어 보여 그렇게 했다고 하겠으나 저는 시대를 관통하는 미감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 흐름의 한줄기였던 겁니다. 물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미감이 생겼습니다. 동시에 루이비통의 화려한 패턴도 즐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시대에 달항아리의 매력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도자기가 다루기 어렵고 깨질 위험도 있고 비싸서 집에 두기 어렵겠지만 꽤 괜찮은 장식품인 것 같습니다. 또 비스포크 냉장고, 엘지 오브제의 가전 제품이 보여주는 칼 같은 직선, 마감과는 전혀 다른 멋이 있습니다. 저는 이제 그런 칼 같음을 촌스럽다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 인위성은 쉽게 질리기 마련입니다. 달항아리는 특히 각도에 따라 선이 달라 보이기에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오늘 본 것과 내일 본 것이 다를 겁니다.


달항아리가 만들어 내는 새로운 공간성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꺼내고 싶습니다.

아니쉬 카푸어라는 초유명작가의 작품입니다. 거대한 크기의 조형물이 세상을 반사하고 있습니다. 존재 자체로 평범한 공간을 뒤틀고 있습니다. 크기가 워낙 크기 때문에 그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아래 작품을 보겠습니다.

아니쉬 카푸어는 인도의 전통 염료를 사용했습니다. 실제로 보면 채도가 정말 높습니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형태들입니다. 앞에 가면 완전히 다른 차원이 열린 것만 같습니다. 이것이 현실의 물체가 맞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냅니다. 그저 색과 형태만으로 공간 자체를 뒤틀며 작품 속으로 포괄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염료 덩어리가 작품이 아닌, 저것이 놓인 공간 자체가 작품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달항아리에도 이러한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 백자는 그저 엉성한 형태의 하얀 덩어리일 뿐이지만, 그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대담함과 주변 공간과 어울리는 듯 도드라지게 튀는 멋이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공간성이 생겨납니다.


달항아리의 멋을 느낄 수 있게 되며 조선시대의 미감까지 느꼈다고 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글씨입니다.


그러나 글이 너무 길어져 다음 글에서 계속하려 합니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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