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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니스홍 Jul 24. 2019

이미 다 받은 것

받은 것에 반응하기, 받을 것을 계획하기

태어나서 앞으로 천년을 살다 가겠다는 계획을 세워 자라는 소나무는 없다. 자연에서 나고 자라는 어떤 것이든, 앞으로 계획을 따라서 무엇이 되겠다는 발상은 하지 않는다. 사람도 그렇다. 스노우보드를 탄다고 하자. 눈을 타고 내려오면서 왼쪽 아니면 오른쪽으로 가겠다는 지향을 할 수는 있지만, 어떻게 가겠다는 계획을 할 수는 없다. 어떻게라는 것은 나의 몸이 매 순간마다 만나는 눈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직 만나본 적 없는 눈에게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계획할 수 없다. 그때 그때 다르고, 오직 그때가 되어야만 알게 된다.


책임 (responsibility)은 반응 (response)과 어원이 같다. 내가 이미 받은 것에 대한 나의 반응을 의미하는 단어가 책임이다. 그것은 이미 나에게 왔다. 나는 반응할 뿐이다. 세상에 태어났으면 그것만으로 이미 받은 것인데, 그 사실에 반응 (respond)하는것이 곧 책임진다는 뜻이다. 태어났다는 사실 이후 삶에서 내가 받는 모든 것에 나는 반응한다. 반응하면 책임있는 것이고, 무반응하면 무책임한 것이다.

내 삶에서 내가 하는 일이란 없다. 내가 반응하는 일만 있다. 칭찬이든 돈이든 남에게 받았다면, 지금 내 손에 쥔 것보다 더 받을게 없다는 태도가 자연스럽다. 더 받겠다는 계획은 부자연스럽다. 둘은 매우 다른 태도다. 받은 것에 반응하느냐받을 것을 계획하느냐.


마치 꽃봉오리가 꿀바른 잎을 열어둔 채 기다리는 모습과 같다. 내가 받을 것을 계획하기보다 내가 반응할 여유의 자리를 만들어두는 것. 그러면 벌이 와서 내가 반응하여 같이 노는 것이고, 벌이 가면 잘가라고 보내주는 것이고. 그러면 자연스럽다. 나는 한 송이 꽃이 되어서 어떤 벌이 오든 그를 받아들이는 것. 내가 열면 남이 들어온다. 남이 열면 내가 들어간다. 올 때 막지 말고, 갈 때 잡지 말고. 


공부도 그렇다. 이 책 다음에 저 책 다음에 그 책 다음에 저 강의 다음에 ... 그렇게 계획을 세워서 배운다는 말은, 이 여자 다음에 저 여자 다음에 그 여자 다음에 ... 그렇게 계획을 세워서 짝을 만난다는 말과 같다. 이 벌 다음에 저 벌 다음에 그다음 벌 다음에 ... 그렇게 꽃이 계획을 세워서 벌을 만난다는 말과 같다. 부자연스럽다. 갈수록 무반응하게 되어버린다. 무책임하게 되어버린다.


그냥 벌 한마리 만나서 같이 즐거운 시간 보내면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누구를 만날지는 계획할 수 없다. 이미 다 받은 것에 나는 반응할 뿐이다. 내 할 일이란 받은 것에 반응하는 일, 되갚는 일 뿐이다. 그것을 책임 (responsibility)이라 한다. 꽃이 앞으로 만날 벌의 순서를 계획하지 않듯, 책임있는 공부도 그런 것이다. 사람이 책을 만나는 것에 비유해보자. 어떤 책을 만나면 그에 반응해 생각을 나누고 때가 되면 자연히 떠나보낸다. 앞으로 만날 책의 순서를 계획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사람은 꽃과 같아서, 내가 인위로 뭔가를 하는게 아니라, 나는 나를 열어서 내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나에게 흘러들면 그때에 반응한다. 남이 여는 것에 내가 반응하고, 내가 여는 것에 남이 반응하고. 서로를 강제하지 않으면서 서로에게 깊게 반응하는 그런 모습이 자연스럽다. 꽃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위: 받은 것에 반응하기, 아래: 받을 것을 계획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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