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상엔, 당장 읽지 못해 책상 한쪽에 모셔둔 급하지 않는 읽을거리들이 손끝에 까끌거리는 먼지들을 묻힌 채 청소거리로 슬며시 둔갑해버리는 날이 있다. ‘저걸 다 봐야 하는데…’ 의무감이 드는 순간 그것들은 내게 더는 계몽을 줄 지식이 아니라 하기 싫은 일 더미로 전락하고 만다. (실은 어떤 경우든 며칠이나 몇 주 사이에 구식 정보가 되는 정보는 없다.)
인생사도 비슷했다. 할일목록(to-do-list)를 만들면 중요한 일을 제법 잘 처리할 것 같아 그렇게 해 본 적이 있었지만 내겐 그리 잘 통하지 않았다. 게으름을 연상시키는 이 고백을 정당화하려는지 ‘할일목록을 만들면 실제로는 그 일들을 다 마칠 수 없다’고 한 어떤 글이 떠오른다. 사실이 그러하다. 목록을 만드는 것이 효율적인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목록을 만들든 만들지 않든, 목록으로는 도저히 관리해 낼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요즘도 새로 받은 달력을 보면서 새해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나 이런 행위는 “1년 뒤에 네가 이런 계획을 세웠다는 것조차 생각나지 않을 거야” 하던 시니컬한 옛 직장상사 말마따나 거의 무의미하다. 새해 계획이란 건 대개 ‘한 사람의, 지극히 주관적인 자기 암시 내지는 의지’에 불과하다. 계획 세우기를 마치기가 무섭게 그 계획을 질투하여 무산시키려고 수많은 방해꾼들이 다른 일들을 던져줄 것이다. 하고 싶은 일들은 아주 쪼금 우리 삶을 채우고, 우리를 많이 허둥대게 하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던 문제들이다.
자기에겐 특별히 문제가 너무 많아서 그게 인생을 볼모 잡고 자신은 결국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을 거란 압박감 속에 사는 사람도 있다. 인정하건대, (각자의 삶은 유니크함 그 자체니까) 그 압박감을 정확히 이해할 길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지 쌓여가던 읽을거리 한두 개를 읽어 치운 어느 날 얻은 깨달음이 있다: 지금 한 가지 일을 하면, 언젠가 해야 할 일 한 가지가 줄어든다. 끝나지 않는 일이란 없다. 좀 오래 걸리는 일이 있을 뿐이다. 한 시간을 하든, 하루를 하든,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그만큼 미래를 바꿔 놓는다.
미루면서 쌓아둔 작은 일들이 어느새 예사롭지 않은 일더미로 변해 버렸는가? 이제 얼마간 그 일을 건드리기 시작하면 된다. 물론 어떤 일엔 유효 기간이 있다. 감정을 달래야 하는 문제는 그 감정에 딱지가 앉아 다시 뜯어내면 피가 날 때까지 시간이 흐르기 전에 시작해야 한다. 생각 없이 한 말 때문에 속상해 있는 친구에겐 열 일 제쳐놓고 바로 지금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좋다. 매듭이 백 개라도 그걸 풀든 잘라내든 하나씩 처리하면 된다. 너무 잘하려고 노심초사할 필요 없다. 일 잘하는 방법은 지금 그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시작한 지 10분쯤 지나면 평온함에 휩싸일 것이다. 바로 그게 일하는 기쁨, 아니 일 없애는 홀가분함이다. ***
* 표지 사진: Forging hot iron (Lucas Podu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