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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계영 Jun 23. 2016

아내송(頌)

사랑이 어디서 왔지? 어떻게?


데이트 시절 어느 전화 통화에서, 읽지도 않은 릴케의 수사(修辭)*를 읊조리게 만든 아내
그 시절 무심함으로 황금 같은 시절을 허비하던 나에게 불평 대신 그저 섭섭한 눈길만 주던 아내
 
갑작스런 병 소식에 자정을 뚫고 달려간 내게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을 처음으로 보여 준 아내
연애 편지 한 장 쓰지 못한 나의 메마름을 가슴 떨리는 고백으로 풍요롭게 해 준 아내
 
약혼식에서 두 곡이나 되는 자축가(自祝歌)를 전혀 부끄럼 없이 불러대던 아내
“우리의 만남은 그저 기막힌 우연(偶然)일 뿐”이라는 나의 야만 앞에 눈물 흘리던 아내
 
혼인 신고 처리 지연으로 하마터면 결혼식을 미룰 뻔했던 아슬아슬함을 함께 모면해 준 아내
신혼 여행 비행기 안에서 마주 앉은 여승무원과만 수다를 떤 나를 보며 착한 눈물만 글썽였던 아내
 
첫 아이와 둘째 아이 임신 소식을 모두 울면서 전하던 아내


직장을 내 맘대로 그만 둬도 언제나 싫은 소리 하지 않던 아내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좋아하는 카페라떼를 커피우유로 바꿔 들던 아내
 
함께 커피를 마시고 함께 소파에 앉아 어깨동무하는 아내
밤이 늦어도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아내
 
나를 보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게 미소짓는 아내
나이 마흔 여덟에도 나날이 예뻐져만 가는 아내
 
‘나의 삶을 기쁨으로 채워 준’** 아내



* Lieben (R. M. Rilke)
   Und wie mag die Liebe dir kommen sein?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 왔는가?
** ‘나의 삶을 기쁨으로 채워 준’은 영화 You’ve Got Mail에 나오는 표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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