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고 일을 하기 위해 쓰는 글
"연봉협상 메일을 다 봤고, 연봉 얼마인 지 아는데, 일을 그렇게 하나요?"
"저 눈빛을 보고 내가 회의를 계속 해야하나?"
얼마 전 직장에서 임원으로부터 공개적으로 인신공격과 모욕성 발언을 들었다.
문제가 생겼거나 위기가 터지거나 내가 대단히 잘못한 상황이었다면 납작 엎드렸을텐데,
폭언이 쏟아지던 당시에는 머리가 멍해지면서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 하던 일을 잘 마무리 하고싶다는 생각에 그냥 버티고 버텼던 것 같다. 시간을 보니 회의 자리에 앉은 지 1시간이 훌쩍 지나있었고, 임원은 내 눈빛이 불쾌하다는 이유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 회의는 임원과 함께 하기로 한 업무를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 자료를 어떤 과정으로 득해야 하는 가에 대한 상의가 이뤄져야 했던 자리였다. 그리고 그 회의에 앞서 업무 협업 툴에 해당 일정과 계획에 대해 공유를 한 상태였다. 업무를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상황설명을 하던 나에게 임원은 느닷없이 내 모든 말에 잘못되었다며 태클을 걸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눈빛이 마음에 안든다며 무작정 화를 내기 시작했다.
참 이상했다. 나는 그 분의 노여운 표정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눈 초점을 책상에 맞추고 있었다. 속된 말로 눈을 깔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료를 어떻게 득해야 하는 가에 대해 방법을 묻기 시작했다. 내가 자료를 요청하여 받았던 과정과 앞으로 받아야 할 것에 대해 순서를 이야기 했다. 또 다시 인신공격이 시작되었다. 연봉협상 과정을 메일로 다 봤는데 그 연봉을 받고 이렇게 일을 하냐는 것이다.
내가 그 폭언과 인신공격을 들으며, 자료와 일을 먼저 혹은 같이 챙겼어야 했던 본인에게 책임이 돌아오게 될 것 같아 다른 이의 잘못으로 강하게 프레임 걸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폭인이 끝나자, 내 눈빛을 보며 도저히 말을 이어갈 수 없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 회의자리는 모든 직원이 다니며 보고 들을 수 있는 복도에 마련된 공개된 좌석이었다.
사람들이 흘낏흘낏 쳐다보며 소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사건은 뒷끝을 이어갔다.
그 날 나는 서서히 교묘하게 업무에서 배제되었고 관련 정보에서 차단되었다. 그 임원과 연관되어있던 프로젝트 외에도 다른 업무에서도 이름이 빠졌다.
폭언으로 얼룩진 회의날짜가 한 달여 흐른 시점이었다. 그 이후 계속해서 겪은 무시와 업무배제에 속이 곯았다. 더이상 억울하게 참기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던 마음, 내가 불리한 상황일지라도 잘못된 일을 잘못됐다고 당당하게 말할 방법이 있을 지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객관적으로 설명할 내용을 정리한 다음, 노동부, 변호사, 노무사 순으로 상담을 요청했다.
고용노동부는 #직장내괴롭힙 키워드로 검색해서 나온 지역관할 부처에 전화했고,
변호사 상담은 변호사 연결 앱 서비스 #로톡, 노무사는 #네이버엑스퍼트 통해 알아봤다.
<로톡>에 대해서는 설립 당시때부터 알고 있었다. 변호사 알아보는 수고로움과 상담 허들을 낮춘 사회문제해결형 변호사 매칭 서비스로, 나처럼 법적인 상황에서 우왕좌왕 하기 쉬운 사람들에게 너무나 좋은 서비스였다.
<네이버엑스퍼트>는 지인 소개로 처음 알았는데, <로톡> 처럼 전문 분야에 대해 손쉽게 상담할 수 있도록 전문가를 매칭해주는 서비스였다.
상담은 고용노동부, 변호사, 노무사 순으로 진행했다.
고용노동부 상담사
"상황을 들어보니 직장내괴롭힘 맞고 진정서를 넣을 수 있다. 왜 증거를 안남겼냐, 본인 잘못이 크다. (질문을 하나 하려하는 나에게) 더이상 나에게 묻지 마라. 진정서 넣고 감독관 지정되면 그 사람에게 물어라."
변호사
"상황이 피해자에게 불리한 것 같다. 녹취록도 없는데다, 그 사람이 회사 내 발언권이 크고, 팀을 옮길 수 있는 큰 규모가 아니다보니, 회사내 분위기상 피해자의 억울함이 더 커질 수 있다. 진정서는 낼 수 있으나 사실 증거 때문에 불리한 것이 맞다."
노무사
"아니 피해자분이 왜 참으시냐. 절대 참지 말고 당당하게 맞서야한다! (비밀유지나 가해자 피해자 분리가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는 나에게) 찝찝하더라도 이겨내셔야 합니다! 외부기관의 도움을 받아 이겨내세요! (외부기관이 어디냐고 묻는 나에게) 당연히 노무법인이죠~ (아 그렇군요… �)"
연이은 통화 상담을 끝내니, 이 상황이 블랙 코미디처럼 느껴졌다. 커피숍에 앉아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마치 마인드맵처럼, 내 사건을 중심으로 각자의 이해관계나 욕구가 새롭게 뻗어나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각각의 상담 결과를 핵심으로 추려보자면,
고노부 상담사
9-6 내에 업무 끝내고 가는 것이 목표. 상담에 크게 열의가 없음. 상담자 상황이야 어찌되었던 상담을 빨리 끝내고 싶음. 더 이상의 질문과 도움은 거절
변호사
별 이득이 없을 것 같은 사건, 굳이 연관되고 싶지 않음
노무사
본인의 계산기를 두드려볼 수 있도록 나를 부추겨야 하는 상황
상황을 객관적 시각으로 보니 각각의 이해관계가 보여 웃기기까지 했다.
직장내 괴롭힘은 예전에도 있었다.
예전에 한참 재미있게 다니던 외국계 회사에서, 남자 상사로부터 욕설, 폭언, 업무보복, 성희롱 발언을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직장내괴롭힘 제도가 그 때 있었다면, 그 사람에게는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알뜰한 와이프, 초등학생과 미취학 딸 둘을 키우던 사람이었다.
그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몇 년 흐르니 직장내괴롭힘 제도가 생기고 서서히 강화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부조리와 부담함에 대한 사회적 기준이 생기는 것에 기쁜 마음이 들었더랬다.
그래도 지금까지 회사생활 중 몇몇 이상했던 사람들 빼면, 좋았던 사수, 좋은 동료가 훨씬 많았다. 좋았다는 것의 기준은 배려와 존중 마인드를 기본적으로 지켰다는 것. 그리고 본인의 일과 직업에 순수한 열정이 있었던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이 곁에 있기에 부조리와 부당함 속에서도 정신 부여잡으며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사람이 이상해지는 순간은,
이기적인 욕심을 주체하지 못할 때,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기 시작할 때인 것 같다.
이번에 폭언을 한 임원도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 시점으로부터 이상해지기 시작했겠거니, 생각한다. 나와 있었던 일 뿐 아니라 지금도 본인이 연관된 모든 일에 어린 직원들탓, 남탓으로 프레임화 하고 있다. 이유는 본인이 빛나고 싶기 때문이다.
확실히 내가 지향하고 싶거나 본받고 싶은 롤모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점은 과거에도 지금도 '그 사람처럼 되지 않겠다'는 강한 다짐이 내 가치관에 뿌리내려 있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어 상담한 것은 아니었다. 다음에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내가 어떤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할 지 조사해보는 차원에서 필요하다 생각했고, 무엇보다도 후배들에게 불합리와 부조리에 잠식당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야 나중에 고민을 이야기 할 누군가에게라도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이번 사건은 종료하려 한다.
여러 사람이 객관적으로 짚어주었던 이번 사건의 약점 '증거 불충분' 때문에라도 ㅎㅎ 여러 가지를 롤로코스터처럼 경험했지만 마음을 정리할 수 있게 되어 지금은 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