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가 책을 읽는 방식
밑줄의 색이 여러 가지네요?
책상에는 늘 여러 권의 책이 쌓여있기 때문에 동료들이 지나가다 말을 걸거나 책을 펼쳐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느 날 동료 M이 책에 그은 3색의 밑줄을 보고 색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물었다.
“이거 직접 그으신 줄인가요?”
“네, 그럼요.”
“그런데 색이 여러 가지네요?”
누군가 책에 관해 물으면 나도 모르게 신이 나서 말을 쏟아내는데, 이번엔 3색 볼펜까지 보여주며 말했다.
“유용한 정보는 파란색, 책 내용이랑 상관없이 맘에 드는 문장은 초록색으로 그은 거예요. 정말 중요한 핵심 문장엔 빨간색! 책을 읽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동적으로 글을 따라가잖아요. 사실이랑 의견을 구분도 안 하고. 뉴스에서 아나운서들도 자기 생각을 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훈련이 안 되어 있는 거죠.”
동료 M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기하다는 듯 책장을 넘겨 밑줄을 살폈다. 그리고는 예전부터 책상에 올려놓고 읽지 않은 책을 펼쳐봐야겠다며 자리로 돌아갔다.
책을 종이로 만드는 이유는
밑줄과 메모로 더럽히기 위해서다
소설가 김중혁의 말처럼 ‘하얀 종이에 까맣게 글씨를 채우는 게’ 저자의 역할이라면, 그 위에 다양한 색으로 생각과 취향을 더하는 건 독자의 역할이다. 고분고분 따라가지 않고 매 순간 문장을 판단하며 다른 색으로 줄을 그어나가는 방식은 책 속으로 달려드는 적극적인 독서이며 흑백의 종이 위에 그림을 만들어가는 일종의 디자인이다. 책을 통해 성장하고 변화하는 나를 기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가치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디자인이라고 한다면, 줄을 긋는 단순한 행동만으로 우리는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
누구나 한 번쯤 초등학교 과학시간에 프리즘으로 무지개를 만들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삼각형 유리 기둥에 햇빛을 보내면 빛 속에 숨어있던 세상의 모든 색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3색 볼펜을 구성하는 빨강, 파랑, 초록은 빛의 3원색이다. 3색으로 밑줄을 긋는 것은 저자가 책 속에 담아놓은 생각의 빛을 독자가 3색 볼펜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분해하는 작업이다.
빛의 3원색으로 나만의 책을 디자인한다
색은 가장 원초적인 시각 요소다. 색으로 표시한 문장은 하나의 인상적인 그림으로 눈에 새겨진다. 무엇이든 시각으로 파악해야 효과적이다. 글자는 좌뇌를 자극하고 색은 우뇌를 자극한다. 글자와 색의 결합은 기억을 오래 지속시킨다.
3색 중 파랑은 차분한 이성의 색이다. 책의 메시지가 드러나는 중요한 부분에 사용한다. 객관적인 사실로서 중요한 정보이기 때문에 3색 중 가장 많이 사용한다. 반면 빨강은 주인공이다. 가시성이 월등해 결코 조연이 될 수 없다. 정열과 생명력을 상징하며, 따뜻하면서도 대담하다. 저자의 주장을 드러내는 핵심 문장이나 심장을 뛰게 하는 울림의 문장을 위한 색이다. 빨강은 아껴야 한다. 초록은 취향의 색이다. 휴식, 희망, 성장, 안정, 위안을 의미한다. 책의 주제와 상관없이 나의 시선을 끄는 특별한 문장, 표현이 재미있거나 공감이 가는 문장에 긋는다.
색을 구분해 밑줄을 그으면서
읽기의 수준을 높인다
색을 3가지로 구분하는 이유는 주체적으로 읽기 위해, 저자와 내 생각을 구분하기 위해, 사고의 전환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다. 읽기에도 수준이 있다. 글의 요지를 파악하고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는 능력에 따라 같은 책을 읽어도 받아들이는 정도에 차이가 생긴다. 우리는 용도에 맞게 색을 바꾸며 줄을 긋는 연습을 통해 읽기의 수준을 크게 향상할 수 있다. 일본 최고의 교육 심리학자이자 메이지대학교 문학부 교수인 사이토 다카시는 한 가지 펜으로만 줄을 긋는 건 머릿속 기어가 하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한 가지 색으로 줄을 그어 왔는데 색을 구분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광고인 박웅현의 저서 <책은 도끼다>를 만났을 때였다. 그는 기자 출신의 소설가 김훈의 문장들을 예찬하며 ‘의견과 사실을 구별해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창의성은 일상을 다시 보는 눈에서 비롯된다고 말이다. 아직 여물지 않은 디자이너였던 나는 박웅현과 김훈처럼 섬세하게 세상을 보는 예민한 촉수를 가지고 싶었고 이후로 색을 구분해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형광펜, 연필, 색연필, 포스트잇 등 다양한 방법으로 책에 흔적을 남기는 시도가 있었다. 처음에는 형광펜으로 줄을 그었다. 책에 메모를 하지 않던 시절이다. 기분에 따라 노랑, 파랑, 초록 형광펜을 집어 들었다. 형광펜은 색이 너무 강렬하고 필기를 하려면 추가로 펜을 가지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연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연필은 선을 그을 때 전해지는 촉감이 좋아 오랜 시간 함께 했다. 색을 구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는 연필 대신 2색 색연필을 사용했는데 금세 뭉툭해지는 성질 때문에 글씨 쓰기에 불편하고, 깨끗하게 색을 구분하기 어려워서 오래 사용하지 않았다.
볼펜은 필기에 제격이다. 지울 수 없기 때문에 단호함과 용기를 요구하며 그만큼 신중히 줄을 긋게 한다. 3색으로 밑줄 긋기는 작은 습관이기는 하지만 간편하지 않으면 지속하기 어렵다. 그래서 여러 개의 펜이 아닌 한 자루의 3색 볼펜에 정착하게 되었다. 나는 유니 스타일핏(UNI STYLEFIT) 0.28mm 3색 볼펜을 사용한다. 가늘고 선명하며 종이 뒷면에 색이 많이 비치지 않아 애용하고 있다. 최근 검정과 노랑을 추가한 5색 볼펜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기호에 따라 굵기와 색을 선택해 조합할 수 있다.
지울 수 없는 볼펜으로
씨앗 문장을 수집해 내 안에 새기자
내 안에 오래 새겨두고 싶은 문장을 만나면 지울 수 없는 볼펜으로 힘주어 줄을 그어보자. 밑줄 긋기는 눈과 손으로 한 번씩 읽는 자연스러운 2번 읽기 독서이다. 색이 다른 밑줄은 이정표가 되어 다시 읽기를 수월하게 돕는다. 3색으로 밑줄 긋기가 익숙해지고 무채색의 활자를 자기만의 색으로 채색할 때의 쾌감을 알게 되면 어느 순간부터 밑줄을 그을 만한 문장이 나타나기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될 것이다. 만일 밑줄을 긋고 싶은 문장이 하나도 없는 책이라면 당장 덮어버리자. 우리는 다시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을 읽어야 한다.
소설가 이만교는 짙은 밑줄을 긋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문장을 ‘씨앗 문장’이라 말했다. 나에게도 씨앗 문장으로 가득한 나만의 빨간 책이 있다. 바로 일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이자 디&디파트먼트의 경영자인 나가오카 겐메이의 저서 <디자이너 생각 위를 걷다>이다.
장벽은 지극히 평범한 현상이다.
일은 결과가 전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사실은 그 과정이 전부인 듯하다.
시작에는 설렘이라는 즐거움이 있고 지속에는 책임이라는 즐거움이 있다.
'새롭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는 '새것', 또 하나는 '낡지 않은 것'.
내가 긋는 밑줄은 곧 책의 온도가 된다. 깨달음의 종류와 빈도만큼 책은 다채롭게 변한다. 파란 줄이 가득한 책은 궁금함을 해결해주는 시원한 책이고, 초록 줄이 가득한 책은 재미와 위로, 감동을 주는 포근한 책이다. 수많은 빨간 밑줄을 그을 수밖에 없는 책이라면 분명 내 인생의 뜨거운 책이 된다.
제법 쓸모 있는 전문가로 성장하기 위해 넘어야 했던 문턱마다 나는 씨앗 문장으로 되돌아가고는 했다. 두 번, 세 번 읽을 때마다 빛의 3원색으로 밑줄을 다시 긋는다. 빛의 색은 섞을수록 밝아지는 성질이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색은 빛이 되고 빛은 에너지가 된다.
3색 볼펜으로 거침없이 더럽혀라. 빛의 3원색으로 디자인한 나만의 책들이 미래를 찬란한 빛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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