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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선 Mar 21. 2019

책을 읽는 사람만이 손에 넣는 것

책으로 얻은 생각의 힘은 성장의 엔진이 된다




“책이 밥 먹여 주니?”

“그림만 그려서 뭐 먹고살래?”     


아빠가 말했다.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며 고3 수능을 포기하던 시기, 그리고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사 모으던 시기에 말이다. 내 학창 시절만 해도 어른들은 책쟁이와 그림쟁이를 돈 못 버는 직업의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했다. 아마 누군가는 골방에서 펜으로 종이와 씨름하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뜬구름만 잡는 가난뱅이 인간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 움큼의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작가와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인공 지능이 대체하기 어려운 직업 리스트 상위권을 차지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나는 어른들이 걱정하던 바로 그 책과 그림으로 생활에 필요한 만큼 잘 벌어서, 잘 먹으며, 잘 살고 있다. “책만 계속 읽어서 어디다 써먹을 거니. 그림 그려서 한 달에 100만 원이나 벌 수 있어?”라고 말했던 그 당시 아빠는 걱정 많은 첫째가 10년 후, 20년 후 은퇴 없는 평생 현역 전문가가 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어릴 적부터 여러 가지로 유별난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궁금한 게 많아 질문을 너무 많이 해서 집에선 나를 ‘말순이’라고 불렀다. 왼손잡이였던 나는 제발 글씨만은 오른손으로 쓰라는 잔소리에 시달리며 강제로 양손잡이가 되었다. 무언가 모으는 걸 좋아해서 침대 밑을 오만가지 잡동사니로 가득 채우기도 하고, 집에 있는 은박지 한 통을 다 써서 오드리 헵번의 머리 위에나 어울릴 법한 반짝이는 모자를 만들기도 했다. '이상하다, 특이하다, 재미있다, 집착한다'라는 수식어는 사는 동안 늘 따라다녔다. 그렇지만 나는 그저 머릿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생각을 어떤 형태로든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 책과 그림은 내가 숨을 쉴 통로였다. 그런 내가 디자이너로서 성장해 온 과정 속에는 책으로 인해 맞이한 두 번의 전환점이 있다.




나는 16살 때부터 디자이너를 꿈꿨다. 하지만 미술학원에 다닐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23살에 대학에 입학해 27살에 디자인 전문 회사에 입사하면서 10년 만에 꿈을 이루었다.


회사에 입사하니 대학에 다닐 때 만들었던 ‘내 맘대로 예술작품’이 아닌 실무에 쓸 수 있는 진짜 디자인을 다시 배워야 했다. 나름대로 잘해왔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현장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하얀 캔버스에 새로운 것을 그려내야 하는 압박과 확연히 드러나는 결과물에 일일이 지적받는 상황을 견디는 정신력을 키워야 했다. 한편 내가 만든 디자인 산출물이 고객사의 상황에 많이 좌우되고,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도 수명이 3개월, 6개월, 길어봐야 1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현실이 힘들었다. ‘예쁜 쓰레기’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명이 없었다.


롤모델을 찾고 싶었지만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멘토는 없었다. 그저 디자인이 좋아서, 무언가를 만드는 게 좋아서 디자인을 시작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일을 계속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매일을 보냈다. 언제나 남보다 늦게 시작했다는 강박에 시달렸는데, 20살 이후로 나보다 어린 친구들과 경쟁하면서 출발선이 다른 만큼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다그치고는 했다. 그러나 지나친 의욕은 오히려 성장을 더디게 만들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대인 공포증으로 집에만 있던 기간이 3개월이다. 이 시기를 극복하고 세상으로 걸어 나가야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 내가 한 일은 커다란 종이에 마인드맵을 그린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에 보이게 그려내고 싶었다.


디자인과 책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가지가 뻗어나갔다. 종이가 가득 찰 때쯤 불현듯 책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자인만큼 좋아하는 책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다. 지금이 아니면 안 돼!’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슬럼프에 빠진 나에게 어떤 형태로든 분명 돌파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해 가을, 서울 출판 학교(SBI : Seoul Book Institute)에 입학했다. 내 첫 번째 전환점이었다.


출판 학교는 해마다 출판 편집자, 출판마케터, 출판 디자이너 부문으로 각각 20여 명을 선발한다. 출판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실무자와 대표가 직접 강의하는 형식으로 6개월 동안 교육이 진행된다. 나는 출판마케터 과정을 선택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0여 년 만에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평일 내내 친구들과 공부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입학 후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나보다 책을 훨씬 많이 읽는 동기들이었다. 23살부터 31살까지 서로 다른 나이와 전공의 사람들이 저마다 출판업에 대한 꿈을 가지고 모여 있었다. 문학 마니아, 역사를 전공한 친구, 개인 사업을 하다 온 친구, 세계 일주로 20대를 외국에서 보낸 친구 등 모두 개성 있고 똑똑한 사람들이었는데,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의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출판사 MD, 대형 출판사 마케터, 1인 출판사 대표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유명한 출판사 대표의 특강도 종종 있었다. 온·오프라인 서점의 관계와 책의 유통 및 제작 프로세스도 배웠다. 출간 예정인 원고의 제목과 표지, 마케팅 계획을 구상하는 시간도 흥미로웠다. 과정 중에 우리 팀이 만든 책의 제목이 그대로 출간되기도 했다. 이렇게 책을 중심으로 한 경험들은 디자이너만 모여 있을 때는 없던 자극을 주었다. 오래전 미술학원에서 처음 그림을 배울 때처럼 다시 한번 심장 뛰는 매일을 보냈다.




출판 학교 이후 나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독서 방식이다. 단순히 글자를 따라가는 수동적인 독자였던 내가 책을 만드는 제작자와 마케터의 눈으로 책을 보게 된 것이다. 날 것의 원고가 어떤 과정을 통해 책으로 만들어지고 유통되어 나에게 오는지 알게 되니 책의 권위에 주눅 들지 않고 친근하게 대할 수 있었다. 책에 코를 파묻고 잊어버리기 위해 읽는 게 아니라 한 발 물러나 전체를 보며 책을 선택하는 여유도 생겼다. 또한 내가 아는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생각에 한 권 한 권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책을 둘러싼 환경, 사람, 과정의 이해는 객관적이면서 주체적으로 책을 읽게 했다.


1년 정도 책에 집중하는 시간을 보낸 후, 나는 다시 디자인으로 돌아가고 싶어 졌다. 예전과 달라진 자신을 느꼈고, 책과 함께라면 디자이너로서 방향을 잡고 성장해 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디자이너의 모습과 자질, 그렇게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리고 각각의 자질마다 책에서 인생의 멘토를 소환했다. 피터 드러커, 다니엘 핑크, 말콤 그래드웰, 빅터 파파넥, 나가오카 겐메이.. 예전에 읽었지만 망각 속으로 집어던진 책들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들과 함께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소명을 치열하게 고민했다. 비전의 부재는 내가 넘어야 할 가장 큰 벽이었고, 능동적으로 목적을 가지고 책을 읽음으로써 어느 순간 벽은 계단이 되었다.


주니어에서 시니어로 한창 성장해야 할 시기에 다른 분야의 공부를 하겠다는 무모함은 어디서 온 것일까? 디자인은 트렌드를 읽는 감각이 중요하기 때문에 뒤처지는 건 잠깐이다. 실무에서 손을 놓는 것은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시간이 흘러 출판 학교 면접관이었던 선생님께 IT업계에서 디자인하던 나를 왜 뽑았는지 물었을 때 ‘절박해 보였다’고 하신 말이 떠오른다. 만일 그 절박함을 다른 방향으로 발산해 포토샵에만 매달리는 안전한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지금쯤 고객이 시키는 대로 적당히 그림만 그려내는 그렇고 그런 디자이너가 되지는 않았을까. 분명 앞으로 몇 살까지 벌어먹고 살 수 있을지 막막해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디자인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요즘 두 번째 전환점에 서있다. 앞으로 40대의 디자이너가 될 내 모습을 구체화하는 과정을 겪어내는 중이다. 지난날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디자이너의 최선은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 고객이 원하는 것을 잘 파악하는 사람, 목적에 맞는 결과물을 잘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최선을 다해 일하고 회사의 대표가 나를 신뢰한다고 해도 결국 내가 회사의 주인은 아니다. 명함의 직위는 언젠가 사라지며, 회사에 소속된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시대는 변했고 디자이너가 단순히 예쁜 것을 만들기만 해서는 팔리지 않는다. 서비스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 환경, 제약, 시간, 트렌드 등을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어느 순간 자리에서 밀려 날 수밖에 없다.


책으로 얻은 생각의 힘은 성장의 엔진이 된다. 길이 너무 많아 어디를 선택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 또는 길이 하나밖에 없어 선택권이 없다고 느껴질 때 책은 이정표가 된다. 길이 너무 많은 사람에겐 우선순위를 통해 더 중요한 선택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하나의 길만 있는 사람에게는 보지 못한 다른 길을 안내한다.


누구나 일을 하다 보면 연차와 경력에 상관없이 크고 작은 문제, 의문, 혼란 그리고 슬럼프와 마주치게 된다. 그때 우리는 스스로 질문하고, 책을 선택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다.


"지금까지 만나 본 디자이너들과 좀 다르신 것 같아요."


우리는 모두 자기 생각의 산물이며 겉모습은 내면이 반영된 모습이다.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 프로젝트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 전문성, 함께 일하고 싶은 신뢰감은 오직 책을 읽는 사람만이 손에 넣을 수 있는 내공이다. 남들이 모르는 뭔가가 있는 사람, 내공이 있는 사람, 바로 책을 읽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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