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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선 Jan 21. 2020

태도가 생각을 만든다

주어진 상자 밖에서 사고하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세요?


점심시간이었다. 모두 식사를 하러 나가고 쉬고 싶은 마음에 혼자 자리에 남아 있으려니 한쪽에 누군가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디자이너 K였다. 그는 벽에 한 가득 붙어 있는 디자인 시안들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옆 팀에서 진행 중인 명절맞이 프로모션 페이지였는데 오랜 기간 동안 고객의 컨펌을 받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어 디자이너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K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오픈 예정일이 얼마 안 남았는데 걱정이네."


"그러게 말이에요."


"하필 이렇게 바쁠 때 기획 파트도 공석이고 어떡하니."


"벌써 3주째예요. 이럴 때 보면 마치 고객이 괴롭히려고 일부러 퇴짜를 놓는 거 같아요."


"일부러? 그건 아니야. 봐봐. 고객이 왜 마음에 안 들어하는지 모르겠어?"


"네?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하지 않았나요?"


"물론 잘했지. 그림 그리기의 관점으로만 보면 아주 잘했어. 그런데 내 눈에는 이 많은 시안들이 전부 하나처럼 보여. 방향성이 없잖아. 고객은 언제나 선택하길 원하거든. 계속해서 스킨만 갈아 끼운다고 통과될 리가 없지. 디자인이 단지 예쁜 그림 그리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큰 방향을 설정하고 들어가지 않으면 지금처럼 작업자들만 고생하게 돼."


"방향을 정한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음... 예를 들면 이번 프로모션에서 강조하고 싶은 핵심이 있을 거잖아? 고객사가 오프라인 매장을 끼고 있는 커머스 사니까 신선식품을 많이 확보했다던가, 예약 배송 서비스를 제공한다던가, 선물 세트 구성이 아주 좋다던가 뭔가 이 회사가 제공하는 상품이나 서비스에 특장점이 있기 마련이거든. 마케팅 부서에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물어보는 것도 중요하고.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이 고객사가 추석이나 설에 했던 기획전은 어떤 식으로 구성했는지 궁금하네.


다른 방향을 생각해 보자면 엄청나게 싼 가격이나 혜택을 중심으로 디자인을 진행할 수도 있지. 디자인 시안을 보면 상단 키 비주얼 영역 바로 아래 할인 쿠폰 영역을 크게 배치하기는 했지만 강조가 덜 되어 있어서 그쪽 방향을 고려하고 디자인을 한 건지 상당히 애매해.


이것 말고 또 다른 방향을 얘기해보자면 연초 프로모션을 기획할 때 가장 흔하게 쓰는 기법인 올해가 무슨 띠인지를 강조하는 방법이 있어. 내년이 개의 해니까 제공할 수 있는 혜택들을 개 모티브로 포장하는 거야. 흔히 마케팅에서 '~하시개'처럼 말장난 많이 하는 거 봤지? 분명히 내년 초면 여기저기서 엄청 많이 써먹을걸? 이건 일차원적이긴 하지만 소비자들의 눈에 잘 띄면서도 기획하는 입장에서 쉽게 아이디어를 내는 방법이야.


잠깐 생각한 거지만 이렇게 주력 상품 강조 안, 혜택 강조 안, 개의 해 강조 안이라는 3가지 방향이 나왔잖아? 디자이너 별로 방향을 하나씩 맡아서 리서치하고, 간단하게 시안 작업을 해서 같이 본 다음, 비주얼이랑 카피랑 콘텐츠 구성이 제대로 맞아떨어지는지 살피면서 진도를 나가야 하는데 기획자가 없다고 달랑 ‘설’이라는 글자만 크게 써서 예쁜 그림으로 장식해 가져 가니 고객이 못마땅하지. 방향성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잖아. 디자이너가 방향을 정하고 역으로 기획 파트에 제안할 수도 있는 건데...


비주얼 완성도는 시간만 어느 정도 투자하면 끌어올릴 수 있지만 방향성이 없거나 틀리면 답이 없어. 이럴 거면 디자이너가 왜 필요할까? 그냥 이미지 파는 사이트에서 적당히 사다 끼워 넣으면 되지 않을까? 디자인을 리드하는 PL(Project Leader)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한 거야."


그날따라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의도치 않게 점심시간이 디자인 토론회(라고 하기엔 너무 일방적)가 돼버렸다. 꼰대처럼 말을 너무 많이 했나 싶어 곁눈으로 표정을 살피는데 K가 물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세요?"


"응?"


"생각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책을 많이 읽으면 되나요? 수업 같은 게 있는 건가요? 저도 선배님처럼 하고 싶은데... 디자인을 해놓고 제대로 설명을 못해서 답답할 때가 많아요. 어떻게 연습하신 건가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간단한 질문이지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생각의 틀을 잡는 것은 어디서 수업을 듣거나 책을 몇 권 읽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상황과 조건을 파악하고, 우선순위를 가리고, 방향을 설정하고, 최대한 이탈 없이 생각을 끌고 가는 사고에 관해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려웠다.





크든 작든 누구나 생각 상자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바로 '탓'을 하는 것인데 대다수는 어느 한쪽 탓이라고 단정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고객의 성향이 제멋대로여서 대응하기 힘들다는 말은 작업자들이 가장 쉽게 내뱉는 탓 중에 하나다. 태도에 따라 상황을 개선할 여지는 늘 있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나는 후배들에게 탓을 하기 전에 최소한 거쳐왔어야 할 사고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크든 작든 누구나 생각 상자를 가지고 있다. 다른 말로 '사고의 프레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식과 관점으로 만들어진 이 다면체는 사람마다 크기와 모양이 다르다. 상자의 크기는 지식의 양을, 상자의 면 수는 관점의 양을 나타낸다. 지식이 많아져 상자의 크기가 커질수록 해당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시야가 더 넓어진다. 한편 관점이 다양해질수록 대상을 더 입체적이면서 유연하게 볼 수 있다.



질은 양에서 만들어진다는 양질 전환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양이란 '뭐든 무작정 많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많이'를 의미한다는 것까지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흔히 뭐라도 아는 것이 많으면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지만, 지식의 양이 많아진다고 해서 덩달아 창의력이나 문제 해결 능력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생각의 양을 늘리는 행위는 '지식의 양을 늘리는 것'과 '관점의 양'을 늘리는 것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  있다.


어쩌면 상자의 크기를 키우기 전에 상자의 면 수를 늘리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단순히 상자의 크기를 키우는 것(지식 확장)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편향된 관점에서 모으는 지식이 한쪽 면만 비대한 기형적인 형태의 상자를 만들거나, 면의 수가 하나밖에 없는 종잇장 같은 얄팍한 상자를 만들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어떤 문제와 마주쳤을 때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밖에만 사고가 고정되어 있거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거나,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가진 생각 상자의 형태는 평면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한 면만 보는 평면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사면체, 육면체, 십 육면체로 면 수를 늘려가다 보면 어느 순간 구처럼 상자가 둥글어진다. 이는 커뮤니케이션 상의 오류가 줄어든다는 의미이고, 갑작스러운 문제 상황에서 임기응변에 능숙해진다는 의미이며, 과제를 수행하면서 낭비하는 시간과 에너지가 줄어든다는 의미다.


탓을 하기 전에 자기 자신이 '충분히 다양한 관점으로 대상을 보고 있는지' 그리고 '충분히 많은 정보를 수집해 내용을 파악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자신의 생각 상자가 얼마나 크고 또 얼마나 둥근지 스스로 체크한 후에도 개선점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탓을 하는 일이 '핑계'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주어진 상자' 밖에서 사고하기


그런데 생각 상자에는 사람들이 모르는 중요한 비밀 하나가 있다. 그 비밀은 바로 상자가 타인에 의해 설계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 상자는 '주어진 상자'다.


서점을 둘러보면 사회 과학, 행동 경제학, 인지 심리학 등 데이터와 사회 실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잘 파는 방법, 고객을 유혹하는 방법, 원하는 메시지를 주입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온다는 걸 알 수 있다.


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디자이너로서 내가 만든 산출물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면 좋겠고, 쓰이면 좋겠고, 변화를 일으키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훌륭하고 유명하고 똑똑한 사람들의 잘 쓴 책들을 꾸준히 읽으며 배워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행위가, 그런 방법을 이야기하는 책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이것을 시도해도 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일터에서 만난 그 누구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진짜 영향력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탄탄한 이론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쓰인 책 중에 그 어떤 책도 저변에 깔려 있는 진짜 의도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아마 암묵적으로 금기시하고 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디자이너, 기획자, 개발자, 마케터, 기업가... 무언가를 만드는 생산자들은 기술과 정보와 연결을 활용해 점점 더 똑똑하게 사람들을 유혹한다. 자신들이 원하는 행동을 유도하기 위해 환경을 설계하고, 선택지를 제시하고, 반응을 살피며, 피드백을 한다. '고객, 사용자, 소비자 퍼스트!'라는 아름다운 말 이면에는 내 상품과 내 서비스에 사람들이 교묘히 중독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사용자가 제품을 습관적으로 사용하게 만드는 원리를 파헤치는 책 <훅 Hooked>은 보기 드물게 생산자의 윤리를 이야기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조종 매트릭스(Manipulation Matrix)는 제품을 개발하기 전에 생산자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질문 1. 나라면 이 제품을 사용하겠는가?
질문 2. 이 제품이 사용자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개선시키는가?


어떤 답을 하느냐에 따라 생산자는 4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 생산자의 4가지 유형 ]

조력자(Facilitator) : 기꺼이 자신이 만든 제품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사용자의 삶을 바람직하게 개선시키기를 지향함

오락가(Entertainment) : 자신에게는 필요하지만 타인의 삶을 개선하는 데는 기여하지는 않는 오락거리를 생산함

장사꾼(Peddler) : 사용자에게 유용한 것처럼 포장하지만 정작 자신은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고, 사용할 생각도 없음

마약상(Dealer) : 자신은 결코 사용하지 않으면서, 사용자의 삶을 개선하지도 않고, 심지어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음


디자이너로서 '만드는 자의 윤리'를 기억하고자 한다. 내가 직접 사용하고 싶으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제품을 만드는 조력자가 되고 싶으니까. 쉽지 않겠지만 내가 만드는 무언가가 어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 가치를 잊지 않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장사꾼, 오락가, 마약상이 되는 건 너무 쉽고도 달콤한 일이다.


동시에 우리는 소비자로서, 사용자로서, 고객으로서 알아야 한다. 세상에는 내 인지적 한계와 심리 상태를 열심히 공부해 생각과 행동을 조종하고 습관을 들이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먹고 마시고 생각하고 공부하고 사람을 만나고 휴식하고 생활하는 환경은 누군가에 의해 디자인된, 즉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설계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타인에 의해 주어진 상자 안에서 사고하게 된다.




태도가 생각을 만든다


그렇다면 주어진 상자 밖으로 벗어나 다각도로 대상을 보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권하고 싶은 것은 '상자의 존재를 인지하기'다. 잠시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면 알 수 있다. 이 세상에 디자인이 아닌 것은 없다는 사실을.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수많은 물건들, 납작한 평면의 그림, 만질 수 없고 스크린 상에서만 존재하지만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각종 소프트웨어, 서비스, 브랜드. 이 뿐만이 아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행동과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팀 문화, 회사의 보고 절차, 교통법, 동료 사이의 예의범절까지도 모두 디자인된 것이다. 디자인이란 눈에 보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디자인은 기획이며, 기획은 곧 제안이다.


모든 제안에는 의도가 담겨 있다. 제안받는 사람은 제안하는 사람이 설계한 조건과 선택지를 기반으로 생각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이미 상자(프레임) 안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먼저 제안하는 사람이, 먼저 판을 까는 사람이 주도권을 쥐기 마련인 것이다. 한 사람이 모든 면을 볼 수는 없지만 내가 마주하고 있는 대상에는 여러 가지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며, 최소한 생산자(제안하는 자)와 사용자(제안받는 자)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을 시작해야 한다는 걸 염두하는 게 중요하다.


다면적인 사고를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질문을 기억해야 한다.


1. 누가 어떤 프레임을 만들었는가 : 상자의 존재 인지하기

2. 나는 몇 가지 관점으로 대상을 보고 있는가 : 상자의 면 수 인지하기

3. 나는 관점마다 충분한 정보를 수집했는가 : 상자의 크기 인지하기


누구나 나름의 생각 상자를 구축하고 그 안에서 세상을 본다. 다면적 사고(입체적)는 내가 지금 보는 관점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에서 시작한다.




몇 년 전, 디자이너 K가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물었을 때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내뱉은 한마디는 "태도의 문제인 것 같아."였다.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하고, 여기저기 수업을 찾아다니며 배우고, 여러 권의 책을 읽었어도 결국 모든 것의 시작점은 태도에 있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아무래도 짧은 시간에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꼭 글로 답을 해줄게."


"정말요? 언제 쓰시는 건데요? 보고 싶어요!"


지금 쓰는 이 글이 K에게 충분한 답이 될 수 있을까?

오랜만에 연락을 해봐야겠다.

 

이제야 약속을 지켰다고.







참고 도서

니르 이얄 <훅 Hooked>




연관 글 : https://brunch.co.kr/@jin-lab/46


연관 글 : https://brunch.co.kr/@jin-lab/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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