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진선이는 말이 너무 빨라."
자주 듣던 말이다. 노래방에 가면 박지윤의 노래 <환상>을 불렀다. 카페에서는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시끄럽게 수다를 떨었다. 말이 많은 편은 아니어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고, 궁금한 게 있으면 손을 들었다. 내향적이라 굳이 앞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옆에 앉은 사람에게는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다. 내게도 그런 평범함이 일상이던 시절이 있었다.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는다. 내 목소리. 나는 원래 어떤 소리를 내는 사람이었던가.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나는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감기에 걸렸을 뿐.
대학 졸업을 앞둔 4월의 감기는 지독했다. 아무것도 못할 정도로 끙끙 앓으며 열흘을 누워있었다. 몸을 회복해 정신을 차리자마자 밀린 학교 과제를 하려고 컴퓨터를 켰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니, 이제 몸은 괜찮아?" 모니터 앞에 앉은 나에게 동생이 말을 걸었는데 어쩐 일인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분명 말을 하고 있는데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쥐어짜듯이 소리를 내보려고 애쓰는 중에 엄마가 방으로 들어왔다.
"엄.. 마, 목.. 소리.. 가 안... 나.... 와."
평범함을 잃은 순간이다.
연축성 발성 장애. 생전 처음 듣는 병명을 의사는 건조하게 내뱉었다. 아직까지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불치병이라고 말하는 그의 말투가 너무 무심해서 마치 당장 내일이면 씻은 듯이 나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보장은 못하지만 생각이 있으면 음성 클리닉에라도 가보라고 했다. 다음 환자가 기다리니 빨리 결정하라는 듯한 얼굴로. 종합병원 특유의 분주함이 불편해 뭐든 해보겠다고 말하고 서둘러 일어났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어떨 때는 음절 단위로 소리가 뚝뚝 끊겼다. 큰 소리를 내려고 하면 가슴과 목에 힘이 들어가 인상을 찌푸리게 되면서 두통이 왔다. 하루아침에 내 몸에 달라붙은 핸디캡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무력감을 동반했다.
집 앞 슈퍼에 가더라도 "봉투 드릴까요? 포인트 있으신가요?"라고 직원이 말을 건다. 그럴 때마다 "아니요. 괜찮아요."라는 말을 못 해서 고개만 저었다. 택시를 타면 목적지가 어디인지 기사님이 알아들을 때까지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해야 했다. 지나가던 누군가 길을 묻기라도 하면 당황하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상의 순간들 하나하나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내 핸디캡을 상기시키는 작은 자극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복되니 밖에 나가는 것 자체를 꺼리게 됐다. 이런 내가 첫 회사를 4년이나 다녔다.
매일 아침 출근을 하기 위해 문을 열고 나갈 때면 절벽으로 뛰어드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한 걸음마다 용기가 필요했다. 어느 날은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에 갑자기 눈앞이 하얗게 뒤덮여 그 자리에 주저앉아 정신을 잃을 뻔도 하고, 어느 날은 출근하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헛구역질을 하기도 했다. 직장 동료들은 내가 수줍어서 목소리를 떤다고 생각했다. 핸디캡을 드러내느니 차라리 수줍은 척 연기하는 것이 마음 편했기 때문에 굳이 오해를 풀지 않았다. 퇴근길에는 울기 위해 사람이 없는 길을 따라 먼 길을 돌아서 역으로 갔다. 병신 같은 하루를 곱씹을수록 앞날이 아득했다.
이런 삶의 디테일한 공포와 감정의 기복을 가족도 친구도 직장 동료도 알지 못했다. 나는 나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니까. 모두가 나를 그저 말이 없고 수줍음이 많고 감정 기복이 없는 그런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나는 디자이너다. 동시에 어릴 적 꿈을 이룬 행운아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꽤 오랜 세월 동안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평탄치 않은 길을 걸었다. 그래서 핸디캡 때문에 힘들다고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디자이너여야만 했다.
4년을 꽉 채우고 회사를 그만둔 이유는 조용히만 있어서는 버틸 수 없는 시점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주니어에서 시니어로 넘어가기 위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나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결국 도망쳤다.
도망친 곳은 책 속이었다. 말할 수 없으니 읽기에 집착했다. 디자이너가 한 명도 없는, 디자인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출판 학교에서 6개월을 보냈다. 새로운 환경과 사람과 맥락 위에 서 있으니 차분히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약점과 강점, 견딜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특성 그리고 성향. 나는 진정 구제불능인지, 디자이너로서 자격 미달인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했다.
'정말 도망치는 길 밖에 없는 걸까?'
'과연 이것이 최선일까?'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다 보니 어쩌면 내게 닥친 진짜 불행은 발성 장애라는 신체적 핸디캡이 아닌 자신의 가능성을 한정 짓는 심리적인 장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계를 넘어 좋아하는 일에서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는 일과 커뮤니케이션을 나만의 언어로 새롭게 재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디자인이란 협업을 통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일련의 과정이자 행위다. 협업은 음성 커뮤니케이션과 문자 커뮤니케이션으로 이루어진다. 결과물은 사용자와 생산자를 연결해주는 시각 커뮤니케이션으로서 기능한다. 디자인은 커뮤니케이션에서 시작해 커뮤니케이션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중에 내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분은 협업을 위한 음성 커뮤니케이션이었다.
그렇다면 협업을 위한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일까? 나는 커뮤니케이션이란 단지 목소리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잘 듣는 것, 맥락을 빠르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 내용을 정리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전달하는 것, 메시지의 핵심을 먼저 말하는 것, 표정과 태도에 진정성을 드러내는 것 등 많은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기술이자 태도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부족한 부분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다른 요소에 더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말하기가 불편해지면서 오히려 나의 일과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과장일까.
1년 후, 나는 다시 디자인으로 돌아왔다. 심리적인 장벽을 넘어섰다고 해서 현실적인 장벽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자신을 돌아보고 질문하고 답을 하는 과정에서 축적한 자기 지식(Self-knowledge)이 막연한 두려움을 하나씩 걷어내 주었다. 그 후로도 많이 넘어지고 많이 울었지만 결코 도망치는 일은 없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일,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작정 버티기만 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그때 도망친 곳에서 나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