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은 없어도, 엄마와 함께해 즐거운 로키산맥 드라이브
캘거리에 머문 시간은 잠자는 시간 포함 14시간 정도. 우리는 재스퍼로 가기 위해 일찍부터 서둘렀다. 자고로 먼 길을 가려면 배부터 든든히 채워야 하는 법. 우리는 에어비앤비 주인이 일러준 카페 Phil & Sebastian Coffee Roasters로 향했다.
“와 분위기 좋다!”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해치고 들어간 카페는 더없이 따뜻하고 아늑했다. 커피 볶는 카페답게 진한 커피 향이 풍겼고, 갓 구운 빵과 쿠키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따뜻한 조명, 우드톤의 테이블과 의자, 은은한 재즈까지 너무나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엄마 뭐 마실 거야?”
“글쎄 커피 먹고 싶긴 한데, 아침에 믹스 커피 마셔서 한 잔 다 먹는 건 부담스럽네. 너 라떼 한 잔 시키면 한 모금만 마실게.”
“엄마 그냥 한 잔 시켜서 다 마셔. 나는 한 잔을 다 마시는 게 좋아."
“그래? 아주 딱~~ 한 모금만 먹을 건데?”
“어휴 알았어."
낳아준 엄마한테 너무 야박하게 구나? 하지만 난 고여사가 '한 입만 먹을게'라고 할 때마다 방어적이 되었다. 고여사의 한 입이 정말 딱 한 입으로 마무리되지 않는 게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고여사의 이런 특성을 먼저 파악한 건 나보다 2년 8개월 먼저 태어난 오빠였다. 어려서부터 그는 엄마가 라면에 손대는 걸 특히 싫어했다. '울 오빠, 마른 주제에 식탐 있네' 하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깨달았다. 고여사가 “엄마 한 입만” 해서 기꺼이 냄비를 내밀면 고여사의 젓가락은 3~4번이 와서 거의 반 정도가 없어지는 일이 벌어지고야 만다는 것을.
오빠와 내가 "엄마, 한 입만이라며! 이럴 거면 애초에 엄마 것까지 2개를 끓이잖아!"라며 불만스러워하는 것은 우리가 불효자라서라기 보다, 우리의 라면 기대량이 갑자기 반토막 나는 데서 오는 본능적인 짜증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고여사를 위한 변명: 고여사는 살림 잘하는 사람답게 음식을 남기거나 식료품을 낭비하는 게 싫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살림을 해보지 않은 우리는 이를 몰랐다)
아무튼 이번에는 고여사랑 사이좋게 나눠 먹을 생각으로 따뜻한 카페라떼 1잔, 샐러드, 스콘, 샌드위치를 시켰다. 샌드위치와 스콘은 깔끔하고 먹음직스러운 모양이었고, 라떼는 향이 좋고 고소했다. 한국에서 가던 유명 카페들보다 훨씬 맛있었다.
"엄마, 진짜 맛있지 않아?"
"응 맛있네. 여기 잘 찾아왔다."
고여사는 내 커피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나는 다른 곳을 보는 척하면서 고여사가 얼마나 마시는지 은근히 신경 쓰고 있었다. 고여사는... 정말로 딱 한 모금만 마셨다! 오?
"엄마, 괜찮으니까 더 마셔."
"아냐 괜찮아. 이제 딱 좋아."
진짜로 한 모금밖에 안 마시니까 왠지 고여사에게 미안했다. 내가 너무 눈치 줬나?
우리는 커피와 샌드위치를 든든히 먹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재스퍼로 떠날 시간. 어제와 달리 햇볕은 쨍쨍했지만 눈이 곳곳에 쌓여 있었다. 눈이 많이 오는 캐나다 답게 큰 도로는 제설작업이 끝나 깨끗했지만 갓길에는 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운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 나 조심해서 천천히 갈 테니까 맘 느긋하게 먹어. 오래 걸릴 거야."
"그래 천천히 놀면서 가면 되지 뭐. 가자."
로키산맥은 미국 뉴멕시코주에서 시작해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까지 무려 4800km에 걸쳐 있는 엄청나게 긴 산맥이다. 재스퍼는 로키산맥 내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재스퍼는 밴프보다 덜 유명하지만 풍경은 못지 않게 멋지고, 관광객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더 한적하게 여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캘거리에서 재스퍼까지는 430km였다. 그러니까 하루 종일 달려봐야 전체 길이의 1/10도 못 가는 거다. 땅덩이가 큰 나라라 그런가 산맥도 스케일 자체가 다르네. 우리는 기분 좋게 길을 나섰다. 도로 정면에 보이는 설산이 우리의 본격적인 캐나다 여행을 반기는 듯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폭설은 이상기후 때문이라고 쳐도, 지나가며 보이는 산에 단풍나무가 없었다. 전부 뾰족뾰족한 침엽수림,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나무 같은 것들이었다. 우리는 단풍놀이를 하러 왔는데? 조금 불길했다.
한참 가다가 화장실에 갈 겸 잠시 멈췄다. 편의점에 들러 스타벅스 카라멜 마끼아또 병 커피도 샀다. 스타벅스 병 커피는 고여사가 이번 여행하면서 가장 많이 산 음료다. 우리는 구글맵을 보며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살펴보고 있었다.
"근데 딸, 눈 쌓인 산 경치가 멋지긴 한데... 단풍이 있긴 한 걸까? 우리 단풍 구경할 수 있어?"
"그러니까 나도 좀 이상해. 기다려 봐."
그제야 나는 '캐나다 단풍 보는 지역'을 핸드폰으로 검색했다. 블로그와 여행 카페 글을 보고 머리가 띵-해졌다. 캐나다에서 단풍을 보려면 퀘벡이나 토론토로 가야만 했다. 그러니까, 여기보다 훨~~씬 동쪽으로 갔어야 했다. 로키산맥은 말 그대로 설산을 비롯한 대자연의 경치를 볼 수 있는 지역이었던 것이다. 단.풍.이. 아.니.라.
나는 살짝 떨면서 말했다.
"엄마... 로키산맥에선 멋진 단풍을 볼 수 없대. 이 지역은 거의 다 침엽수림이래. 잘못 왔다 우리.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여기로 와버렸네. 캐나다는 산이면 전부 단풍나무가 있는 줄 알았어. 캐나다 국기에도 단풍 나뭇잎이 그려져 있잖아. 온 나라가 다 단풍으로 뒤덮인 줄...알았지..."
고여사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어떡하지? 고여사의 소원이 캐나다에서 새빨갛게 물든 단풍을 보고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는 건데.
"엄마...실망했어? 미안해."
"아냐, 괜찮아. 설산 풍경도 멋진데 뭐."
비행기 예매하기 전에 '캐나다 관광청 추천 가을 단풍여행 명소 5선' 이런 거라도 찾아봤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고여사한테도 너무 미안하고, 나 자신이 바보 같아서 속상했다.
"괜찮아, 우리 다음에 또 가면 되지. 기회는 많아. 걱정하지 마. 우리 내후년에 또 캐나다 여행하자."
"응 엄마. 우리 꼭 다시 오자. 그땐 동부로 가서 빨간 단풍 꼭 보자."
우리가 과연 내후년에 갈 수 있을까? 하지만 여행을 막상 가보면 나중에 또 올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 믿어야지. 우리 둘이 또 함께 캐나다에 올 수 있기를.
다시 차를 타고 출발했다. 도로 상태가 좋아서 운전하기 나쁘지 않았고, 가는 길이 내내 경치가 멋져서 장거리 운전도 할 만했다. 하지만 약 100km를 남긴 지점에서 너무 피곤해서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이 상태로 운전하는 것보다는 고여사가 남은 거리를 운전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도로도 평탄하고 굴곡이 없어서 난이도가 쉬웠으므로.
"SUV도 운전해보니까 똑같네. 엄마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 같아. 엄마가 나머지 거리 운전 좀 하면 어때? 나 이제 너무 힘들어서 못할 것 같아."
"그래 알겠어. 한 번 해볼게."
고여사는 운전대를 잡고 조심스럽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아무리 운전에 자신 없다고 했어도 운전 경력 15년인데 이 정도는 하겠지.
"운전할 수 있겠는데? 내 차랑 똑같네."
"응 똑같다니까. 엄마 그럼 부탁해. 100km만 가면 되니까 무리 없을 거야."
고여사는 핸들을 두 손으로 꼭 잡고 조심스레 운전을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도로가 구불구불해졌다. 그늘에 가려서 그런지 눈도 군데군데 녹지 않았다. 왜 하필 고여사가 운전하자마자 길이 이래?
"엄마 살살 운전해. 천천히 가도 괜찮으니까."
그러다 갑자기 가파른 내리막길이 나왔다. 내려가면서 조금 천천히 갔으면 했는데 고여사는 속력을 줄이지 않았다. 점점 가속도가 붙었다.
"엄마, 속력 조금만 줄여. 너무 빨라지는데?"
그러나 고여사는 속력을 줄이지 않았다.
"엄마, 속력 줄여! 앞에 커브길 있잖아. 미끄러울 수도 있으니까 지금부터 속력 줄여."
그러나 고여사는 묵묵부답에 여전히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 커브길이 코앞에 다가와 있고, 차 속력을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지금 브레이크를 안 밟으면 저 앞으로 추락할 수도 있었다.
"아 엄마!! 위험해 빨리!! 브레이크! 브레이크!"
그때 고여사가 태평한 목소리로, 느긋하게 물었다.
"응, 근데 브레이크 어딨니?"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브레이크가 어딨냐고?
"어..어.. 가운데! 가운데!!!”
고여사는 급브레이크를 밟더니 핸들을 왼쪽으로 확 꺾었다.
"으악!"
다행히 마주오는 차도 없고 우리 차는 도로에서 벗어나지도 않았다. 고비를 넘고 난 다음부턴 다시 평탄한 직선 주로였다. 하지만 나는 크게 경악해서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브레이크가 어딨냐고..?"
고여사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했다.
"이거 진짜 내 차랑 똑같네. SUV라 해서 다른 줄 알았더니 똑같네. 브레이크도 똑같은 데 있어."
"엄..마... 당연히 브레이크는 같은 자리에 있지. 가운데에."
"응 아까는 순간적으로 브레이크가 어딨는지 안 떠오르지 뭐야."
"엄마 아까 출발할 때부터 한 번도 브레이크 안 밟아본 거야?"
"응 앞에 차도 없고 계속 직선 도로였잖아."
라스베이거스에서 목숨이 위험할 뻔한 일이 있고-고여사는 그렇게 생각 안 하지만-두 번째로 후덜덜한 경험이었다. 나는 화가 났다. 자칫 잘못했으면 둘 다 객지에서 죽을 뻔한 것이다.
'브레이크가 어딨냐고?'
난 속이 부글부글한데 고여사는 태평했다. 그게 더 화가 났다. 당시 고여사가 태평한 척하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는 중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난 화가 나서 이후 80km 정도 갈 동안 거의 한 마디도 안 했다. 고여사는 처음엔 말을 걸었지만 내가 시큰둥하게 대꾸하니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이윽고 재스퍼에 도착했다. 도착 시각은 오후 5시쯤. 둘 다 녹초가 되어 있었다. 빨리 들어가서 샤워하고 쉬고 싶었다. 우리가 예약한 곳은 재스퍼 다운타운 호스텔의 개인룸.
그런데 호스텔 로비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흑인과 백인 여자 경찰관이 카운터에 기대고 직원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둘 다 키가 175cm는 넘어 보이고 체격도 다부졌다. 이들은 단호한 표정으로 직원과 대화하며, 중간중간 허리춤의 권총을 만졌다. 같은 여자가 봐도 반할 정도로 멋졌다.
고여사와 둘이 소파에 앉아 경찰들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카운터에 응대하는 사람이 한 명밖에 없어서, 체크인을 하려면 경찰에게 양해를 구해야 했다. 그런데 경찰 언니들한테 그러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체격은 그렇다 쳐도 미국과 캐나다는 공권력이 강하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저기요 우리 체크인해야 하니 잠시 비켜주세요'라고 했다가 무서운 소리를 듣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40분을 기다렸다. 둘은 아직도 안 갔다. 정말 피곤했다. 우리가 400km 넘게 운전해서 왔는데 여기서 이렇게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한다고? 게다가 우리는 중간에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단 말이다!
마침내 두 경찰관은 뒤돌아서 자기들끼리 뭐라고 하면서 나갔다. 후아 이제 들어갈 수 있겠구나. 체크인을 하러 카운터에 갔다. 그런데 문득 뭐 때문에 저렇게 오래 이야기한 것일까 싶었다. 뭔가 위험한 일이 있나?
"경찰관들이랑 오래 얘기하던데, 혹시 무슨 일 있나요?"
"어제 여기 묵은 사람 중에 마약상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방에 마약을 숨겼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우리가 마스터키를 경찰한테 줄 수 없어서 그 얘기하느라고 이렇게 오래 걸린 거예요."
"마약상이요? 여기에 마약을 숨겼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어쩌면요."
호스텔 직원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그 사람이 마약을 찾으러 밤에 이 호스텔에 오면 어쩌지? 혹시 총을 들고 와서 무차별 총기난사를 하거나 인질극을 벌인다면? 고여사랑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그런 일이 있으면 큰일이다.
"무서운데요. 혹시 그 사람이 여기 다시 오면 어떡하나요?"
"아뇨, 안 와요."
"확실해요? 난 엄마랑 둘이 온 건데 너무 무서워요."
"아 아니라니깐. 걔 이미 감옥에 있다고."
"아 네, 굿굿."
호스텔 직원이 귀찮다는 듯이 정색하고 말해서 키를 들고 바로 방으로 들어왔다.
"엄마, 오늘 무서운 일이 많네. 우리 얼른 저녁 먹고 쉬자."
나는 이때쯤 엄마의 밑반찬과 햇반과 김에 완전히 중독되어 있었다. 공항에서 그렇게 고여사를 구박했건만, 이번 여행에선 외국 음식을 한 끼 먹으면 한 끼는 무조건 밥이 땡겼다. 예전에는 삼시세끼 외국 음식만 먹었는데 나도 늙었나. 김치랑 반찬이 없으면 여행을 못할 지경이 됐네.
"그것 봐. 엄마가 음식 싸오면 유용하다고 했지?"
"응 그렇네. 근데 엄마가 음식 솜씨가 좋아서 그런 거야. 엄마 음식이 최고 맛있어!"
"어이구."
고여사는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살짝 웃고 밥이랑 반찬을 꺼내줬다. 내가 차에서 그렇게 뭐라고 했는데 고여사는 뒤끝 하나 없었다. 그래서 더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재스퍼에 도착해 숙소에 들어온 것에 감사하고 행복했다. 내일부턴 로키산맥의 대자연을 즐기는 일만 남았다. 단풍은 없을지라도, 다른 멋진 풍경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재스퍼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