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로 만나는 일본6: 홋카이도 후라노(富良野)
후라노 와이너리 옆에 조성되어 있는 라벤더 농장.
중국에서는 라벤더(lavandula)를 ‘쉰이차오(薰衣草)’라고 부른다. 주로 신장(新疆)위구르족자치구 서북부인 이리(伊犁)카자흐자치주에서 대규모로 자란다.
필자도 여름에 현지를 취재하면서 처음 보았다. 일본에서는 주로 홋카이도에서 자란다. 라벤더가 유명해지게 된 것은 후라노(富良野)시의 한 라벤더 농장에서 비롯됐다.
1937년 화장품의 향료로 라벤더가 주목받으면서 프랑스에서 씨가 수입하여 일본 각지에서 재배를 시도했다. 1940년에는 삿포로에서 재배했고, 1953년에는 후라노에서 재배했다.
라벤더 농장은 후라노를 전국적으로 유명하기 만든 일등공신이다.
1903년 후라노에 정착해서 땅을 개간했던 도미타 도쿠미(富田德馬)는 1958년부터 라벤더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규모가 계속 늘어나서 1970년 후라노에서는 250가구나 라벤더 재배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1972년에 인공 향료 기술의 발전과 저렴한 외국 향료가 수입되면서 후라노의 라벤더 농가는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특히 향료회사의 구매가 중단되어 존폐 위기까지 몰렸다.
그런데 1976년에 JR의 캘린더 제작을 위해서 사진작가가 도쿠미의 팜도미타(ファーム富田)에 와서 사진을 찍어 전국적으로 소개했다.
15채의 통나무집 상점인 닝구르 테라스.
그 뒤 홋카이도에서 후라노의 라벤더 농장은 반드시 방문해야 할 성지로 떠올랐다. 1980년에는 라벤더 오일의 추출에 성공하여 향수를 생산하면서 후라노의 라벤더는 전성기를 누리었다.
필자가 후라노를 찾은 4월은 라벤더가 꽃 피는 시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곳곳에 널려있는 라벤더 농장을 보면서 그 위상과 아름다움을 체감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후라노는 라벤더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행객을 위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만들었고, 새로운 지역 산업을 계속 발굴해서 개발했다.
숲속에 조성된 후라노 치즈공방.
볼거리는 닝구르 테라스(ニングルテラス)가 대표적이다. 신후라노 프린스호텔에서 운영하는 15채의 통나무집 상점이다.
각 통나무집마다 홋카이도와 후라노의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다양한 수공예품을 판매한다. 닝구르는 1977년 후라노로 이주하여 살아온 소설가 쿠라모토 소우(倉本聰)의 작품 《닝구르》에 등장하는 요정을 가리킨다.
오래 전부터 홋카이도의 숲에 살고 있는 작은 요정으로, ‘숲의 지혜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닝구르 테라스는 눈이 내리는 겨울에 가면 환상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치즈공방 2층에는 치즈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전시물로 소개했다.
닝구르 테라스에서 걸어서 25분 거리에는 후라노 치즈공방(チーズ工房)이 자리 잡고 있다. 치즈공방은 1983년부터 후라노 각 곳의 젖소 농가에서 갓 짜낸 우유를 운반해서 치즈를 제조해 왔다.
순서는 우유 살균, 우유 가열 및 유산균 첨가, 우유 단백질의 절단과 수축, 유청 배출, 우유 단백질의 반전 수축, 우유 단백질의 파쇄와 와인 절임, 소금 첨가, 치즈 포장, 치즈 압착, 치즈 숙성 등의 과정을 거친다.
제품은 영국의 체다(Cheddar) 치즈 방식을 채용했다. 그렇기에 치즈가 단단하고 맛은 강한 편이다.
치즈공방 1층에 있는 숙성고에서 숙성되는 후라노 치즈공방의 치즈.
특히 숙성고에서 4개월 동안 숙성되면서 체다의 풍미와 와인의 향기가 깊이 스며들어 맛있어진다. 이런 치즈는 공방의 1층에서 제조되는데, 일부 과정을 창밖에서 참관할 수 있다.
2층에는 시식, 판매, 전시, 체험 등 코너로 나뉘어져 있다. 시식 코너에서는 후라노 치즈공방이 제조하는 모든 치즈를 맛볼 수 있다.
전시 코너는 치즈의 발전 역사와 제조되는 과정을 다양한 전시물을 통해서 소개한다. 체험 코너에서는 여행객이 사전에 신청하면 치즈를 직접 제작해 볼 수 있다. 물론 본인이 만든 치즈는 가져간다.
후라노 와이너리로 가는 길에서 볼 수 있었던 포도밭.
후라노 치즈공방에서 생산되는 치즈의 가장 큰 특징은 우유 단백질의 파쇄와 와인 절임 과정에서 후라노산 와인을 넣는다. 이는 정통적인 체다 치즈와 구분되는 차별점이다.
사실 필자가 후라노에 도착해서 처음 방문한 곳은 후라노 와이너리(富良野ワイン工場)이었다. 아사히카와에서 보통열차를 타고 출발하여 가쿠덴(學田)에서 내려서 걸어갔다. 다른 교통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30분 동안 산까지 타면서 힘들었지만, 그 덕분에 와이너리에 제공되는 포도를 재배하는 포도밭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후라노 와이너리의 건물 정면과 입구.
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라벤더 농장도 볼 수 있었다. 주목할 점은 와이너리가 후라노시가 운영하는 지자체 공기업이다. 일본에서 지자체가 주류업체를 경영하는 일은 거의 없다.
본래 와이너리는 1972년 후라노시정부가 새 경작물을 개발하기 위해서 양조용 포도의 재배를 목표로 한 포도과수연구소(ぶどう果樹研究所)를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당시만 해도 후라노에는 야생 산포도를 제외하고 포도나무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라노시는 와인의 본고장인 프랑스와 비슷한 후라노의 기후 풍토에 주목했다.
후라노 와이너리 지하에 있는 포도 원액 저장고.
게다가 계속된 개간으로 1만 헥타르의 농지를 확보했다. 라벤더가 계속 재배되었으나, 상황은 악화하고 있었다. 따라서 후라노시는 경사지나 돌 섞인 토지에 적합한 작물로 포도를 선택했다.
이에 따라 자본금으로 500만 엔을 출자하여 연구소를 열었고, 일본에서 포도 재배와 와인 제조의 전문가로 유명한 이와노 사다오(岩野貞雄)를 초빙하여 자문받았다.
연구소는 다각적인 조사와 연구를 통해서 후라노에서는 레드 와인용으로 세이벨 13053이, 화이트 와인용으로 세이벨 5279가 적합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후라노 와이너리 지하에 있는 와인통 숙성고.
세이벨종은 수확량이 많고 병충해에 강한 강점이 있었다. 또한 연구소는 봄부터 가을까지 기온 차가 큰 후라노의 기후를 고려하여 단맛이 강한 포도 품종을 선택했다.
이를 위해서 울타리를 기어오르는 포도나무를 재배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면 태양광선을 흡수하는 포도나무 잎의 면적이 시렁 방식보다 약 30%나 증가하는 이점이 있다.
방향이 정해지면서 후라노시는 농가에 여러 혜택을 제공하면서 포도나무의 재배를 적극 권장했다. 이런 노력 끝에 12가구가 호응하여 세이벨종 포도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와이너리 지하에는 와인을 연도별로 나눠 최대 100년까지 저장한다.
그에 발맞추어 연구소는 와인 제조에 박차를 가했다. 1974년 첫 와인을 생산했고, 이듬해 국민체육대회(國體) 동계 스키대회에 참가한 임원과 선수에게 제공되어 호평받았다.
사업성을 확신한 후라노시는 연구소를 확대하여 와이너리와 사무소를 건설했다. 이것이 1976년에 완공된 후라노 와이너리다.
이듬해에는 국제스키연맹이 공인한 월드컵을 후라노에 개최하면서 참가한 임원과 선수를 대상으로 와인 시음회를 진행했다. 이렇게 차근차근 단계를 밟은 뒤 1978년에 ‘후라노 와인’을 정식으로 출시했다.
후라노 와이너리 2층 판매장에서 파는 각종 와인 제품.
1980년에는 몬드 셀렉션이 주최한 제20회 월드 셀렉션의 와인 부문에서 후라노 와인이 금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전 세계에서 지자체의 공기업이 제조한 와인이 국제대회에서 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이후 후라노 와인의 지명도를 단박에 뛰어올랐다. 그리고 후라노의 산포도와 세이벨 13053을 교배해서 새 포도 품종을 개발했고, 이를 담가서 ‘후라노 2호’를 제조했다.
후라노 2호는 통에 1년, 병에 1년을 숙성시킨다. 이렇게 후라노시는 포도 재배와 와인 사업을 통한 지역 산업의 진흥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