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위스키 아버지 타케츠루의 '닛카위스키'

술로 만나는 일본7: 홋카이도 요이치(余市)

by 모종혁

후라노기차역 플랫폼에 장식되어 있는 상징물.


2023년에 필자는 30년 만에 일본을 찾아 6차례, 55일 동안 4대 섬과 오키나와를 다녔다. 일본을 입출국하는 날을 제외하고 날마다 여러 곳을 두루 구경을 다녔다.


그런데 홋카이도여행 4일차에는 오직 한 곳만 방문할 수 있었다. 중부의 도시인 후라노에서 남부의 요이치정(余市町)까지 내려와야 했고, 다시 삿포로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날은 정말 JR 삿포로-후라노 레일패스의 혜택을 톡톡히 받았다. 물론 홋카이도를 방문하기 전에 이동 동선과 기차 시간은 파악한 상태였다.


후라노와 다키카와 사이를 오고가는 보통열차.


오전 10시 7분에 후라노에서는 보통열차를 타고 출발하여 1시간 5분을 달려 다키카와(瀧川)에 도착했다. 다키카와역에서 20분을 대기한 뒤 삿포로에 가는 특급열차를 탔다.


52분을 달려 도착한 삿포로역에서 나와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 뒤, 다시 역으로 들어가 오타루(小樽)로 가는 에어포트를 탔다. 33분만에 도착한 오타루역에서 요이치로 향하는 보통열차를 바로 갈아탔다.


그렇게 해서 오후 2시 16분에 요이치역에서 내려서, 일본의 양대 위스키회사인 닛카(Nikka)의 요이치증류소(余市蒸餾所)에 도착했다.


닛카 요이치증류소의 입구 모습이다.


이렇듯 힘들게 요이치증류소를 찾은 이유는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인 타케츠루 마사타카(竹鶴政孝, 1894~1979)의 생애와 업적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타케츠루는 1894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대대로 술을 빚는 주조(造酒)업에 종사했다. 아버지는 신념이 강하고 자신에게 엄격했다. 이런 가풍과 생활태도는 타케츠루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에 따라 오사카고등공업학교(현 오사카대학 공학부)에서 양조(釀造)학을 전공했다. 그런데 졸업을 앞두고 서구에서 유입된 양주(洋酒)에 관심을 갖게 됐다.


요이치증류소는 스코틀랜드 양식으로 건물을 지었다.


따라서 당시 일본에서 양주로 유명했던 셋츠주조(攝津酒造)에 입사했다. 타케츠루는 입사 후 능력을 발휘해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에 위스키를 만들고자 했던 사장의 눈에 들어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가게 됐다. 당시만 해도 일본에서는 미국 버번 위스키의 모방품만 생산했을 뿐 정통 위스키의 제조는 엄두도 못 내었다.


1918년 영국에 도착한 타케츠루는 위스키의 본고장인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대학교에서 유기화학을 전공했다. 수업을 들으면서 스코틀랜드의 여러 증류소에서 견습생으로 일하여 현장을 익혔다.


위스키의 원료인 보리를 배합하는 장치.


그런 와중에 타케츠루는 제시 로베르타 코완(애칭 ‘리타’)을 알게 되어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두 연인의 사랑은 리타 가족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어쩔 수 없이 두 연인은 1920년 1월 등기소에서 공무원이 증인을 서주는 가운데 외롭게 결혼했다. 같은해 11월 리타와 미국을 거쳐서 일본으로 귀국했으나, 역시 친가 가족이 반대했다.


그래서 분가하여 살게 됐다. 당시 일본은 경제 상황이 좋지 못했기에, 셋츠주조는 위스키를 만들려는 계획을 포기했다. 이에 타케츠루는 퇴사한 뒤에 고등학교 화학교사로 일했다.


증류관에서는 위스키 원액을 증류하여 뽑아낸다.


1923년 양주 판매업자인 도리이 신지로(鳥井信治郎, 1879~1962)가 정통 위스키를 제조하려는 회사를 세운 뒤 생산 책임자를 스코틀랜드에서 초빙하려 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에서 “일본에 적임자가 있다”면서 타케츠루를 추천했다. 토리는 이미 타케츠루를 알고 있었기에, 찾아가서 파격적인 연봉을 제시하며 설득했다.


감복한 타케츠루는 10년 계약으로 입사했는데, 오늘날 ‘산토리(Suntory)’이다. 이듬해 타케츠루의 주도 아래 미시마군(三島郡)에 일본 위스키산업의 산증인 격인 야마자키(山崎)증류소를 완공했다.


갓 뽑아낸 위스키의 원액은 보관하는 저장고.


그러나 야마자키증류소에는 기술자가 소장인 타케츠루밖에 없었다. 또한 증류 시설도 열악했다. 결국 여러 어려움을 하나하나씩 극복한 끝에 1929년에 첫 위스키인 산토리 화이트를 출시했다.


당시까지 일본인에게 정통 스코틀랜드 위스키는 생소한 술이었다. 게다가 값도 비싸서 시장에서 판매가 어려웠다.


따라서 산토리는 맥주공장을 인수하면서 업종 다각화로 위기를 탈출하려고 하였다. 맥주공장의 책임도 타케츠루에게 맡기었다. 이러는 동안 도리이와 타케츠루는 의견이 대립하면서 사이가 조금씩 벌어졌다.


요이치증류소에는 위스키 오크통을 보관하는 저장고가 여러 개 있다.


도리이는 일본인에게 어필할 수 있는 대중적인 위스키를 원했으나, 타케츠루는 정통 스카치 위스키를 추구했다.


결국 1934년 노동계약 기간이 끝난 타케츠루가 퇴사했고, 홋카이도 요이치정으로 이주하여 자신의 증류소를 세웠다. 그 과정에서 사업가인 카가 마사타로(加賀正太郎)의 투자를 받아 지금의 닛카위스키인 대일본과즙(果汁)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타케츠루는 처음부터 섣불리 위스키를 제조하지 않았다. 요이치의 특산물인 사과를 이용해서 과일주스를 생산하였고, 더욱 발전시켜 애플브랜디를 제조했다.


타케츠루 마사타카가 부인 리타를 위해서 지었던 리타하우스.


위스키로 수익을 내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산토리에서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장 회사에 수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과일주스를 생산하고 판매하면서 운영자금을 모았다.


사업의 기반이 잡히자, 타케츠루는 부인을 위한 집을 짓고 리타를 요이치로 데려왔다. 그리고 1940년에 위스키를 출시했다. 닛(日)과 카(果)를 따로 떼서 닛카위스키로 사명을 바꾸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에서는 저가의 질 나쁜 위스키가 판을 쳤다. 타케츠루는 3류 위스키는 제조할 수 없다고 버티었다.


닛카와 요이치증류소의 창업자인 타케츠루의 경영이념을 쓴 기념벽.


하지만 당장 생존을 모색해야 한다는 회사 주주의 설득으로 저가 위스키를 개발하여 출시했다. 이러는 과정에서 타케츠루에게 큰 힘이 되어준 이는 리타였다.


오직 타케츠루만 믿고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고 일본에 왔기에, 리타는 줄곧 남편을 격려했다. 이들의 깊은 부부애는 2014년 일본 NHK가 150부작의 아침드라마 《맛상(マッサン)》으로 제작하여 방영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여기서 맛상은 리타가 타케츠루를 부르는 애칭이었다. 《맛상》은 주시청자인 주부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요이치증류소 내에 있는 닛카위스키 판매장.


그 덕분에 산토리에게 줄곧 밀렸던 닛카위스키의 판매량은 급증했다. 다만 타케츠루와 리타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젊은 시절에 연이어 유산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43년에 조카를 입양하여 가업을 잇게 했다.


이렇게 부부는 단란했으나 1961년 리타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타케츠루는 슬픔 속에서도 사업에 매진해서 1969년 센다이에 2번째로 미야기쿄(宮城峽)증류소를 완공했다.


같은해 일본정부로부터 위스키 제조자로는 최초로 훈장을 받았다. 1979년에 폐렴으로 죽은 뒤, 요이치에 리타와 함께 묻혔다.


삿포로 시내에 있는 닛카상 광고판.


필자는 1시간 30분 동안 요이치증류소를 견학하고 닛카위스키를 시음하며 곳곳에 스며있는 타케츠루의 업적을 체감했다. 견학 시 가이드는 일본어로 설명했다.


하지만 참가자 중 필자와 대만인 가족이 있었기에, 경비가 줄곧 구간에 맞는 영어 설명문을 들고 다니며 이해를 도와주었다. 이 날 필자는 처음 맛본 닛카위스키가 마음에 들어 싱글 몰트 요이치를 한 병 구입했다.


저녁에 삿포로에 돌아온 뒤 호텔에서 제공하는 얼음으로 온더락으로 마셨다. 다음날에는 호텔 식당에서 노징 글라스를 빌려서 니트로 즐겼다.


keyword
이전 06화끊임없는 홋카이도 도전의 산실 '후라노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