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로 만나는 일본9: 시코쿠 고치(高知)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객차를 꾸민 시코쿠 JR 특급열차.
필자는 시코쿠를 여행할 때 JR 레일패스를 이용했다. 그 덕분에 시코쿠 전역을 종단하고 횡단할 수 있었다.
종단은 카가와(香川)현 다카마츠(高松)에서 에히메현 우와지마(宇和島)까지, 횡단은 카가와현 마루가메(丸龜)에서 고치(高知)현 고치까지 했다.
JR 레일패스는 기한 내 JR의 모든 기차를 무제한 승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쇼도시마(小豆島)를 오고 가는 페리에 승선할 수 있다. 또한 고치시의 노면 전철도 승차할 수 있다. 노면 전철은 오늘날 일본의 여러 도시에서 중요한 운송수단으로 활약한다.
고치시에서 JR 레일패스를 이용해서 승차했던 노면 전철.
고치현은 시코쿠 4개 현 중 인구가 3번째로, 66만 명에 불과하다. 혼슈와 멀리 떨어져 있고 운행하는 기차는 단선이라 교통이 불편하다. 산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리적 특성까지 더해 고령화가 심각하다.
하지만 고치는 전국시대에는 시코쿠의 패자로 군림했고 에도시대에는 4대 번 중 하나였다. 이 때 고치의 옛 이름은 도사(土佐)였다.
이런 고치에서 에도막부를 무너뜨리는 인물이 등장했으니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6~1867)다. 료마는 고치시의 한 유복한 상인 집안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고치기차역 앞에 서 있는 사카모토 료마(가운데)의 동상.
그러나 무사가 되기 위해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그런데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이 군함을 이끌고 와서 함포 외교를 벌였다. 이를 목격한 료마는 큰 충격에 빠졌다.
점차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을 받들며 외세를 배격하는 존황양이(尊皇攘夷)파가 되었다. 이를 위해서 동서분주했으나 에도막부의 탄압을 받았다.
료마는 이에 굴하지 않고 노력하여 1866년 4대 번 중 사쓰마(薩摩)와 조슈(長州)의 동맹을 성사시켰다. 이 삿초(薩長)동맹으로 인해서 힘을 잃어버린 에도막부는 이듬해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준다.
오늘날 고치성의 정문 격인 오테몬(追手門). 뒤에 천수각이 보인다.
이런 업적으로 인해 막부 충성파의 표적이 되어, 천황이 권력을 쥔 대정봉환(大政奉還) 이후 한 달만에 암살당했다. 사실 20세기 전반까지 료마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가 소설 《료마가 간다(龍馬がゆく)》를 써서 조명하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그의 업적과 관련해서 여러 논란이 많다.
료마가 고치를 상징하는 인물이지만, 고치성의 가치에는 약간 처진다고 할 수 있다. 고치성은 4대 번 중 하나로 번성했던 고치의 영화와 에도 시대 일본 성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테쓰몬(鐵門)이 있던 자리에서 올려다 본 견고한 석벽과 천수각.
필자가 일본 성과 천수각을 집중해 보기 위해서 시코쿠에 간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곱지 않게 보았다. 일본이 후쿠시마(福島) 원전의 오염수를 방류하기 코앞에 둔 시기라서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일본에 돌담과 석축을 쌓는 기술을 처음 전파한 이는 한반도에서 온 도래인(渡來人)이었다. 특히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당한 뒤 건너간 백제와 고구려 기술자가 선진 축성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이는 오늘날 일본 학계도 인정하는 역사다. 다만 현재 남은 일본 성은 15~16세기 전국시대에 구조와 기술이 완전히 바뀌었다.
조총의 도입으로 일본 성은 큰 돌로 외벽을 쌓았고 높이가 높아졌다.
이전까지는 주로 산 위나 높은 언덕에 절벽, 하천, 호수 등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방어 시설을 쌓았다. 또한 돌담은 그리 높지 않았다.
비록 겹겹이 돌담을 쌓는 윤곽식(輪郭式)은 한국의 전통 성과 차이가 있었지만, 그 밖은 같은 축성 방식을 유지했다. 그런데 포르투갈로부터 조총이 도입되면서 큰 변화가 생겼다.
조총은 기존 무기와 달리 관통력이 아주 강했다. 그래서 총알이 뚫리지 않는 큰 돌로 성벽 외면을 쌓았고, 돌담은 갈수록 높아졌다. 이런 일본 성의 특징과 장점을 조선은 임진왜란을 통해서 체험했다.
천수각과 혼마루는 오직 하시로카(橋廊下)를 통해야 건너갈 수 있다.
왜군이 한반도 남부 곳곳에 왜성(倭城)을 쌓았기 때문이다. 왜성은 조선의 성보다 훨씬 높은 방어력을 보여주었다. 이에 선조까지 왜성의 장점을 칭찬했다.
따라서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성을 축조할 때는 일본 성을 참고했다. 고치성은 1601년부터 축조했다. 공사를 시작한 이는 야마우치 카즈토요(山內一豊, 1545~1605)이었다.
카즈토요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가신으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존재감이 없었는데, 1573년 치요(千代)와 결혼하여 내조를 받으면서 인생을 역전했다. 치요는 현명한 부인이었다.
천수각은 겉보기와 달리 내부는 6층 3중 구조로 되어 있다.
어느 날 노부나가가 열병식을 개최했다. 마침 좋은 말이 있었는데, 다른 무장들은 너무 비싸 감히 사지 못했다. 치요는 열병식이 남편을 돋보이게 할 기회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부모가 남겨준 금으로 말을 사서 남편을 태우게 했다. 그 덕분에 카즈토요는 노부나가의 눈에 들어 승승장구했다.
노부나가 사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됐고, 임진왜란에는 출병하지 않고 군선 제조와 성 보수 등을 담당했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라서 1600년 도사의 영주로 임명됐다.
천수각 1층에 부조한 야마우치 카즈토요와 부인 치요.
카즈토요는 죽을 때까지 치요와 금슬이 좋았지만, 아쉽게도 아들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동생의 큰아들인 야마우치 타다요시(山內忠義)롤 양자로 삼아 대를 이었다. 1611년 고치성을 완성한 이가 타다요시다.
치요는 1605년 카즈토요가 죽자, 비구니가 되어 내내 남편의 명복을 빌 정도로 내조의 여왕이었다. 물론 양자에게 부담을 안 주려는 배려도 있었다.
고치성은 1727년 화재로 대부분 건축물이 소실했지만, 24년간의 복원 공사를 거쳐 1753년에 재건됐다. 메이지유신 시기 폐성령에도 주요 건축물은 남게 됐다.
천수각 6층에서는 고치시 도심의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다.
그로 인해 오늘날 일본에서는 몇 되지 않은 에도시대의 천수각, 혼마루, 오테몬(追手門), 석벽 등이 그대로 남아있는 성이다. 또한 천수각 내에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어전(御殿)이 남아있다.
카즈토요는 9만 8000석의 영지를 받아 규모가 큰 다이묘는 아니었다. 하지만 방 안을 금박으로 꾸미는 등 호화롭게 꾸몄다. 이를 재건할 때 소박하게 바꾸었다.
이런 역사적인 가치로 인해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7성 중 하나이자 12천수에 속한다. 필자의 만족도는 7성 중 마츠야마성 다음으로 높았다.
히로메 시장에서는 다양한 해산물과 초밥을 맛볼 수 있다.
고치성의 좋은 점은 주변에 고치시 명소가 몰려있는 입지다. 특히 히로메(ひろめ) 시장은 오테몬에서 걸어서 5분 거리다. 히로메 시장은 고치의 명물로, 집합형 실내 포장마차가 몰려 있다.
현재는 54개의 점포가 있고 해산물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먹거리를 판다. 시장 중앙에는 먹고 마시는 쉼터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필자가 찾았을 때는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뒤였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요리를 먹으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필자도 먹거리와 고치의 지자케(地酒)인 스이게이주조(酔鯨酒造)의 술을 한 병 샀다.
히로메 시장 중앙에는 요리를 먹고 술을 마시는 쉼터가 있다.
지자케는 지역술이라는 뜻인데, 보통 현지 전통주를 가리킨다. 스이게이주조는 1872년 창업하여 벌써 150년의 역사를 가진 업체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견학을 운영하는데, 시내에서 멀어 방문을 포기했었다.
그래도 히로메 시장에서 술을 사서 맛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뒤늦게 알았지만, 고치는 일본에서도 음주문화가 상당히 발달한 고장이었다.
히로메 시장 앞에는 고치시에서 전통시장인 오비야마치(帶屋町)가 있다. 다양한 상품을 파는 상점이 즐비한데, 외부 장식을 특색 있게 꾸민 식당이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