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가와 속 숨은 보석 마을의 '킨료의 사토'

술로 만나는 일본10: 시코쿠 마루가메(丸亀), 고토히라(琴平)

by 모종혁

카메산 정상에 지어진 일본의 중요문화재 마루가메성.


.JR 레일패스를 이용해서 시코쿠 북부를 여행하다보니, 마루가메(丸亀)에서 3박을 했다. 첫날은 예약한 호텔에 짐을 우선 맡기고 마루가메성을 갔다.


마루가메성은 높이 66m인 카메산(龜山) 정상에 지어진 평산성으로, 오래 전부터 성채를 쌓아 이용했다. 지금의 성을 쌓기 시작한 것은 1597년 사누키(讃岐) 영주였던 이코마 치카마사(生駒親正)에 의해서다.


사누키는 카가와현의 옛 이름이다. 치카마사는 주 거주지였던 다카마츠(高松)성을 먼저 쌓고 서쪽의 경영을 위해서 마루가메성을 쌓았다.


마루가메성의 이시가키는 웅장하고 정교하여 일본에서 유명하다.


당시 치카마사의 나이는 이미 70대이었다. 따라서 아들인 이코마 카즈마사(生駒一正)가 마루가메에 머물며 성의 축조를 책임졌다.


카즈마사는 성 구조를 노부나가의 아즈치성(安土城)과 히데요시의 오사카성을 참고하여 만들었다. 실제로 마루가메성은 동서 길이가 540m, 남북 길이가 460m로 상당히 컸다.


또한 일본에서 한때 ‘돌의 성’이라고 불릴 만큼 웅장하고 정교한 이시가키(石垣)의 아름다움을 간직했다. 특히 산노마루(三の丸)의 석벽은 평균 높이가 20m에 달할 만큼 현존하는 일본 성 중 가장 높다.


마루가메성의 천수각은 규모가 작지만 가장 오래되었다.


이렇듯 공들여 축조한 마루가메성이었지만, 1615년 에도막부가 일국일성령(一國一城令)을 발표했다. 당시 영주였던 이코마 마사토시(生駒正俊)는 어쩔 수 없이 마루가메성을 폐성시켜야 했다.


그러나 나무로 성의 건축물을 가리고 성 안으로 사람의 출입을 금지시켜 성이 해체되는 것을 끝내 막았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640년 이코마 가문에서 내분이 일어나서, 다카마츠에 새 다이묘가 임명됐다. 1641년 마루가메에도 야마자키 이에하루(山崎家治)가 다이묘로 임명되어 마루가메번을 창설했다.


천수각은 석벽 바로 위에 기대어 지어졌다.


버려져 있던 마루가메성을 지금의 형태로 완성시킨 이도 이에하루이었다. 1660년에 축조한 천수각은 높이가 15m이고 3층 구조다.


비록 다른 성에 비해 크기는 작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불타지 않고 원형을 지킨 가장 오래된 목조 천수각이다. 정문 격인 오테몬은 1670년에 지어졌다. 하지만 그 밖의 다른 건축물은 1869년 판적봉환(版籍奉還) 이후 해체되거나 소실되었다.


그래도 역사적 가치가 높은 천수각과 오테몬을 간직했기에, 오늘날 일본 중요문화재인 7성 중 하나로 지정됐고 12천수에 속한다.


고토히라 타카토우로 등불은 마루가메 앞 바다에서 볼 수 있다.


마루가메시에는 마루가메성 제외하고 별다른 관광명소가 없다. 그러나 옛 마루가메번 영역으로 따져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특히 15㎞에 떨어져 있고 전철로 20분 거리인 나카타도군(仲多度郡) 고토히라정(琴平町)은 숨은 보석같은 마을이다. 고토히라는 전체 면적이 8.5㎢, 인구는 7900여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시사철 일본 각지에서 온 여행객이 끊이질 않는다.


곤피라(金毘羅)온천을 비롯해 고토히라궁, 구 곤피라 대극장(舊金毘羅大芝居), 킨료의 사토(金陵の鄉) 등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구 곤피라 대극장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됐다.


필자는 동선을 고려해서 고치를 가는 도중에 고토히라를 방문했다. 작지만 아름다운 JR 기차역을 나와 100여m 걸어가면 타카토우로(高燈籠)를 볼 수 있다.


타카토우로는 세토내해(瀬戶內海)를 항해하는 배의 지표가 될 수 있도록 지어진 목조 등불이다. 높이가 27m나 되어, 멀리 마루가메와 그 앞 바다에서 등불을 볼 수 있었다.


1865년 6년의 세월을 들여 완공했는데 내부는 3층 구조다. 고토히라에서는 반나절 밖에 머물 수 있었기에 먼저 구 곤피라 대극장을 찾았다. 곤피라 대극장은 가부키(歌舞伎) 극장이다.


곤피라 대극장 내부는 외형과 달리 넓은 규모를 자랑한다.


가부키는 노래, 춤, 연기가 종합된 일본의 전통 연극이다. 에도시대 중산층과 평민의 대표적인 유흥거리이었다. 오늘날까지 번성하여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곤피라 대극장은 1836년에 완공되어 한때 영화관으로 쓰였으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가부키 극장으로 지금도 사용된다. 따라서 무대와 좌석은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극장 뒤편에 배우를 위한 방이 있고, 지하에는 공연 중 배우와 스태프가 사용하는 공간도 옛 모습 그대로다. 이런 가치로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니시노킨료가 이전해서 매입해 문을 연 양조장 킨료의 사토.


일본인은 고토히라에서 전통과 신앙이 살아 숨쉬는 고토히라궁(金刀比羅宮)을 반드시 찾는다. 특히 고토히라궁은 벚꽃이 꽃피거나 단풍이 물드는 시기에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러나 필자의 목적은 달랐다. 시코쿠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 전통주(日本酒)업체의 발상지인 킨료의 사토(金陵の鄉)를 보고 싶었다.


니시노킨료(西野金陵)는 1779년 니시노 가문의 7대손이 도쿠시마(徳島)현에서 개업했다. 이를 8대손이 1789년에 쌀이 넉넉하고 물이 깨끗한 고토히라로 양조장을 옮겼다. 쌀과 물은 세이슈를 빚는 데 중요한 원료다.


킨료의 사토 박물관 입구에 있는 술이 떨어지는 거대한 세이슈병.


그 뒤 킨료의 술은 바다의 신을 모시고 있는 고토히라궁에 올리는 제사주(神酒)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1918년 니시노 가문의 15대손은 사업을 확장하여 현대식 주식회사로 개조했다.


이듬해에는 최신식 장비를 들여와서 대량 생산을 시작했다. 그로 인해 킨료의 세이슈는 1930년대에는 도쿄, 오사카 등 대도시에서 팔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화학품사업부를 신설하고 음료, 조미료, 맥주 등 종합 식품업체로 확장했으나, 주력 상품은 여전히 소추였다. 해외 진출도 세이슈 위주였다.


킨료의 사토는 전문 세이슈박물관으로 규모가 크고 전시물이 풍부하다.


킨료의 사토는 니시노킨료가 고토히라로 이전하면서 사용했던 양조장을 1988년에 박물관과 문화관, 판매장 등으로 개조한 것이다.


고토히라에는 본래 1616년에 문을 연 츠루바야(鶴羽屋)라는 양조장이 있었다. 니시노 가문의 8대손이 이를 매입하여 세이슈를 빚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세기 초 에도 시대의 저명한 유학자이자 문인인 라이 산요(賴山陽)가 고토히라를 방문했을 때 마치 중국의 고도인 금릉(金陵, 지금의 난징[南京])이 연상된다고 칭찬했다. 여기서 착안한 니시노 가문이 킨료라는 브랜드를 개발했다.


사람 크기의 밀랍인형으로 세이슈를 제조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런 브랜드의 유래 때문에 니시노킨료는 1997년 상하이(上海)에 사무소를 개설하는 등 다른 일본 전통주보다 중국 진출에 앞서 나섰다. 중국에서도 특이한 술 이름 덕분에 인지도를 키웠다.


킨료의 사토는 전체 면적이 2916㎡에 달할 정도로 넓다. 과거 양조장뿐만 아니라 3개의 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개조한 박물관은 필자가 방문했던 일본 전통주박물관 중 전시물이 가장 풍부했다.


실제로 사용했던 다양한 제조 도구, 이를 사람 크기의 밀랍인형을 이용해서 세이슈를 제조하는 과정 등이 상당히 실감났다.


문화관에는 니시노킨료가 수집한 술병, 주전자와 잔 등을 전시했다.


문화관에는 니시노킨료가 오랜 세월 동안 수집한 술병, 주전자와 잔 등도 전시하고 있다. 일본 전통주의 역사를 보여주는 시청각 자료와 문헌도 훌륭했다. 박물관은 입장료가 없이 무료다.


하지만 판매장에서의 시음이 가장 기대됐다. 500엔을 내면, 오직 킨료의 사토에서만 맛볼 수 있는 스페셜 세이슈를 150ml잔에 가뜩 따라준다.


그 술맛이 너무 좋아 일본 역대 주류대회에서 상을 탄 300ml 용량의 세이슈 2병을 구입했다. 짧은 일정 때문에 오래 머물지 못했던 고토히라이지만,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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