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요의 작은 교토 오즈와 '가류블루와인 맥주'

술로 만나는 일본12: 시코쿠 오즈(大洲)

by 모종혁

오즈시 신시가지에서 구시가지로 건너가는 다리에서 본 오즈성.


시코쿠(四國)를 여행하면서 일본 성과 천수각을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곳은 오즈성(大洲城)이었다. 오즈는 전체 면적이 432㎢에, 인구는 3만 9900여명인 작은 도시다.


통계를 살펴보면, 지난 10년 동안 주민이 7000여명이나 전출되어 4만 명이 무너졌다. 인구 상황만 보면 쇠락하는 도시로 보이지만, ‘이요의 작은 교토’로 불릴 정도로 오랜 전통과 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이요는 에히메현의 옛 이름이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유구한 역사를 가진 오즈성으로,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즈성은 지조가다케산의 정상을 다듬어 축조했다.


1331년 우츠노미야 토요후사(宇都宮豊房)가 처음 지조가다케산(地藏ヶ嶽山)에 성을 지었다. 그 뒤 우츠노미야 가문이 사용했으나 전국시대에 들어와서 축출되었다.


폐허가 되었던 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집권 시기인 1587년에 토다 카츠타카(戶田勝隆)가 16만 섬의 영지를 받으면서 본거지로 삼아 재건했다.


하지만 카츠타카는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가 1594년 조선에서 병으로 죽었다. 이듬해 히데요시는 토도 타카토라에게 오즈, 우와지마 등 이요 남부에 7만 섬의 영지를 하사했다.


오즈성 천수각은 4층으로 1층과 2층은 후키누케 구조다.


타카토라는 우와지마성에 주로 살았으나, 오즈가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그래서 많은 주민들을 동원해서 성을 넓히고 천수각을 지었다.


그러나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타카토라는 이요 북부로 전봉되었다. 전봉된 뒤 새로 쌓은 성이 이마바리성인 것이다.


1609년 에도막부에 의해서 새로운 다이묘가 오는데, 임진왜란에서 수군 주력으로 참전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1554~1626)이다. 야스하루는 이순신 장군에게 한산도대첩과 명량해전에서 연이어 대패를 당한 왜장이었다.


에도시대 목조 모형과 메이지유신 시기 사진이 남아 천수각을 복원했다.


그로 인해 우리의 영화와 드라마에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에게 패배했을 뿐이지, 임진왜란 초기에는 육군 장수로 활약했고 칠천량해전에서는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궤멸시켰다.


그래서인지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 냉철하고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이를 보여주듯,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동군으로 갈 의사를 밝혔다.


야스하루의 배신은 서군이 패배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오즈번의 첫 다이묘가 되었다.


14세기 지조가다케산 정상에 땅을 다듬고 성을 쌓는 모습의 미니어처.


4층의 천수각을 비롯해서 오늘날 규모로 오즈성을 완성한 이가 야스하루이었다. 그러나 1617년 야스하루는 다른 지방으로 전봉되었고, 카토 사다야스(加藤貞泰)가 6만 섬의 영지를 받으며 후임으로 입성했다.


이때부터 오즈성은 카토 가문의 영지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다이묘가 여러 차례 바뀌는 와중에도 건재했던 오즈성은 메이지유신으로 폐성령이 내려지면서 1888년에 천수각이 해체되었다.


그 와중에 4동의 망루는 다행히 보존되었다. 흥미롭게도 오즈성 천수각은 다른 성에 비해서 비교적 늦게 철거되었다.


오즈성 천수각의 축조 모습을 재연하는 미니어처.


그 덕분에 메이지유신 시기 찍은 사진이 많이 남아있다. 또한 천수각의 원형을 알 수 있는 목조 모형도 있었다. 그래서 1990년대 시민들을 중심으로 천수각을 복원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탄력을 받아 2002년에 복원공사가 시작됐고 2004년에 완공됐다. 주목할 점은 시멘트로 복원한 다른 성과 달리, 내부를 옛 모습에 가깝게 목조로 지었다.


뿐만 아니라 1층과 2층의 전통 양식대로 천장 없이 훤히 뚫어 놓는 후키누케(吹拔け)로 만들었다. 이처럼 시민들이 주도하여 목조 복원에 성공한 사례는 처음이었다.


천수각 4층에서 내려다 본 가류산장이 있는 방향.


필자가 오즈성을 둘러보며 가장 주목했던 전시물은 성과 천수각의 축조 과정을 보여주는 미니어처였다. 첫 번째 미니어처는 지조가다케산 정상에 땅을 다듬고 성을 쌓는 14세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석벽으로 내성과 외성을 쌓은 제곽식(梯郭式) 평산성인 오즈성이 얼마나 어렵게 축조했는지 알 수 있다.


두 번째 미니어처는 토도 타카토라가 시작해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완성한 천수각의 건조 모습을 재연했다. 당시 공사에 동원됐던 백성의 수가 굉장히 많았고, 그들의 고혈을 빨아 천수각이 지어졌던 것이다.


가류산장의 가류인에서 잇시의 방 밖 모습.


미니어처를 통해서 일본 성과 천수각의 어두운 단면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18세기 이후 일본에서는 천수각이 불타 소실되어도, 재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즈성을 둘러본 뒤 내려쬐는 햇볕을 받으며 가류산장(臥龍山莊)으로 걸어갔다. 그 과정에서 메이지의 집(明治の家竝)이라는 옛 거리와 민가를 가로질렀다.


오즈를 왜 이요의 작은 교토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었다. 메이지의 집을 거쳐 10여분만에 도착한 가류산장은 호라이산(蓬萊山)에 기대어 히자카와호(肱川湖) 옆에 지은 별장이다.


후로안은 가류인에서 약간 떨어져서 지었다.


가류(臥龍)라는 이름은 오스번 3대 번주이었던 가토 야스히토(加藤泰恒)가 “호라이산은 용이 누워있던 자세와 같다”고 해서 지어졌다.


여기에 메이지유신 시기 상업과 무역으로 성공했던 카와치 토라지로(河內寅次郎)가 여생을 고향에서 지내고자 1890년대 말에 10년의 공사를 거쳐 별장을 건축했다.


하지만 토라지로는 가류산장을 완성한 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가류산장 건물은 본당인 가류인(臥龍院), 그 옆에 붙은 치토메안(知止庵)과 함께 돌정원을 지나 간격을 두고 지어진 후로안(不老庵)이 있다.


쇼와 레트로박물관은 옛 시장의 모습을 축약해서 전시해 놓았다.


가류인에는 3개의 주요 방이 있는데, 그 중 응접실인 잇시의 방(壹是の間)에서 바라본 밖의 풍경이 멋졌다. 후로안은 현재 차관으로 쓰여서 돈을 내고 차를 마셔야 들어갈 수 있다.


가류산장을 나와 3번째 목적지인 가류블루와인(臥龍釀造)을 찾았다. 가류블루와인은 에히메현 남부에서 최초로 개업한 크래프트(Craft) 맥주 전문업체다.


시코쿠에 오기 전 방문해서 마시고자 했던 수제 맥주 중 하나였다. 마침 이벤트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필자는 맥주 1잔을 주문해서 가류블루와인의 맛이 어떤지 시음하려 했다.


쇼와 레트로박물관에서 전시해 놓은 자동차와 자전거.


그러나 종업원이 행사일이라 3잔 세트를 시켜야 좌석에 앉아 마실 수 있다고 했다. 어의가 없고 빈정도 상해 그냥 나왔다.


그런 뒤 4번째 목적지인 쇼와 레트로박물관(昭和レトロミュージアム)을 갔다. 쇼와 레트로박물관은 히로히토 천황 시기 일본인이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했던 다양한 용품을 모아놓은 개인박물관이다.


외국인은 전혀 모르지만, 오즈시에서는 꽤 명성이 높았다. 입구부터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 등 교통수단부터 가정집의 안방과 부엌에서 사용하던 여러 일상용품까지 골동품처럼 전시했다.


가류블루와인 맥주를 쉬면서 마실 수 있었던 오즈 레드 브릭홀 2층.


그 중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뒤 미국 문화의 유입을 상징하는 코카콜라 관련 물품이 적지 않았다. 또한 이발소와 경찰 순찰실을 복원해 놓아 이색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오즈 레드 브릭홀을 찾았다. 1901년 오즈상업은행으로 문을 열어 사용됐던 건축물로, 현재 1층은 오즈의 특산품을 팔고 2층은 휴게소로 쓰인다.


오즈 레드 브릭홀에서 가류블루와인의 맥주를 판매했기에, 필자는 구입해 2층에 올라가 앉아 마셨다. 맥주는 기대보다 맛있었다. 그 덕분에 가류블루와인에서 빈정 상했던 기분을 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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