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랍 성지인 우치코의 옛 번영을 담은 '교히나'

술로 만나는 일본13: 시코쿠 우치코(內子)

by 모종혁

상업과 생활 박물관 1층 가게의 ‘상품 판매(오후)’.


필자가 시코쿠에서 자주 봤던 단어는 목랍(木蠟)이었다. 목랍은 옻나무나 거먕옻나무의 열매를 짓찧어서 만든 끈끈한 납을 가리킨다.


열매를 가루로 만들고 삶아 짜내면 생랍(生蠟)이고, 이것을 표백하면 백랍(白蠟)으로 구분한다. 일본에서 생랍은 양초, 이발제 등을 만드는데 쓰인다. 백랍은 쓰임새가 더욱 광범위하다.


과거에는 비누, 광택제, 세공품 등으로 사용되었고 최근에는 화장품, 의약품, 문구 등에 쓰이고 있다. 이런 목랍의 주요 생산지였고 일본에서 가장 품질 좋은 제품을 생산했던 곳이 우치코(內子)다.


옛 방식 대로 목랍 양초를 만드는 오모리 와로소쿠(大森和蠟燭屋).


우치코에서 목랍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에도시대였던 18세기다. 당시는 우치코뿐만 아니라 에히메현 전역에서 목랍 생산의 열풍이 불었다.


그로 인해 19세기에는 에히메의 목랍이 일본 전체 생산의 45%를 차지했고, 해외로 수출까지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우치코가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혼하가(本芳我) 가문은 ‘이요식 목랍 상자 표백법(伊予式蠟花箱撒晒法)’을 독자적으로 개발하면서 백랍의 품질과 생산량을 크게 향상시켰다. 백랍의 중심지로 발돋움한 것이다.


목랍 양초의 제조는 전 과정을 사람 손에 의존해야 한다.


그리하여 1890년대 초부터 1910년 말까지 우치코에서 백랍 생산은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당시 우치코에는 23개의 목랍 제조업자가 있어, 마을 단위로는 일본에서 가장 많은 생산량을 자랑했다.


일본 전체 생산량의 30%를 차지할 정도였다. 1900년에는 일본을 대표하여 파리만국박람회까지 출품되었다.


하지만 번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전기가 빠르게 보급되었고, 석유에서 파라핀을 추출하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결정타를 맞았다. 파라핀이 양초, 비누, 광택제 등의 원료로 사용됐기에 가격이 폭락해버린 것이다.


메이지시대 건축물이 양편으로 늘어서 있는 요카이치・고코쿠 거리.


이로 인해 목랍의 수요도 급감하자, 1920년대에 들어 우치코의 목랍 제조업자는 줄지어 사업을 접었다. 1924년에는 마지막 제조업자가 폐업을 신고했다. 그러나 당시의 영화를 보여주는 흔적은 우치코 곳곳에 짙게 남아있다.


보통 우치코 거리로 불리는 요카이치・고코쿠 거리(八日市・護國の町竝み)와 혼하가 저택, 목랍자료관 가미하가테이(木蠟資料館 上芳我邸), 상업과 생활 박물관(商いと暮らし博物館), 우치코자(內子座) 등이 대표적이다.


요카이치・고코쿠 거리의 역사는 17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혼하가 저택은 요카이치・고코쿠 거리에서 가장 아름답다.


목랍을 생산하면서 거리가 형성되었고, 일본 최고의 목랍 생산지로 발돋움하면서 번영을 누리었다. 그 덕분에 600m의 거리에는 메이지시대 전후 지어진 건축물이 양편으로 늘어서 있다.


마침 서구의 문화가 들어오던 시기였기에 저택을 흰색이나 노란색으로 칠해놓았다. 그렇기에 다른 일본 전통거리보다 밝은 느낌을 준다.


주목할 점은 가게나 상점마저 화려한 간판이 없다. 나무판이나 천에 붓글씨로 상호를 써놓았을 뿐이다. 안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무엇을 파는지 알 수 없다. 당연히 호객하는 행위는 전혀 없다.


목랍자료관 가미하가테이의 1층 안채 모습.


그러나 거리에서 혼하가 저택과 목랍자료관 가미하가테이는 단연 눈에 띈다. 혼하가는 이요식 목랍 상자 표백법을 개발해 부자가 된 목랍 제조업자 가문이다.


우치코 목랍 제조업의 기반을 다진 가문답게 저택의 규모와 화려함이 대단하다. 다만 지금도 후손이 살고 있어, 안에 들어가 참관할 순 없다. 가미하가(上芳我)는 혼하가 가문의 일부가 분가한 일족이다.


이들이 거주했던 저택이자 작업장이 가미하가테이이고, 오늘날에는 목랍자료관으로 꾸며놓았다. 가미하가테이는 목랍의 최전성기이던 1894년에 지어졌다.


목랍자료관 가미하가테이 부엌은 많은 사람을 먹이기 위해 공간이 넓다.


따라서 우치코 목랍 거상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거주공간이었던 안채는 3층의 건물로 고급 소나무를 사용해서 만들었다.


1층은 여러 용도의 크고 작은 방을 줄지어 배치했고, 가운데는 일본식 정원과 작은 사당을 꾸며놓았다. 그 옆에 부엌이 있는데 규모가 상당히 크다. 2층에는 작업장으로 쓸 수 있는 큰 방이 있다.


안채를 나오면 별채와 목랍 제조장, 곳간, 수장고 등이 보인다. 여기서 옻나무나 거먕옻나무의 열매에서 원료를 채취하여 목랍으로 만드는 과정과 목랍으로 만든 다양한 제품을 볼 수 있다.


목랍을 만드는데 쓰이는 원료와 다양한 제조 도구.


전성기 우치코는 상업의 중심지로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상업과 생활 박물관은 1921년경 우치코의 상업과 생활 상황을 보여준다.


생활용품을 판매해서 살아갔던 상인 가족의 아침부터 밤까지 일상을 2층 저택의 각 공간과 방에 배치해 놓은 것이다. 1층 가게는 ‘상품 판매(오후)’로, 두 남자가 여러 상품을 파는 모습이다.


안으로는 가족의 ‘식사(아침)’이고, 옆에는 거실로 ‘접객(오후)’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취사 세탁(아침)’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재고 정리(밤)’이 있고, 옆에는 넓은 다다미방이 있다.


상업과 생활 박물관의 1층 안쪽은 가족의 ‘식사(아침)’이다.


이런 경제적인 여유는 우치코 주민들에게 문화와 여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 산물이 우치코자이다. 우치코자는 노래, 춤, 연기가 종합된 일본의 전통 연극인 가부키 극장이다.


1916년 다이쇼(大正) 천황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서 건립했다. 그 뒤 가부키뿐만 아니라 만담과 인형극을 공연했고 영화까지 상영했다. 주민의 사랑방이자 쉼터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이다.


하지만 TV가 보급되고 즐길거리가 많아지자,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로 인해 우치코자는 헐릴 위기에 처해졌다.


2층으로 지어진 목조 가부키 극장인 우치코자.


그러나 우치코 주민은 격렬히 반대했다. 1975년부터 우치코 역사환경보존운동을 벌여서 우치코자를 부활시켰다. 20만 엔을 성금으로 모아 우치코자를 복원했고 1985년에 문을 다시 열었다.


현재 공연이 없는 날에는 입장료를 내고 내부를 관람할 수 있다. 내부는 목조 2층 구조인데, 관객석을 1층 무대와 가까운 마스석과 기다유석, 2층의 가격이 저렴한 오무코석으로 구분한 것이 특징이다.


지하에는 배우가 공연을 준비하는 공간과 무대를 회전하는 장치가 있다. 주목할 점은 외국인을 위한 영어 가이드가 활동한다.


우치코자의 무대 중앙에는 지하에서 회전하는 장치가 있다.


영어에 능숙한 마을 주민 몇몇이 외국 여행객을 위해서 무료로 우치코자를 소개하는 것이다. 목랍자료관 가미하가테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의상이나 무대 체험을 하도록 도와주고 기념사진을 찍어준다.


필자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우치코에 대한 깊은 애정과 자부심을 느꼈다. 우치코자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는 일본 전통주업체인 사케로쿠주조 교히나(酒六酒造 京ひな)가 있다.


1920년에 기존의 양조장 8개가 합병해서 사케로쿠주조를 세웠고, 사장인 사카이 쇼이치로는 브랜드 이름을 교히나로 지었다.


사케로쿠주조 교히나에서 판매하는 세이슈.


필자가 사전 약속 없이 찾아갔으나 사장은 반갑게 맞아주었다. 게다가 사장은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그 덕분에 교히나의 특징 및 다른 세이슈와 차이점을 소개받았다.


내놓은 차를 마신 뒤 사장이 추천한 300ml의 세이슈 2병을 구입하고 나왔다. 저녁에 숙박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주문한 요리와 함께 마셨는데, 강하면서 깊은 맛이 인상 깊었다.


이처럼 우치코는 전통을 잘 지키고 방문한 외국인과도 교감하려고 노력하는 마을이었다. 그래서 언젠가 옛 정취와 문화를 잃지 않은 우치코를 다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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