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 소설 - 8
마음속으로 알파벳을 처음부터 세. 속도는 상관없어. 천천히 하든 빨리하든. 우리는 카운트 다운을 할 거고, 시간이 다 됐을 때 그 순간, 네 머릿속을 지나간 알파벳을 말하면 돼.
이것은 내가 독일어를 배울 때 종종 하곤 했던 게임의 첫 번째 법칙이었다. 이렇게 알파벳이 정해지면, 나는 그 알파벳으로 시작되는 단어들을 노트에 적었다. 사람의 이름, 형용사, 동물 이름 그리고 장소까지. 그리고 그것을 조합하여 문장을 만들었다. 그 문장은 보통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을 상황이나 묘사로 이루어졌다. 예컨대, 알파벳 B로 만든 문장의 경우는 이랬다.
‘밴(Ben)은 술에 취한(betrunken) 곰(Bär)와 함께 베를린(Berlin)에서 기차역(Bahnhof)을 짓는다(bauen).‘
언제부터 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도시 한복판의 숲에서 암사자가 돌아다닌다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숲 근처에는 공원이 있었고, 그 공원과 이어진 동물원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암사자가 동물원에서 탈출했다고 말하곤 했다. 인터넷에서는 그 동물이 찍혔다고 하는 사진과 동영상이 떠돌았다. 하지만 대부분은 아주 멀리서 찍었거나, 한밤중에 찍은 것이라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몇몇은 나중에 합성이라고 밝혀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좋아했고,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숲 근처, 공원 깊은 곳에 설치된 쓰레기통이 망가져 있거나, 무언가의 공격을 받아 죽은 고양이나 비둘기 사체가 나왔다고 알려진 날에는 몇몇 사람들은 그 실체를 확인하려 숲으로 향했고, 다른 사람들은 무섭다고 말하며 이와 정반대로 숲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이 모두 허튼 말 내지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지자체에서는 숲 근처에 있던 동물원에 사라진 사자가 있는지 물어봤지만, 사육사 중 그 누구도 동물원에서 그런 맹수가 없어진 적은 없다고 말했고(이건 인터뷰 영상도 있었다.) 어느 날엔 공무원들을 투입해서 동물원 근처와 공원 그리고 숲을 뒤졌지만 사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와는 다르게 애초에 사자가 진짜로 있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실체보단 실체를 둘러싼 가십과 그 가십들을 둘러싼, 어떻게 말하면 음모론적인 이야기들의 탄생과 거기에서 오는 재미가 사람들에겐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도 가끔 그 공원을 걷곤 했다. 숲과 공원의 경계선 쪽에는 사슴을 기르는 농장도 있어서, 원한다면 먹이를 사서 직접 사슴에게 먹이를 주는 체험도 할 수가 있었다. 나도 가끔은 먹이를 사서 그것을 내 손에 담고, 그것을 사슴에게 내밀었다. 그러면 그 동물은 나에게 천천히 다가와 혀를 내밀고 내 손바닥을 핥았다. 난 그런 느낌들이 숲에서 느낄 수 있는 진짜 느낌이라고 생각한다. 암사자가 진짜로 있다면, 몸집이 작고 빠른 고양이나 비둘기보단 울타리에 묶여 있는 이런 사슴부터 잡아먹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숲에서 사자가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었다.
그 게임은 재밌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어떨 때는 어렵다고도 느껴졌다. 특히 형용사나 동사가 잘 떠오르지 않아 미쳐 문장을 만들기도 전에 시간제한을 넘기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결국 완성되는 건 논리도 없고 재미도 없는 문장들이었다. 어느 날은 내 옆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알파벳 선택했고, 몇 초간의 카운트 다운이 끝난 뒤에 그 애가 제시한 알파벳은 L이었다.
사자와 관련된 괴담은 그렇게 한동안 유행처럼 번졌다가 다시 수그러들었다. 사람들은 사자를 잊어버렸고, 다시 공원으로 나가 산책을 하고, 저녁에는 삼삼오오 모여 놀기도 했다. 그해 여름은 무척이나 더웠다. 나도 가끔 독일어 수업이 끝난 뒤에 시간을 때우러 그 주변을 걷거나 그곳이 보이는 카페 창가에 앉아서 레모네이드를 마시곤 했다. 잠시 눈을 감고 사색에 빠지거나, 알파벳 순서를 읊는 일도 있었다. L에 관해서 내가 생각한다면 나는 어떤 단어들을 생각해 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들로 문장을, 그리고 글을 쓴다면 어떤 것을 쓸 수 있을까.
레온은 동물원에서 일했다. 그는 맹수를 담당하는 사육사였고, 그 역할로 일한 지도 벌써 십 년이 됐다. 하루는 동물원에서 한 암사자가 새끼 다섯 마리를 낳았다. 그는 그들의 이름을 지어줬고, 정성껏 돌봤다. 하지만 하루는 새끼 사자 중 한 마리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그는 당황했고, 동료들에게 말하지 않은 채 조용히 동물원을 돌아다니면서 없어진 사자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찾지 못했다. 그는 동물원 근처 공원과 숲을 돌아다닐 새끼 사자 한 마리를 상상했다. 아직은 새끼여서 사람들에게 해가 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새끼 사자가 아무런 문제 없이 크게 된다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끔 그도 저녁에 자기 집 근처 공원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동물을 본 적은 있었다. 길고양이라든지, 쓰레기통을 뒤지러 온 너구리나 심지어는 여우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사자는 달랐다. 이 일이 알려지면 그는 끝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작성한 문서와 일지에서 그 사라진 새끼 암사자에 대한 기록을 없앴다. 그리고 오 년이 흘렀다. 이제 사라진 사자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기억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언제부터 인가 그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사자를 목격했다는 사람들의 제보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그때부터 몸을 바르르 떨었다. 실체를 부정하고 싶은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다. 그는 사자가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인터넷 사진과 동영상을 보면 ‘싫어요’을 눌렀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했다. 사람들의 불안감이 커지자, 결국 시에서는 경찰들을 풀어 공원과 놀이공원을 샅샅이 뒤졌다. 전문가들은 그것이 암사자가 아니라 야생 멧돼지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며칠이 지나도 증거가 나오지 않자, 그 일은 결국 멧돼지의 일로 일단락되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지었고,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신 뒤 잠자리에 들었다. 커튼을 치려고 창가로 간 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그의 창밖에 그를 바라보는 암사자 한 마리가 또렷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눈을 떴다. 카페 바깥은 평화로웠고, 바로 밑의 거리에는 짧은 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걸어갈 뿐이었다. 나는 암사자를 풀어준 일도, 잃어버린 일도 없다. 다만 한 문장을 떠올릴 뿐이다.
유쾌한(lustig) 레온(Leon)은 사자(Löwe)를 동물원 창고(Lager)에서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거짓말(Lüge)을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