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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명 Aug 04. 2024

(1) 수박

선명의 계절 사물

올해 들어 이어폰을 세 번이나 잃어버린 나는 선뜻 원래 쓰던 것을 다시 사지 못하게 되어, 임시방편으로 산 듣보 이어폰을 끼고 오랜만에 달리기를 했다. 금요일에는 이제 한풀 꺾였나, 아니면 매번 이 정도로 더웠는데 엄살을 부렸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덥지 않았다. 러닝을 할 때에는 무조건 팟캐스트를 듣는다. 일정한 박자로 뛰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는 나른한 말들이 오래 뛸 수 있는 힘을 주는 것 같다. 그 날의 팟캐스트에서는 계절 식재료를 주제로 두 패널이 수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수박...최근에 유향이가 수박을 왜 좋아하냐고 물어보기도 했었다.

왜 수박을 좋아했더라? 어느 순간부터 누가 무엇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대충 수박이라고 대답한다. 자기소개서에조차 수박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썼었고 고등학생 때에는 야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한밤중에 부엌에서 혼자 수박을 반의 반 통씩 먹고 잠들었다. 수박주스는 즐기지 않는다. 수박캔디나 수박향 어쩌고들에도 썩 관심이 가진 않는다. 수박의 물성을 좋아해서 그렇다. 팟캐스트에서는 수박만큼 심적 만족도가 높은 과일이 없다며, 과일계의 블록버스터라고 표현했다. 과연 맞는 말이다. 크고, 무겁고, 시퍼렇고, 새빨간 과일. 큰 칼을 쑥 밀어 넣은 뒤 쩍 갈라지는 모습을 상상하면 어쩐지 호러스럽기도 하고.

지난 달에 본 일본 드라마 <어제 뭐 먹었어> 에서는 이웃과 수박을 나누려다 오해를 산 주인공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하...수박을 나눠 먹고 싶었을 뿐인 주인공이 오해를 사는 장면 이후의 시퀀스가 참 기가 막혔는데 어쨌든, 해프닝이 끝난 뒤 두 이웃은 수박을 계기로 친해진다. 이웃과 말을 틀 수 있는 가장 유용한 과일은 수박이 아닐까? ‘저희 집에서 다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아서요...’라는 말은 옆집 문을 두드리기에 있어 언제든 자연스러운 이유다. 늘 4인 이상 가구에서 살아온 나로서는 이런 경험이 없지만 혼자 사는 친구에게 작은 복수박을 사줬다가 너무 맛이 없어서 뻘쭘했던 기억이 났다. 물론 내가 혼자 살게 된다면 밥대신 수박을 먹을 수도 있겠지만, 요즘 더더욱 자취는 언젠가의 미래처럼 느껴지지도 않고 부수적으로 따라올 일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머리에 압이 찬다.

수박의 90퍼센트는 물이고, 단맛이 강한데 비해 당분은 그리 많지 않다. 신맛을 내는 유기산 함량이 압도적으로 적어서 순수하게 단맛만 나서 그렇단다. 긍정적인 성격인 게 아니라 부정적인 생각을 압도적으로 안하는 성격같은 건가? 괜찮네..팟캐스트에서 산지 이야기를 하는 걸 듣고 무등산 수박에 대해 찾아봤는데 한 통 무게가 20kg 이상에 가격은 2,30만원을 호가한다고 한다. 그런데 품종개량돼서 나오는 수박들보다 덜 달다고. 나는 좀 덜 달고 맛없는 수박도 좋아한다. 과일에 특히 너그러우려고 한다. 시장에 샤인머스캣이나 크림슨포도 말고 내가 어릴 때 미간 찌푸리면서 먹던 물렁한 캠벨 포도는 잘 없는 걸 보면 사람들이 실패하지 않으려는 악착같은 마음이 느껴져 그게 못나보여 그런갑다.

대부분의 내 자소서는 이런 식으로 시작했었다.

“저는 수박을 좋아합니다. 수박의 맛도, 향도, 단단하거나 무른 식감까지도 좋아합니다. 영화는 꼭 수박만큼 좋아합니다. ”

지금도 저 때도 저 이야기는 반 정도만 유효한 말이다. 문장 속 영화는 때로 책이 되기도 했다. 일을 찾으려는 사람이 함부로 좋아한다는 말을 쓰면 안되지 않나 최근에 와서야 깨달았다. 수박은 수박으로 냅두고 그대로 즐겨 주어야지. 수박의 모양을 본 뜬 이것저것을 갖게 된 것도 이번 여름의 일이다. 지금 나는 바다로 향하고 있고, 왠지 수박 모양 비치발리볼을 사고 싶어졌다. 그렇게 8월 한 달은 수박을 두 통 정도 더 먹고 여름을 마무리 짓겠지. 좋아하는 것이 곁에 없어도 너무 쓸쓸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뛰면서 들은 팟캐스트.
제은이가 사준 수박 키링!
펜타포트를 가려고 했던 금요일. 결국 휴가 내고 재택한 사람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만화책 많이 봄 도서전에서 산 수박 스티커가 아주 마음에 든다.
제로 수박바에는 씨가 없다. 기사를 찾아봤더니 몸무게가 70kg 미만인 사람은 한 끼 식사 후 '씨없는 수박바 0kcal'를 두 개 이상 먹으면 장에 이상이 생길 수 있다고 한다
작년 9월 친구들하고 먹은 미친 사이즈의 화채. 그러고보니 올해는 수박 화채를 아직 안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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