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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틂씨 Mar 05. 2022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짓고, 말을 거는 날들

[미술관 노동자의 관찰일기 06.]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일까




1.

마스크를 쓰는 날들이 끝났다. 

(네덜란드는 지난달 말을 기준으로 코로나 관련 거의 모든 제한을 해제했다. 이 글에서는 오미크론의  위험성이나 마스크의 필요성 등 실질적인 판단이 필요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무리 눈에 힘껏 힘을 주고 웃어 보여도, 입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인상에 치명적이다. 나는 대체로 크고 밝게 강아지처럼 꼬리를 치며 사교성 있게 사람에게 다가가는 성격이 못되기 때문이다. 방문객과 주로 조용히 눈을 맞추거나 싱긋 웃어 보이는 입으로 호들갑스러운 인사를 대신했었는데, 마스크로 입이 보이지 않는 통에 꽤 오랫동안 곤란했다. 매번 눈에 더 힘을 주고 '웃는 눈'을 만들려고 노력하거나 굳이 말을 뱉어야 한다. 상대 쪽에서도 내가 습관적으로 지은 미소를 마스크 위로 상상한 채 안경 속 작은 눈빛만으로 환대의 태도를 알아차리기는 어려웠겠지. 


어쩐지 마스크를 벗고 나서야 그동안 얼마나 사람대 사람의 대면 소통이 부족했었는지를 깨달았다. 내 미소에 답 미소를 지어주거나, 내 눈인사에 눈인사를 해주는 사람이 확실히 늘었다. 차분한 편인 나의 목소리는 마스크가 없을 때 좀 더 확연하게 상대에게 전달된다. 사람들과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사람에 대한 접근성이 훨씬 커졌다고 해야 할까. 때로는 지치기도 하지만, 그래서 활력이 돌기도 한다. 네덜란드에 세 개의 태풍이 연이어서 왔다가 떠나고 나서, 오랜만에 볕을 보아서 그런가. 햇빛이 나면 사람들의 역동적인 기운 자체가 달라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2.

어떤 방문객이 벽에 적힌 전시 관련 텍스트가 너무 길고 단락마다 띄어쓰기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텍스트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흠, 텍스트 문장 자체가 너무 길고 장황하게 늘어지는 것은 큐레이터의 영역이고, 문단 사이에 제대로 된 쉴 공간을 놓아두지 않은 것은 디자이너의 영역이다. 두 가지 모두의 면에서 공감한다. 그저 지나가는 사람 1이라고 별스럽지 않게 생각한 내가 그러게, 네 말이 맞네. 근데 뭐 큐레이터들이 글을 좀 장황하게 쓰는 경향이 있잖아, 하하, 하며 웃으며 넘기려고 했더니, 알아, 나도 큐레이터로 일하거든. 답한다. 아, 어, 그렇구나(...). 그럼 너는 일할 때, 전시 텍스트를 좀 짧게 쓰는 편이야? 하고 물으니, 그래도 문단 사이에 쉴 공간은 주려고 노력해. 한다.  


사실 그 사람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겪는 공감의 포인트다. 안 그래도 현대 미술이라면 사람들은 어려워하는데, 엄청 빽빽하게, 그것도 추상적인 언어로 잔뜩 적힌 문장들은 사람들이 읽으라고 적은 건지, 스쳐 지나가라고 적은 건지 구분되지 않는 때가 많다. 때로는 열심히 공들여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는 때도 많고. (그렇다, 그 글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당신은 꽤나 보통의 경우에 속한다) 작품은 작품 자체로 어떤 인상이든 줄 수 있어야 하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지만, 전문적인 배경이 없는 사람들에게 텍스트로라도 부차적인 설명을 도와주려는 목적이라면, 좀 이해하기 쉬운 말들로 적어주면 좋을 텐데. 이래 놓고 매번 미술관과 관객 사이의 거리를 운운하는 것은 옳은 판단일까. 




3.

누군가가 전시장 구석에 놓인 싱잉 볼을 계속해서 북처럼 두드린다. 그걸 굳이 두드려보는 사람은 대게 딱 두 부류인데, 하나는 그냥 호기심 어린 아이들, 또 하나는 싱잉 볼이 뭔지 아는 어른들. 그러니까 이렇게 두드려대는 사람은 싱잉 볼이 뭔지 아는 사람일 리가 없다. 다가가 보니 열 살쯤 되는 꼬마였다. 


너어, 그거 명상할 때 쓰는 도구라는 거 혹시 알아? 하고 말을 거니 쭈뼛쭈뼛 두들겨대기를 멈추고 내 눈치를 살핀다. 그거 만지면 안 돼, 하는 쪽보다는 이쪽이 더 효과가 좋은 편이다. 곁에 있던 보호자와 그녀의 친구가 그 말을 듣고 어 진짜? 하며 눈을 빛낸다. 그러니까, 너는 이거 어떻게 쓰는 건지 알아? 하고 묻는다. 다행이다, 먹혔다. 그건 싱잉 볼이라고 하는 건데, 주로 명상할 때 문지르거나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거래. 7가지 합금으로 만들어지는데, 저마다 소리가 달라서 자기 공명에 맞는 걸 찾는 게 좋다더라고. 하며 전시에 대한 질문에도 답을 한다. 


혹시 이 동네 살아? 그럼 워크숍 같은 거 할 때 놀러 와. 하니, 다른 나라에서 놀러 왔단다. 

잊고 있었다. 아, 이제 사람들이 다시 여행할 수 있지. 내가 이 도시에 살면서부터는 미술관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로컬이 아니라 때로는 먼 도시나 다른 나라에서 온 여행객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무엇보다 판데믹 시대라 더더욱 그랬고. 타지에서 왔다는 사람을 보면 어쩐지 더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된다. 그 사람이 그저 지나가다 가볍게 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하루가 이 미술관의 방문 경험으로 좌지우지될 수도 있다. 나에게도 여행 가서 낯선 도시에서 찾아 들어간 성당이나 미술관 같은 곳에서 친절하고 편견 없는 응대만으로 기분이 좋아지거나 작은 제스처 하나에 기분이 상한 적이 있으니까. 그들에게 좋은 경험을 선사하고 싶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 눈 마주침과 웃음, 마스크, 목소리의 톤, 벽에 적힌 텍스트,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의지.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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