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하고 떠나보낸 행복과 불행에 대하여.그리고 또 무수한 안녕을 기다리며
안녕. 나는 우리말의 '안녕'이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안녕은 만남의 반가움을 말하기도 하고 떠나보냄의 시원섭섭함을 말하기도 하니까요. 만나고 헤어질 때의 인사가 같은 언어는 아마 한국어뿐일 것입니다. 시작과 끝, 만남과 헤어짐의 인사가 같다는 것, 그것은 결국 그 두 가지는 이어져 있음을 의미하기도 할까요? 어쨌든 제 삶의 이야기들은 대체로 안녕으로 시작해 안녕으로 끝나거나 무수한 안녕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으로 생겼습니다. 제 안녕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제가 세상과 처음 만났을 때는 가을의 어느 깜깜한 밤이었습니다. 같은 시간 한국은 밝은 아침이었을 테지만요. 그렇습니다. 저는 한국 반대편인 독일의 작은 대학도시에서 첫 안녕이라는 인사를 꺼냈어요. 유년의 기억은 쏟아지는 햇살 속으로 반짝거리는 작은 자작나무 숲과 또 어스름 녘의 낮은 지붕들 사이로 느껴지는 아픈 공기, 크리스마스 시즌의 flohmarkt(독일의 벼룩시장) 때의 반짝반짝 거리는 조명들... 이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좋은 기억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흰 얼굴의 아이들 사이에서 동양인으로 사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내 몸보다 두 배는 큰 유치원생들에게 둘러싸여 눈이 찢어졌다며 놀림받던 것이 ‘인종차별’인 줄은 꽤 커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전 정말로 제 눈이 쭉 찢어진 모양인 줄로만 알았어요.
그래서인지 저는 친구들과 어울려 뛰어노는 것보다 혼자 집에서 그림 그리거나 동화책 읽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하는 질문에 화가! 아니면 작가!라고 답을 하는 게 당연한 일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그래도 독일에서의 어린 시절은 참 좋았습니다. 낯을 많이 가렸지만 만났던 모든 사람들을 마음 깊이 사랑했던 기억이 납니다. 햇살과 공기, 고요, 하늘의 색…. 무엇하나 좋지 않은 것이 없었어요, 얼마나 좋았으면 당장 어제 먹은 저녁식사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이 날까요.
행복했던 시간들과는 한국 나이로 일고여덟 살이 되던 해에 작별의 인사를 하게 됩니다. 유학생이던 아빠의 박사과정이 끝나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이지요.
처음 마주한 한국의 모습은 낯설었습니다. 한창 이효리의 ‘텐미닛’이 유행하고 있을 적이었는데 모든 것이 빠르고 세련되고 동시에 촌스럽고 북적북적했습니다. 한국에서 마땅히 지낼 곳이 없어 우리 가족은 할머니와 또 고모들과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꽤 힘든 시간이 시작되었어요. 어쩔 수 없는 고부갈등에 엄마는 고통과 또 아빠는 침묵과 친해졌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엄마를, 아빠를 그리고 할머니를 동시에 이해하려 애쓰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어요. 또 독일에서 떠나오기 전 막 태어난 늦둥이 동생과 또 같이 살게 된 사촌 동생들 사이에서 갑자기 제일 큰 언니가 되었습니다. 제 눈에 동생들은 귀엽고 시끄럽고 사랑스럽고, 무엇보다도 챙겨줘야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도 꽤 어린 나이였는데 말이에요.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한국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해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웃찾사’나 ‘개그 콘서트’를 봐도 문맥을 이해하지 못해 같이 웃지 못하기도 하고 또 받아쓰기도 엉망진창인 제가 좀 모자라 보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초등학교에 입학해 처음으로 본 받아쓰기 시험의 점수는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27점.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국어교육을 전공했지만 (또 독일어는 인사말밖에 떠오르지 않지만) 그때는 한국말보다 독일말이 더 익숙했나 봐요.
그래도 돌이켜보면 저와 코드가 맞는 친구들이 한두 명 정도는 있었습니다. 저는 시끌벅적한 친구들을 피해 나와 마음이 잘 맞는 친구네에 가서 조용히 햇살 속에 떠다니는 먼지를 보며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남들보다 이른 사춘기를 맞던 4학년 때는 힘든 일이 많았습니다. 담임 선생님에게 폭언과 폭행을 당한 일이 있었고 친구들의 따돌림이 극에 달했어요. 그나마 있던 친구들도 모두 없어지고 가족들은 각자 힘들고 바빠 의지할 곳은 나 자신밖에 없다는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이때 이후로 저는 지독한 외로움을 비염처럼 늘 달고 다니게 됩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지난 부적응의 시간들 때문인지 또래보다 조금은 더 성숙한 ‘척’을 했습니다. 때마침 알게 된 성공회 성당에서 만난 나이 차 많이 나는 중고등학교 언니 오빠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학교에서는 늘 애어른처럼 굴곤 했어요. 항상 고고하게 책을 끼고 앉아있고 싸우는 친구들을 선생님처럼 중재시키고 나보다 나이가 두 배는 많은 담임 선생님을 짝사랑하고 MP3엔 7080 노래를 담아 듣고 급식 먹기 전에는 두 손 모아 기도를 하는…. 다시 생각해보니 중2병 투병 기간이었군요, 남들과 다른 성숙한 나에 도취되어 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그 시절만큼 책을 많이 읽고 노래를 많이 들은 적은 없습니다. 그때 읽고 들은 것들이 밑천이 돼 아직도 힘이 됩니다.
어찌어찌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초등학교 4학년 때와 비슷한 이유들로 힘겨운 1학년을 보낸 뒤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저는 성격적으로 큰 변화를 겪습니다. 그동안 단단하게 잡고 있던 나 자신을 좀 내려놔보자, 하는 생각에 변화하게 된 것이지요. 성당에서의 만남들이 제 변화에 큰 도움을 주었어요. 또래처럼 신나게 웃고 실없는 짓도 하고 뛰어다니고…. 이전의 나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던 일들이었어요, 방어기제를 내려놓으니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비염처럼 따라다닌 외로움도 좀 옅어졌습니다. 또래 친구들도 많이 생기고 내성적이던 성격도 훨씬 외향적으로 바뀌게 되었어요, 하필이면 공부해야 할 시기에 그랬다는 게 문제지만요.
초중고등학생 때 일기를 참 열심히 썼습니다. 나의 흔적들을 글로 잡아두지 않으면 다 사라져 버릴 것 같았어요. 그 중 열일곱 살 일기장 한 편에 ‘세상의 어두운 구석을 밝혀주는 사람이고 싶다.’는 글을 쓴 적 있습니다. 내가 가진 재능 중 어떤 것으로 세상의 어두움을 밝힐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제 삶의 주된 고민이었습니다. 살다보니 그나마 글 쓰는 것이 내가 받은 몇 안 되는 재능 중 하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열일곱 때의 다짐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며, 세상을 구석구석 밝혀주는 글과 관련된 일을 하기로 다짐합니다. 그렇게 국어관련 전공을 위해 노력했어요.
그러나 나의 잠재력을 폭파시킬 줄 알았던 고3 시절 들쑥날쑥한 심리 변화로 기량을 전부 펼치지 못했고, 당연한 결과로 수시로 넣었던 6개 대학 중에 날 찾는 대학은 많지 않았어요. 아니 수능을 망쳐 최저등급을 못 맞췄으니 대학이 절 찾지 않은 게 아니고 제가 찾아갈 수조차 없었던 게 정확하겠네요. 그나마 최저등급을 맞출 필요가 없는 전형으로 넣었던 대학 두 개의 합격 소식을 기다리며 저는 꼭 카프카 소설 ‘변신’ 속 주인공 그레고르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쓸모’가 없어진 느낌. 다행히 원하던 수시 합격을 하고 온 집안을 뛰며 기뻐했지만 그 어둠의 시간은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있습니다. 덕분에 타인의 우울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계기이기도 했지요. 그렇게 ‘단짠단짠’했던 초중고 학창 시절과도 안녕! 작별합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는 꿈같은 시간들이 (잠깐) 펼쳐집니다. 이때는 ‘외로움 비염’이 거의 완치되다 못해 제발 좀 혼자 있고 싶을 지경이었어요. 스무 살의 패기로 저는 해리포터의 ‘헤르미온느’처럼 시간 안에 해내기 불가능해 보일 만큼의 많은 일들은 해냈어요, 학생회, 알바, 교지편집부, 아카펠라 동아리, 연극부, 근로, 오케스트라, 학술 스터디, 연애, 성당 활동 등등…. 간단히 추린 것이 이 정도이니 제 삶이 얼마나 바쁘고 정신없었을지 상상이 되시나요? 심지어 이 많은 일들을 꽤 잘 해냅니다. 표면적으로요. 학점도 나쁘지 않았고 부모님께 금전적인 도움 안 받고 대학 다니고 싶다는 열망도 이루어집니다. 장학금도 받고 상도 타고 외국 하이틴 영화 같은 교우관계도 맺고 더할 나위 없던 나날이었어요. 그런데 왜인지 나는 너무 지루하고(!) 불안했습니다. 무언가 크게 잃어버리거나 잘못된 느낌이었지요. 나에게 오는 관심과 사랑의 양에 깔려서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로 인해 주는 사랑들을 소중히 여기거나 되돌려주지도 못 했고요. 그것은 아직까지도 후회와 죄책감으로 남아있습니다.
제 불안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엄마 아빠의 교통사고를 시작으로 스물둘과 셋 무렵에 내게 수많은 불행이 찾아옵니다. 교통사고 후 정밀 검사를 하던 중 아빠에게 암이 발견되고 섣부른 수술 뒤에 그것이 번져 항암치료로 이어집니다. 그 일로 우울해져 하소연만 하던 나의 모습을 견디지 못한 것인지 3년 간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동기 두 명이 제게 철저히 등을 돌립니다. 중요한 학과 전공 수업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해 전례 없이 낮은 성적을 받게 되고 이어서 의지하던 고등학교 친구도 사소한 일로 저를 떠나버리고 맙니다. 그 해 겨울, 아빠가 3번째 수술을 받던 중 다리의 신경이 손상되고 수술을 맡은 의사들은 해외로 출국하거나 책임을 회피해 가족 모두 힘든 시간을 겪습니다. 그 일로 너무 충격을 받은 것인지 다음 해 이번엔 엄마에게서 암이 발견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저는 당시의 전 남자 친구가 2년 동안 제 계정을 해킹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사건에 연루된 친했던 친구를 또 잃게 됩니다. 완치된 줄 알았던 외로움은 이번에는 더 진득하게, 축농증처럼 재발합니다.
그 시기에는 글을 쓰지 않으면 숨이 잘 쉬어지지 않기도 했습니다. 종이 위에라도 내 진심을 털어놓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거든요. 어릴 때부터 꿈꾸던 글 쓰는 일은 이때 되어서 강한 확신으로 바뀝니다. 글을 써야겠구나. 안 그러면 안 되겠구나.
그저 견뎌오느라 잘 몰랐었는데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숨 쉴 틈도 안 주고 불행이 저를 마구 패고 있었네요. 저 일들을 겪는 2년 동안 저는 많이 불안정했습니다. 대부분의 지인들은 제가 늘 생글생글 웃고 있어 잘 몰랐을지 모르겠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팔을 움직이는 일 조차 버거웠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이 거짓말이거나 게임 속 증강현실 같았고, 만약 이게 그냥 게임이라면 누군가 빨리 전원 코드를 뽑아줬으면 좋겠다고 되뇌곤 했습니다. 결국 학교 상담 센터를 찾아가 도움을 받게 되었고 다행히 그곳에서 좋은 인연들과 기억들로 많이 괜찮아집니다. 또한 그 괴로운 시기 속에서 성당에서의 인연들과 나를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친구들, 그리고 날 사랑해주던 연인들 모두 나의 치유에 큰 몫을 합니다. 이제는 가끔 내게 왔던 불행들에 감사하기도 합니다. 제가 당장 가진 것들에 감사할 수 있게 되었거든요.
한 번도 휴학하지 않고 쉴 새 없이 달려오다 졸업 후엔 천안에 내려와 잠시 조교 일을 하며 쉬게 됐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안은 채로요. 그러던 중, 안녕, 뜻밖의 만남을 가집니다. 브런치라는 플랫폼이었어요.
나는 이렇게 여러분을 만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무도 듣지 않을 것 같은 고루하고 우울하고 좀 따뜻한 이야기들. 만성비염 같은 외로움은 여러분이 읽어 줄 것이라 믿고 글을 쓸 때면 좀 옅어집니다. 여러분도 내 이야기들 속 외로움과 고민들에 공감하고 함께 따뜻하게 자라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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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안녕들의 이야기를 잘 들으셨나요? 앞으로도 제 삶엔 무수한 안녕이 있겠지요. 마주하는 안녕, 떠나보내는 안녕 등... 모든 안녕들이 다 다른 듯 보여도 나라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라는 점은 같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무수한 안녕들을 글로 예쁘게 꿰어 나만의 색과 향으로 엮어내고 싶습니다.
제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도 듣고 싶네요. 당신의 삶에는 어떤 안녕들이 가득했는지.
그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