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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지 Feb 15. 2024

해피 밸런타인 데이

엄마 경력 1169 일째



언젠가 이서에게 물었다. "엄마랑 아빠가 서로 사랑하는 것 같아?" 이서는 그렇다고 했다.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니 그건 잘 모르겠다고 했다. 어쨌든 세 돌이 미처 되지 않았던 이서가 부모가 서로 사랑한다고 느낀다는 건 다행이었다.


우리 부부는 한 때(!) 열렬히 사랑했던 사이로서 나는 남편이 결혼한 뒤 점점 나를 더 사랑하게 될 것을 확인하고 결혼을 결정했다. 신학생으로서 남편이 가는 길은 가난할 것이 뻔했고 나는 부유한 삶에 대한 꿈은 내려놨다. 내가 대박을 터뜨리지 않는 이상, 남편이 이 길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린 평생 가난하게 살 것이었다. 그 외에도 많은 것을 내려놔야 했다. 유학을 꿈꾸는 남편, 나는 가족과 함께하고픈 나의 원을 내려놨다. 아이가 많은 단란한 가정을 꿈꾸는 남편, 나는 아이 없이 부부가 자유롭게 시간을 쓰는 마음 한편에 갈등하던 딩크족의 꿈도 내려놨다. 이 결혼에 들어설 때 나는 많은 걸 결심해야 했다. 그래도 그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커질 것은 알았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알 수 있었다. 사랑과 행복이 있는 가정을 갖고 싶던 나는 그 마음 하나로 그의 손을 잡았다.


결혼 생활 5년 간 나의 결혼 생활은 괴로움 그 자체였다. 연애와 달리 너무 심각한 반전이라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결혼 6개월 만에 나의 아빠가 돌아가셨고 행복한 신혼 생활은 그날로 끝났다. 나는 자주 울었고 남편은 우울한 아내를 대하기 버거워했다. 나는 점점 혼자 숨어 울었고 남편도 혼자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미국에 왔고 남편은 공부에 알바에 축구에 바쁜 동안 나는 집에서 붙박이 같은 기분으로 혼자 본 영화를 또 보고 읽은 책을 또 읽으며 외로움을 달랬다. 이서를 낳고 첫 일 년 간 수도 없이 싸웠다. 일 년 동안 아이 없이 나 혼자 시간을 보낸 것은 다섯 손가락도 다 채울 수 없었다. 이한이를 임신하고도 겁나게 싸웠고 정말로 헤어질 뻔하기도 했다. 부부의 연은 질겨서 아무리 싸워도 작은 생각이나 하나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곤 한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상대에게 또다시 질려버린다.


그중에서도 유독 서운한 날이 있었는데 바로 밸런타인 데이였다. 한국에서는 챙겨본 적도 없고 원하지도 않았는데 미국에서 경험하는 밸런타인 데이는 정말 말 그대로 온 누리에 사랑이 넘친다. 레스토랑마다 서로 다정하게 마주 보며 식사하는 사람이 가득하고 마트마다 꽃과 빨간 하트 풍선이 가득하다. 남편들은 한 달 전부터 아내를 위한 이벤트를 준비하기도 한다. 아이들도 학교에 밸런타인 트릿을 준비해 간다. 아주 나이 든 교수도 수업 시간에 자신은 이 날이 되면 아내에게 장미 한 송이와 카드를 준다며 아내에게 뭘 해줬느냐고 묻는단다. 그런 질문을 들으면서도 내 남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꽃을 받고 싶다고 뭐라도 받고 싶다고 직접 말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마다 서운해서 입을 삐죽 내밀어도 상하는 건 내 마음뿐이었다. 나는 점점 바라지 않도록 내 마음을 바꿨다.


그렇게 5년이 지나고 6년 차에 들어서면서 나도 남편도 조금씩 변했다. 남편은 자신의 마음을 말로 잘 표현하지 않아서 언젠가 장학금 지원서에 적은 내용을 나에게 보여줬다. 장인어른이 돌아가신 뒤 아내의 마음을 잘 품어주지 못했고 그때 우리 사이에 생긴 틈이 점점 벌어지는 걸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나도 이 먼 땅에 나와 첫 학기부터 수업 들으며 알바까지 하는 남편을 잘 돌봐주고 집안일이라도 잘해주며 힘이 돼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때는 집안일이라도 남겨서 같이 하지 않으면 부부가 같이 보낼 시간이 전혀 없을 것만 같았다. 우리는 우리 사이의 갈등 때문에 마음에 쌓인 감정이 이서에게, 이한이에게 가지 않도록 갈등을 빨리 해결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내 마음을 잘 들여다보며 내가 남편에게 갖는 불만이나 원하지만 잘 채워지지 않았던 사랑을 명확하게 표현하려 노력했다. 그렇게 서로 합을 맞춰가면서 나는 남편에게 '자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나를 더 사랑할 것 같아. 내 생각이 맞았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남편은 고장 난 리액션봇이라 웃고 말았지만 난 그게 무언의 긍정인 걸 안다.


그리고 어제 이서와 이한이를 데리고 장 보고 돌아오며 운전하던 중에 갑자기 머릿속이 댕 울렸다. 왜 내가 받고 싶으면서 먼저 남편에게 줄 생각을 못 했을까? 생각이 들자마자 머릿속이 바삐 돌아갔다. 이한이 낮잠 시간이 가까워져 이한이가 너무 피곤한 상태라 먼 곳을 갈 수는 없었다. 지금 가는 이 길에서 살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우리 집 근처에 유명한 빵집이 생각났다. 이서에게 내일은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꽃이나 초콜릿을 주고받는 날이라 아빠에게 초코빵을 사주면 어떨까 하니 이서는 좋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꽃을 많이 받고 싶다고 덧붙였다. 아빠 초코를 사고 자기 꽃도 사자고. 몇 주 전부터 금요 예배 마치고 지난주 꽃을 한 송이 씩 나눠 받았는데 집에 오며 꽃을 많이 받고 싶다고 여러 번 말했던 터였다. 그래서 알겠다고 일단은 아빠 것을 먼저 사자고 빵집에 들렀다. 이한이는 카시트에 앉아 막 잠드려던 순간이었다. 눈이 감기는 애를 둘러메고 이서를 내리고 빵집에 들어가 작은 초코 무스를 샀다. 이서에게 이건 깜짝 선물이니 내일까지 아빠에게 말하지 말자고 했다. 이서는 정말로 말하지 않았다. 그날 밤, 아이들이 잠들고 거실에 내려와 비닐에 냉장고에 숨겨뒀던 케이크 상자를 꺼내 리본을 붙이고 작은 카드를 붙였다. 내일 주려고 다시 냉장고에 넣었는데 남편은 방에서 온라인 수업을 듣느라 늦게까지 꼼짝도 하고 있었다. 기분이라도 좋아지라고 케이크와 포크를 들고 방문을 살짝 열었다. "해피 밸런타인"하며 주니 어색해서 해피 밸런타인이냐며 퉁퉁거렸다. 하지만 그날 밤에 자려고 누워 아이들 데리고 이걸 언제 샀냐며 좋아했다. 


그리고 오늘, 밸런타인 데이가 됐다. 남편은 아침에 전기세를 처리하러 차를 갖고 나갔고 나는 이서와 이한이를 데리고 도서관 스토리타임에 갈 시간인데 남편이 아직 오지 않았다. 둘 다 탈 수 있는 유모차는 차 트렁크에 있고 집에 있는 유모차에 이한이를 태우고 이서와 걸어서 도서관에 갔다. 남편이 연락 와서는 차로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남편이 도착하고 주차장으로 아빠를 만나러 갔는데 남편은 꽃다발 두 개를 양손에 들고 차에서 내렸다. 집에 꽃병도 작은 것 하나뿐이라 정말 작은 꽃다발이면 되는데 엄청 큰 꽃다발이었다. 이서는 좋아하는 핑크색 장미를 골랐다. 받은 순간부터 잠들 때까지 꽃다발을 안고 다녔다. 차에서도 안고는 계속 향기를 맡았고 자꾸만 꽃다발을 든 자신을 사진으로 찍어달라고 했다. 집에 와서도 계속 안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해서 꽃대를 정리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같이 손질해 꽃병에 꽂고 이서가 들 수 있게 따로 작은 꽃다발을 만들어줬다. '이렇게 예쁜 걸 주다니- 감동이야'라고 백 번은 말 한 이서. 말 그대로 해피 밸런타인 데이였다.


요새 나는 남편을 잘 사랑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노력하고 있다. 남편이 원하는 사랑은 자신이 할 일을 잘하도록 일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바쁜 와중에 아이들을 놀아주고 씻기고 가족과 함께 보낼 시간을 낸다. 이번 학기 나의 목표는 남편이 집안일에 참여하지 않도록 최대한 내가 해내는 것이다. 아이들과 놀아주며 틈틈이 집안일을 하려면 정말 하루종일 엉덩이 붙일 새가 없지만 그래도 한 번 잘 해내고 싶다. 내가 남편에게 필요하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정확히 세부적으로 표현하고 상황이 안 되거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할 수 없다면 잘 내려놓는 것도 훈련 중이다. 그렇게 몇 년간 연습한 것이 어제와 오늘 나를 바꿨다. 늘 받고 싶어 아등바등했는데 내가 먼저 주니 남편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사랑은 배우자를 오래 참고. 사랑은 배우자에게 온유하며. 배우자를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배우자에게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배우자에게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희생하고 줄 때 진짜 사랑을 하게 되고 나도 사랑스러워진다는 걸 깨닫는 요즘이다. 너무나 힘겹게 얻은 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다. 내일의 나도 무너지지 않고 잘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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