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신화를 찾아서
“고대의 신화는 몸과 마음을 조화시킬 목적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를 사로잡되, 우리 심층에 있는 것을 거머쥡니다.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입니다.”
<신화의 힘> 조셉 켐벨, 빌 모이어스 지음, 21세기 북스
“길모퉁이를 도니 왼쪽 도로변에서 천천히 날아가는 가면올빼미 한 마리가 보인다. ..나는 녀석을 보려고 차를 세운다. 한동안 하늘을 맴돌던 녀석이 긴 풀줄기 사이로 급강하한다. 나는 방금 목격한 광경에 매혹된 채 가만히 멈춰있다가, 잠시 후에야 내가 숨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해가 지평선에 가 닿는 동안 올빼미는 먹이를 물어뜯고, 나무와 산울타리에는 황금빛 후광이 내려앉는다. 평생 목격한 것 중에서도 손꼽게 아름다운 풍경이다. 새삼 내가 얼마나 우울증에 지치든, 얼마나 기만당하고 무기력해지고 황폐해지든 간에 이런 광경과 만나고, 그에 따른 치유 효과로 머리를 채울 수만 있다면 계속 싸워나갈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야생의 위로> 에마 미첼, ㈜도서출판 푸른 숲
마음과 몸의 조화를 추구하여 온전한 나로 회복시키는 신화가 작동하는 곳.
그곳이 바로 신화와 꿈의 세계다. 신화와 꿈은 수많은 상징과 은유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신화를 보면 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인류학자인 레비 스트로스는 신화적 사고체계를 가리켜 야생의 사고라고 했다. 문명사회 이전에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사고체계였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신화와 꿈은 힘이 별로 없다. 신화에게 길을 묻기보다는 과학과 논리에서 해답을 찾는다. 그러나 인간 정신은 그런 곳에서 잘 찾아지지 않는다. 문명화된 현대인도 여전히 야생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신화를 잃어버렸다.
의례는 잃어버린 세계를 내 것으로 가져오는 일종의 의식화 작업이다. 그중 산책은 나를 야생의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아주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의례였다. 그 길은 에마 미첼의 충실한 반려견인 애니처럼 언제나 곰돌이와 함께다. 곰돌이는 나의 소중한 반려견이자 친구, 가족 그 이상이다. 때로 이 소박하지만 경이로운 신화적 의례의 전령사도 되어준다.
비 오고 난 후의 숲을 좋아한다. 땅과 나무와 풀의 냄새가 물기를 머금고 숲에 가득 내려앉는다. 그 물기 어린 비릿한 냄새 속으로 나는 묵묵히 걸어 들어간다. 질퍽거리고 눅눅하지만 상관없다. 마치 깊은 바다에 서서히 잠기듯 내 몸도 숲에 젖어 간다. 저만치 앞서가던 곰돌이가 뿌리가 훤히 다 드러난 상수리나무 앞에서 멈추었다. 왼쪽으로 세 번, 오른쪽으로 세 번 뱅글뱅글 맴을 돈다. 뒤돌아 나를 보며 말한다.
“헤헤. 바로 여기야. 여기.”
어느새 상수리나무 뿌리가 양쪽으로 벌어지며 나무 가운데로 작은 길이 하나 생겨났다. 숲의 가장 깊은 곳, 아무에게나 열어 주지 않는 길, 그 길을 곰돌이가 또 찾아냈다. 곰돌이가 꼬리를 높이 세워 신나게 흔든다.
“마찬가지로 신화는 흔히 불구자나 병자에게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데, 이들이 매개 형식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구나 병을 존재의 결핍, 즉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죽음은 삶과 마찬가지로 실제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 모두 말하자면, 병적인 것까지를 포함하는 모든 조건은 그 나름대로 긍정적이다. 가장 볼 것 없는 존재도 체계 내에서 완전한 자리를 차지할 권리를 갖는다. 왜냐하면 불구나 병은 죽음과 삶이라는 두 개의 ‘완전한’ 상태를 통로로 설정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신화학 1> 레비-스토로스 지음, 한길사
아프기 전에 이 글을 읽었을 땐 관념적으로만 이해했다. 그럼에도 저 문장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진짜 아픈 사람이 되어보니, 삶과 죽음 모두 실제적이란 말을 몸으로 그냥 깨달았다.
동시에 결핍을 보는 관점의 전환이 대혁명처럼 일어났다.
결핍은 경계의 시간을 살아 볼 기회가 되어준다. 그 경계에 서 본 존재는 현실 세계와 꿈의 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다. 삶의 연속성을 깨는 불연속 지점을 그들이 한번 살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병과 병자는 삶과 죽음의 매개항이 될 수밖에 없다. 삶의 의미는 그들에 의해 종종 발견된다. 결핍이 불행이 될지 행복이 될지는 다만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니 스스로와 타인을 함부로 불쌍하다고 보는 게 오만이고 편견이다.
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한없이 다운되어 있었다.
올 초 신춘문예 당선의 기운을 받아 야심 차게 장편을 하나 준비했다. 그게 공모전 본선에도 가보지 못한 채 똑 떨어졌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아직 설익었나 보다.
거기다 같은 꿈을 꾸던 소중한 친구와 합평을 하다 그만, 관계가 어그러졌다. 나의 어설픈 조언이 그에게 비평이 되었고, 비난으로 발전해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결국 나의 타인을 향한 과도한 연민과 오지랖이 문제였다. 각자의 그림자를 서로에게 투사하며 깊은 상처를 주고받았다. 한번 어긋난 관계에는 틈이 벌어진다. 갈등은 어떡하든 봉합할 수 있지만, 감정의 틈에 새겨진 흔적은 쉽게 아물지 않는다. 그렇게 골이 깊어지며 자연스레 관계가 소원해졌다.
타인과의 관계에도 감정의 총량이 있는 것 같다.
관계가 깊고 진지할수록 감정의 소모도 급격하다. 밑바닥을 보일 정도로 다 써버렸을 때쯤, 관계는 끝이 나버린다. 상처 사이로 서서히 끈적거리고 시커먼 물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마음속에 검은 웅덩이가 또 만들어지려는 시그널(signal)이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성스러운 공간이라든지, 피난처를 지니려 한다면, 그곳은 우선 황무지가 아니어야 하며, 암브로시아-외부로부터 여러분 안에 불어넣는 기쁨이 아니라, 여러분의 내부로부터 나오는 기쁨-의 샘이 있는 어떤 활동 공간, 즉 여러분이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의도와 자신의 소망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됨으로써, 비록 작더라도 하늘나라가 거기 있어야 한다. 내 생각에 모든 사람은-본인이야 알건 모르건 간에-그런 공간을 필요로 한다.”
<신화와 인생> 조세프 켐벨 지음, 갈라파고스
암브로시아는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이 먹는 불멸의 능력을 가져다주는 음식이다. 나의 피난처이자 성소인 곳에 성배가 있을 것이다. 그 성배 안에 담긴 게 암브로시아가 아닐까. 예수님에게 하늘나라가 어디 있냐고 제자들이 물었다. 예수님은 여기도, 저기도 아닌 너희 안에 있다고 대답했다. 하늘나라는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세계다. 그 나라를 얼른 찾아 암브로시아를 맛봐야 했다. 그 사이 가을로 계절도 바뀌었다.
가을은 좀 위험하다.
모든 것이 소멸해가기 직전의 마지막 만찬 같은 느낌을 준다. 숲길을 걷고 있으면 여기저기서 툭,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상수리나무와 밤나무가 겨울이 오기 전 숲에 마지막 만찬을 벌리는 중이다. 이제 곧 낙엽이 지고 죽음 같은 겨울잠을 자는 시기를 예고한다. 검은 웅덩이가 익숙한 제 자리를 찾아가기 전, 뭐라도 해야 했다.
오래전 브런치를 시작한 적이 있다.
마음에 힘이 부족해 속절없이 한 편만을 발행하고 멈춰버렸다. 갑자기 그게 생각났다. 오랫만에 열어보고 깜
짝놀랐다. 5년전에도 난 인생의 반환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해야 할 이야기를 이제야 하는 거였다. 브런치 작품 출판 프로젝트 마감은 불과 20일 정도 남아 있었다. 무모해 보였다.
하지만 마음속 우물에서 급히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그렇게 나의 직관이 시키는 대로 갑자기, 이 글은 시작되었다. 주제도 구성도 결말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시작만이 중요했다. 검은 웅덩이에 가라앉기 전, 내가 먼저 손을 써야 했다. 그동안 가슴으로 읽었던 수십 권의 책들을 책상 위에 마구 쌓아놓았다. 직감이 이끄는 대로 책을 들어 아무 페이지나 펼쳤다. 형광펜으로 색칠되고 빨강으로 밑줄 그어진 문장들과 그 곁에 깨알 같이 적힌 나의 메모들을 옮겨 적었다. 한 단락이 끝나면 신기하게도 다음 문장과 이야기들이 굴비 엮듯이 따라 나왔다. 무의식의 흐름대로 따라가는 작업은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나갔다. 동시에 한없이 바닥을 내리쳤던 에너지가 순식간에 고양되는 것을 느꼈다. 살아있음의 감각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그게 바로 나의 피난처이자 성소였다.
“ 나는 항상 나 자신이 ‘부딪치는 바위’를 지나가야 하고, 그 바위는 이제 곧 닫혀버릴 참인 것 같은 느낌을 받지만, 나는 그런 생각에 압도되어 버리기 전에 어찌어찌 거기서 벗어나곤 했다. 이것은 매우 기이한 과정이다. 말 그대로 문을 계속 붙잡아 열어 두고 문장들이 쏟아져 나오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다. 부정적인 것들이야 계속해서 나타나겠지만, 여러분이 일찍이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을 하려면 그 문을 계속 열어 두어야 한다.
여러분의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비판을 미루어 두어야 한다. 글쓰기에 있어서도 문장이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항상 이런 일을 해야 한다. 비판을 미루어 두는 것은 이른바 ‘너는 할지니’라는 용을 죽이는 것이다. 그놈을 죽여 버려라.
작가의 슬럼프는 너무 머리가 많아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여러분의 머리를 자르라.
페가수스, 곧 시(詩)는 메두사의 머리가
잘린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에는 무모해야만 한다.
여러분의 양심이 허락하는 한 미쳐야 한다.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내보내고, 아예 죽여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2년 뒤에
진작 그래야 했다며 후회하리라. “
<신화와 인생> 조지프 캠벨, 갈라파고스
위 문장들에 형광펜을 쫙쫙 그으며 울컥했었다. 다시 봐도 또 그랬다. 마치 지금의 내 형편을 알고 건네는 캠벨의 따뜻하지만 강렬한 전언이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용에게는 수많은 비늘이 있다고 했다. 그 각각에 적힌 ‘너는 할지니’를 죽일 때, 그 용을 죽인 사자는 비로소 아이가 된다고. 필요한 건 역시나 사자 같은 용기였다. 진짜 아이는 어떤 관념에도 사로잡혀 있지 않다. 솔직하고 천진난만하며 당당하고 해맑다. 오랜 세월 내 안에 웅크리고 있었을, 내면 아이의 본모습도 그랬을지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세운 원칙이 하나 있다.
‘최대한 나의 직관을 믿고 따르기’
레비 스토로스가 ‘야생의 사고’에서 신화적 사고의 특성으로 언급한 브리콜뢰르( bricoleur)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우발적 마주침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감각을 총동원해 거기에 머물러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그건 오롯이 현재에 머무르는 순간이다. 현존이다. 더는 지난 과거를 후회하고 다가올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 것. 나도 그 비슷한 걸 흉내라도 내고 싶었나 보다.
여기에 실린 책들의 깊이를 나는 도저히 다 이해할 수도, 담을 수도 없다. 그저 내가 가슴으로 읽은 문장들을 감히 내 맘대로 빌려와 뭐라도 말하고 싶었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신호와 같다. 보잘것없는 내 고백에 통로가 되어준 주옥같은 책들과 저자에게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린다. 부디 귀한 책들에 흠이 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