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욕망
내 꿈에 크게 세 가지 이슈가 있다.
옷과 학교 그리고 집이다. 그중 옷 관련 꿈이 가장 오래되었다. 꿈속에서 여러 경로로 옷을 찾지만, 마음에 드는 옷이 별로 없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장례식이나 결혼식 등 특별한 날에 더 입고 나갈 옷이 없다. 옷을 계속 사지만 그래도 없다.
“ 겉옷은 몸을 보호하는 가리개 또는 가면(persona)을 상징하며, 인간은 이것을 외부 세계에 내보인다. 인간이 겉옷을 입는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타인에게 특별한 인상을 주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호기심 어린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의 내면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인간과 상징> 카를 융 외 지음, 동연
밖으로 보이는 내가 항상 불안했다.
왜 그렇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았던 걸까.
늘 누군가와 비교당하며 성장했다. 공부 잘하는 오빠들, 똑 부러지는 옆집 아이, 명랑한 뒷집 아이, 부모에게 순종적인 사촌, 하얀 피부에 예쁘장한 사촌 등 너무 많았다. 엄마는 항상 다른 집 아이만을 칭찬했다. 한 번도 있는 그대로의 내가 수용되고 긍정받아 본 기억이 없다. 차라리 나의 기억에 오류가 있는 것이라면 좋겠다.
난 말이 느리고 어눌한 데다 발음도 부정확했다. 어릴 때 냉장고가 도무지 발음되지 않아 맹장고라고 했다. 오빠들이 놀렸고, 어쩌다 내 목소리를 좀 내면 바로 윽박질렀다. 거기다 집에는 다 큰 사촌오빠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언젠가 큰오빠는 나를 안방 구석에 몰아세우며 ‘형들도 너 벼르고 있어.’라고 겁을 주었다. 그리고 나쁜 일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정말 일어났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온몸이 굳어버려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난 불편하고 어려운 남자들에 둘러싸인 섬 같았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장손이라며 큰오빠만 끼고돌았다. 아빠는 술을 드시지 않는 평소엔 아무 말씀이 없었고, 엄마는 무뚝뚝한 데다 살갑지 않아 말을 걸기 힘들었다. 할아버지가 그나마 좋았지만 가까이 가긴 좀 어려웠다. 내 편이 하나도 없는 집에서 난 누군가에 마음을 열고 관계를 맺는 경험을 할 수 없었다. 살면서 친구, 연인, 동료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였다.
난 내가 예쁘고 귀엽게 생기지 않아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어딘지 부족하고 자신감 하나 없는 아이일 뿐이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노력하여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럴수록 스스로가 미워졌고, 바깥의 사랑에 매달리며 목말랐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방황, 깊은 상처가 거기서 비롯되었다. 난 나도 모르게 타자의 욕망을 끊임없이 내면화했다. 자연스레 사회적으로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강박도 생겼다. 그래야 나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럴수록 나의 본질은 깊은 무의식으로 자꾸만, 자꾸만 침몰했다. 난파된 배처럼 무의식의 바다를 둥둥 떠다녔다. 결국 배에 담겨있을지 모를 소중한 보물까지 심연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앞에서 본 것처럼 페르소나는 자아가 바깥세상에 내보이고자 하는 얼굴이다. 이는 사회의 요구에 순응하고 적응하는 것을 나타내며, 자신을 다른 사람의 기대와 타협시키는 집단 무의식에서 나온 가면이다. ..페르소나는 돈, 명예, 권력으로 보상받기도 한다. 그림자의 통합은 물질과 상관없이 온전하게 되는 영적 선물을 준다. 그것은 일관된 자기감정을 제공하고, 혹사된 가짜 페르소나를 억제한다. 페르소나는 인격에 필요한 부분이고, 정당한 자아의 옷이다. 그림자와 페르소나는 서로 균형을 잡아준다. 페르소나는 자아의 이상이고 그림자는 우리의 실재이다.
가짜 자기는 자아의 그림자 면 페르소나이다. 그것은 진실을 희생해서라도 좋은 인상을 주려고 한다. ..부정적 페르소나는 인정을 받기 위해 순응을 무엇보다도 우선시한다. ..두려움은 자존심보다 높은 자리에 있다. ..나는 감히 나 자신을 존중할 것을 선택하는가? 나는 아무리 상처를 입고 손해를 보더라도 나 자신이 될 것을 선택하는가?”
< 내 그림자가 나를 돕는다> 데이비드 리코 지음, 마디
그러나 스스로 존중하지 못한다면 바깥에서도 존중받지 못한다.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에 나의 내면 주파수를 고정하고 있다면 현실에도 영향을 미친다. 내가 집중하는 바로 그곳이 나의 에너지 센터가 되어 비슷한 것을 계속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이를 과학적으로 입증한 게 양자물리학 이론이었다. 에너지의 형태를 결정하는 관찰자 효과였다. 관찰자가 어디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에너지는 입자이기도, 파동이기도 했다. 과학적 사고에 취약한 내가 더듬더듬 관련 책을 읽으며 어렴풋하게 알게 된 삶의 법칙이다. 마치 자석의 원리와 같다. 같은 극성을 가진 것끼리 서로 끌어당긴다는 말이었다. 속담에는 이미 있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선조들의 지혜가 참으로 놀랍다.
더는 가짜 자기를 찾느라 삶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말도 어눌하고 부끄럼 많은 나. 그런 나를 감추기 위해 여러 겹 겹쳐 있었던 옷을 하나씩 벗어야 했다.
서울역에 가면 집이 없어 바깥 잠을 자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흔히 노숙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난 노숙자라는 말이 좀 그렇다. 삶을 실패한 사람이라는 비난이나 비하의 뉘앙스가 담겨있는 것 같아 불편하다. 그 누구도 타인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거나 평가할 수는 없다. 바깥 잠을 자는 사람들은 대체로 옷을 여러 겹 겹쳐 입는다. 추운 겨울이라면 이해하겠지만 찌는 듯한 삼복더위에도 마찬가지다. 정신적인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난 그들에게서 나의 그림자를 보았다. 수 겹의 옷을 겹쳐 입어야 살 수 있었던 나의 페르소나를 현실 밖에서 마주한 느낌이었다.
마치 거울처럼 그들에게서 내가 보였다.
집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가장 침입당하기 쉬운 상태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옷을 계속해서 겹쳐 입는 것이다. 그게 자신의 페르소나이자 집이다. 연약한 속살을 보호하는 거북이의 단단한 겉옷처럼 삶의 순간순간, 생존에 필요한 옷이었다. 옷을 벗고 속살을 드러낸다는 것은 진실을 내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두렵고 수치스럽다. 용기가 아주 많이 필요하다. 아직 내겐 벗어야 할 옷이 많이 남아 있다. 아닌 척하는, 전혀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하는 옷들이었다.
“가족들은 겉치장을 한 이 페리소나를 인정하고, 희번드레한 가짜 아래는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 페리소나는 타인을 속일 수도 있을 지라도, 꿈꾼 이는 이게 진짜 자신이 아니라는 걸 안다. 이 모습은 그녀 자신과 타인들에게 진실을 숨기도록 자신에게 제공된 것들로 만들어낸 부분 자기이다.”
<꿈이 이끄는 치유의 길> 패트리샤 라이스, 수잔 스노우 지음, 동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