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도와주는 반대편의 힘
“결국 인생은 우리의 부족함과 싸우는 전투가 아니라 우리가 부족하다는 믿음과 싸우는 전투이다. 내가 자신 안에 감추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의 중대한 구성 요소이다. 무서워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활기이다. 이를 부인할 때 나는 신의 완전한 정체성을 부인한다. 나는 자신의 건강한 자아나 영적 ‘자기’는 모른 채 신경증적 자아와 페르소나만으로 산다. ..
자신에 대한 핵심적이면서도 가장 낯익은 부정적 신념을 확인해보라. 그것이 당신의 결정 배후에 있는 지배 원리일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이 자기 패배적 신념은 어린 시절에 기원을 두고 있고 세포처럼 당신 안에 각인된다. 수치심이나 공허감의 경험은 이런 신념에 따른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핵심적인 자기부정은 학대받은 결과일 수도 있고, 그 때문에 자신을 비난하는 수단일 수도 있다. ..역경 자체는 우리가 그 밑에 깔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댈 도와주는 힘이다. 융은 “삶은 의미 있는 것이기도 하고, 의미 없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의미가 이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하여 이기기를 간절히 희망한다.”라고 말한다. ..그림자는 팽창된 자아가 용납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그림자는 자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거울, 우리가 백설 공주가 아님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내 그림자가 나를 돕는다> 데이비드 리코 지음, 마디
20대에 그 시대 젊은이들이 그랬듯 무라카미 하루키 책을 무척 좋아했다.
밤을 새워 책을 읽으며 하루키 키즈가 되어갔다. 상실의 시대, 댄스 댄스 댄스, 세계의 끝과 하드 보일드 원더랜드 등 30년 세월을 버티며 아직 내 책꽂이에 건재한 책들이다. 이사를 그렇게 많이 다니면서도 낡고 냄새나는 책들을 버릴 수 없던 건, 그 안에 나의 한 시기가 오롯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특히 ‘양을 쫓는 모험’에 등장한 ‘양 사나이’라는 인물에 빠져들어 이것을 모티브로 한 작업도 꽤 많이 했다.
테라코타, 나무 조각, 설치, 퍼포먼스 나중에 그림책까지, 다양했다. 소심한 내가 무슨 배짱과 용기가 있어 퍼포먼스까지 했는지 모르겠다. 졸업작품이기도 했던 설치작업으로 미술계에서 괜찮은 평가도 받았다. 그때만 해도 설치작가로 잘 나갈 줄 알았다. 하지만 인생의 항로는 목적지와 항해술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삶으로 알았다. 예기치 못한 파도에 부딪혀 무인도에 표류하기도 하며 심지어 배가 난파되기도 한다.
“문을 열자, 거기에는 양 사나이가 서 있었다. 양 사나이는 양가죽을 머리에서부터 푹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의 땅딸막한 몸집은 그런 차림에 잘 어울렸다.
...
‘난 친구를 찾고 있소’라고 내가 말했다.
‘그래?’하고 양 사나이는 등을 보인 채 흥미 없다는 듯이 말했다.
...
“등에 별 모양이 있는 양도 찾고 있는데.”
내가 다시 말했다.
‘그런 건 본 적도 없는데’라고 양 사나이가 대꾸했다. 그러나 양 사나이가 쥐와 양에 대해서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그는 지나치게 무관심한 척하려고 했다.
...
“가끔 말이지, 그, 양적( 洋的)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부딪쳐서 그렇게 된다구. 뭐 딴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야. 게다가 당신도 나를 책망하는 듯한 말을 해서.”
...
양 사나이의 사고의 리듬은 왠지 모르게 고르지 않아서, 그것이 방의 공기를 팽창시키기도 하고 수축시키기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양을 쫓는 모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문학사상사
그땐 그렇게 양사나이에 빠져든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젊은 감각으로 무의식이 반응했고 무의식이 시키는 대로 작업을 한 것뿐이었다. 30년 세월이 흘러서 아하! 가 찾아왔다.
양사나이는 다름 아닌 나의 그림자 투사였다.
나를 이해한다는 건 그런 일이었다. 시간이 무척 많이 걸리고, 어쩌면 평생이 걸릴지도 몰랐다. 그건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었을지 모를 나, 오랜 시간 죄책감과 수치심 너머에 조용히 빛나고 있을지 모를 white shadow를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그림자에도 삶의 시소처럼 밝고 어두운 대극이 있다. 마치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그렇다. 내면 그림자가 black shadow 일지 white shadow일지는 자신의 선택이다.
살면서 겪은 많은 고통과 상처는 내 안에 어두운 그림자가 되고 말았다. 무슨 약이 필요한지도 몰라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세월만 흘러갔다. 하지만 난 그 그림자에서 그림과 글이라는 것을 길어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살아갈 힘과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 절망 바로 곁에 희망이 있었다. 삶의 균형은 그렇게 찾아진다.
마주하기 힘들어 그림자가 된 삶의 고통이나 역경은 나를 도와주는 반대편의 힘이다. 그림자를 직면한다는 건 고통과 두려움, 상실의 깊은 어둠 너머 삶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발견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의 결단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한 낡은 무의식의 패턴을 깨고, 치유와 회복으로 나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쉽지 않은 길, 그래서 더 의미가 있다.
“진짜 자기는 지금, 이 순간의 우리 모습에 집중하고 헌신할 것을 요구한다. 흥미로운 실존 프로젝트이다. 진짜 자기에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발전하는 감각, 즉 자기의 현재 감각을 적절히 나타내는 것이다. 선승들이 늘 말했듯이 자기는 시간 속 사건이고 공간 위치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는 그 어떤 것도 아니고 어디에도 없다’ 정체성은 대상이 발견되는 방식으로는 발견되지 않는다. 아무 대상도 찾지 않고 발견되어야 할 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우리 안의 정체성이다.”
< 내 그림자가 나를 돕는다> 데이비드 리코 지음, 마디
양 사나이는 양가죽을 뒤집어쓰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했다.
내가 그 옷을 빌려 입었을 때, 나의 정체성은 달라졌을까. 양 사나이가 내 그림자의 투사라면, 진짜 나는 누구였을까. 나는 대상이 발견되는 방식으로 정체성을 찾고 있었는지 모른다. 양가죽 옷은 그 시절 나의 정체성이었다.
옷은 나에게 가장 익숙한 페르소나(persona)다.
페르소나는 분석심리학자인 융이 가면을 쓴 인격을 지칭했던 말이다. 살면서 많은 가면이 필요했다. 순간순간 외부와의 관계를 맺을 때 요구되는 그런 것이다. 마치 피에로의 웃는 얼굴 분장처럼 그 역할에 어울리는 가면이다. 하지만 피에로의 진짜 얼굴은 짙은 분장 속에 가려져 있다. 그가 사실 울고 있을지, 웃고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나에게 오랜 세월 반복된 꿈이 몇 개 있다. 그중 하나가 옷을 찾는 꿈이다. 정체성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찾아지지 않는다는 의미를, 그 꿈의 의미를 꿈 작업을 하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