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해진 그림자의 에너지
“중년이 되면 본의 아니게 시소의 양 끝을 오가는 삶에 지치게 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경각심만 있다면 중간지점이 최선이라는 깨달음도 얻게 된다. 중간지점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잿빛 타협의 장소가 아닌 황홀경과 기쁨의 장이다. ..그러나 중간지점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다. 이 지점은 칼날처럼 날카롭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이 세상 너머 다른 차원의 시공간이기도 하다. ..
만일 누군가 찰나 이상으로 이 체험을 지속한다면 그 사람은 길을 잃게 되어, 마침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인도에서는 경고한다. ..중년에 이르면 문화화 과정은 거의 완결된다. 그런데 이 시기는 아주 메마르다. 마치 모든 에너지를 다 쥐어 짜낸 듯한 느낌이다. 이 시점에 이르면 그림자의 에너지는 어마어마하게 커진다. ..
이 단조로운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랑에 빠지거나, 이혼을 하거나, 직장을 그만두는 파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극단적으로 위험해지는 순간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림자에서 에너지를 얻어 그 에너지를 바르게 사용하게 된다면 이런 일들은 새 삶의 장을 열기 위한 무대설치 작업이 될 수 있다.”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로버트 A. 존슨, 에코의 서재
어느덧 나도 그 시절 엄마, 아빠의 나이가 되었다.
중년이란 시기를 통과하면서 그분들의 삶이 이해되었다. 이젠 안쓰럽다는 감정만 남았다. 자연에 기대어 생명을 키우던 농사꾼이 서울에 올라와 허드렛일을 하며 겪었을 억울함과 분노가 짐작되었다. 일곱 대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가장의 무게와 까탈스런 할머니의 비위를 맞추고, 세 아이를 돌보면서도 부업을 쉬지 못했던 엄마의 고단함도 느껴졌다.
아빠는 평생 그 일을 하다 나처럼 암에 걸렸고, 80이 넘어서야 일을 그만두셨다. 엄마는 오랜 불면증에 여러 자가면역질환으로 고통받아 왔다. 큰오빠는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장손의 무게에 짓눌려 성인이 되어서도 집을 떠나지 못했다. 결코 평안한 삶들이 아니었다. 감히 내가 그 삶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누구나 각자 삶의 무게와 깊이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할 만큼 성장했을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 그럼에도 그 시절 마음의 상처가 없던 게 되는 건 아니었다.
양가감정이 들었다. 삶의 여러 모습에서도 그랬다. 이런 시소 타기 같은 삶에서 그만 내려와 어디든 도망치고 싶은 바로 그 시기였다. 심리학자인 존슨이 말하는 시소의 중간지점은 찰나이면서 영원한, 경계의 시간일 것이다. 의식 세계와 무의식의 통합 상태, 카이로스의 시간이 흐르는 어디쯤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시소 양쪽의 무게가 똑같아지는 지점의 황홀이 궁금하다. 어쨌든 명상과 요가의 궁극적인 지향점인 것만은 분명하다. 내가 하는 명상은 어렵지 않다.
그저 호흡에 아주 잠시라도 집중해 보는 것이다.
바닥에 몸을 붙이고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숨을 들여 마시고 내쉬는 것, 온전히 숨에만 머무르는 것. 엉켜있던 생각을 내려놓고 회음부서부터 정수리까지 숨길을 잘 따라가다 보면 현존의 감각이 돌아온다. 그 숨길은 쿤달리니 요가에서 말하는 차크라(chakra), 일종의 우리 몸의 에너지 센터가 있는 곳이다. 요가는 그 들숨과 날숨의 감각에 몸을 조화시키는 아사나(asana) 다. 수영할 때도 비슷한 감각이 느껴질 때가 있다. 수영만큼 호흡과 몸이 착 달라붙어 있는 운동이 또 있을까. 땅이 아닌 물에서의 요가 같은 느낌이다.
“융은 고대 그리스어 단어 ‘에난티오드로미아( enantiodromia)’를 빌려 중년의 역행을 설명했다. 단어를 풀면 ‘반대로 (enantio)’ ‘달린다 (dromia)’는 뜻이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 (Heraclitus)는 이 단어를 사용해 대극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결국 모든 것은 그 반대가 된다고 설파했다. 삶은 죽음으로, 죽음은 삶으로 이어진다. ..엔나티오드로미아는 극도로 편향된 성향이 의식 차원의 삶을 지배할 때 일어난다. 그리하여 언젠 가는 똑같이 강력한 정반대 성향이 그림자 속에 자리를 잡는다. 처음에는 그것이 의식의 작용을 방해하는 정도지만, 나중에는 의식의 통제를 돌파해 전면에 나선다. 중국 철학은 이 과정을 ‘음양의 상호작용’이라 표현했다. ..
삶이 실망스럽고 지금껏 이뤄낸 것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는 물론이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며 살아왔다 해도 이는 진실이다. 그러는 동안, ‘살지 못한 삶’이 만든 그림자의 에너지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 ..중년에는 실패와 상실에 직면하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저마다 이런저런 한계에 부딪히고,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일도 생기며, 하늘을 찌르던 자신감도 떨어진다. 우리는 겉핥기식 삶에 머무를 수도 있고, 아니면 삶이란 이전까지 알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통제하기 어려우며 신비롭고 경이롭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도 있다.”
<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 로버트 존슨, 제리 룰 지음, 가나출판사
나에게 있어 저 그림자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살아내지 못한 삶의 반대편 그림자였을까. 내가 중년의 시기에 암이라는 병에 걸린 건, 그동안 돌보지 않았던 그림자의 마지막 경고는 아니었을까. 마음 깊은 곳에 있어 통 알아채지 못하니 몸 밖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건 아닐까.
동네병원 정기검진에서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초음파 사진이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거였다. 의사는 추가 검사 동의서를 바로 내밀었다. 무슨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나는 그 동의서에 사인을 하고 시술대 위에 누웠다. 며칠 후 괜찮다는 검사 결과가 나왔지만 의사는 여전히 암을 의심했다. 몇 달 더 지켜보자는 말을 뒤로 하고 병원을 나오는데 기분이 영 찜찜했다.
고민 끝에 암 전문 병원에 다시 갔다. 수많은 검사를 한 끝에 난 결국 암 진단을 받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시간이 천천히 흐를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몇 주 뒤 전신마취 수술을 하고 회복실에서 깨어났다. 체온저하를 방지하기 위해 따뜻한 공기가 가득한 시트 안에서 눈을 떴을 때, 살아있음을 온전히 느꼈다. 그건 마취 전, 수술대 위에서의 서늘하고 섬뜩한 감각의 정 반대편 감각이었다.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에 한번 갔다 온 느낌이었다. 죽음, 그 인간의 유한성이 몸을 통해 절절히 자각되었다.
그렇게 대극을 몸으로 한번 겪고 보니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 경이로움에 감사가 올라왔다. 감사는 신을 향한 진짜 기도의 원리다. 어떠한 절망에도 그것을 돌파하게 하는 최고의 에너지원이다.
존슨은 성인의 삶 가운데 49세를 가장 중요한 전환기라고 보았다. 심리분석가를 가장 많이 찾아오는 때라고도 했다. 신기했다.
나는 정말 딱 그 나이가 되어 삶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비록 병을 통하긴 했지만. 이제껏 살아왔던 삶을 재구성하고 다른 삶의 방식을 찾기 좋은 시기였다. 그림자로 옷 입고 있을 나의 반쪽 삶을 돌아보아야 할 바로 그때였다. 난 심리분석가를 찾아가는 대신 관련 책들을 뒤적거렸다. 나처럼 바깥보다 집 안이 편한 사람들한테 유용한 방법이었다.
“중대한 삶의 전환이 이루어질 이 역사적 시점에 우리는 그림자를 현실로 끌어내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그동안 버리고 거부하고 방치한 것에 알맞은 의식 차원의 자리를 찾아내야 한다. 그림자를 하나의 전체 안으로 불러들여야 한다.”
<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 로버트 존슨, 제리 룰 지음, 가나출판사
“인생에는 큰 꿈들, 그러니까 인격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꿈을 꾸는 중요한 시기가 있다. 사춘기와 중년기가 그런 때이다. 성인의 삶에서 꿈들은 대부분 개인적인 삶에 대해 언급한다. 그때엔 페르소나가 전면에 나서고, 각자의 인격에서 근본적인 것들은 멀찍이 뒤로 물러나 있으며 어쩌면 다시는 전면으로 나서지 않을 수도 있다.”
<어린이들의 꿈 해석> 칼 구스타프 융 지음, 부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