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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우물 하나

타는 듯한 목마름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내게 그림책이 내면 풍경이었다면, 동화는 그 안에 담긴 조금 긴 이야기였다. 동화를 잘 쓰기 위해 신화와 민담에서 심층 심리, 꿈으로 공부의 폭이 깊어졌다. 그러나 아직 동화를 잘 쓰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올 초 신춘문예로 등단한 게 전부다. 나는 아직 변변한 그림책도, 동화책도 없는 무명작가다.    

 

그렇게 내 방 안에서 1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작업을 하며 나의 마음속 깊이 숨겨진 우물을 만났다. 

한없이 어두워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우물. 살면서 우물에 담긴 물이 입구까지 차올라 넘칠 때가 자주 있었다. 그런 날, 가장 우울했다. 우울은 나를 암막 커튼을 치게 하고 종일 잠을 자게 했다. 그러나 죽음 같은 잠을 자꾸만 청하는 건, 사실 죽고 싶지 않다는, 살고 싶다는 반대편 그림자의 투사였다. 

우물의 물이 차고 넘치기 전에 먼저 퍼내야 했다. 그게 그림과 글이 되었다. 공들여 퍼낸 우물물을 깨끗한 통에 잘 담아 세상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나의 우물물은 식수로는 부적합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거절감으로 괴로워했고, 외부의 판단에 점점 더 예민해져 갔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딘가 급수에 상관없이 그 물을 나누어 마실 누군가 있지 않을까. 타는 듯한 목마름을 겪고 있다면 물의 급수를 따질 겨를이 없지 않을까.


“아동문학은 누구의 마음과 공명해야 하는가. 동심에 의존하고자 하는 어른의 마음에 더 먼저 닿는다면 그것은 아동문학이 아니라 성인을 위한 문학일 것이다. 어른에 앞서 어린이의 마음에 닿기를 원하지만, 이를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동화작가는 늘 글로써 자신을 먼저 달래고 싶은 욕구와 어린이에게 들려줄 글을 쓰는 존재라는 자각 사이에서 갈등한다. 하지만 아동을 위한 문학이 이처럼 무거워야 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여전히 안타깝고 몹시 아프다. 그들을 위한 문학은 더 가벼워져야 한다. 사회가 정상이라면.”

<거짓말하는 어른> 김지은 평론집, 문학동네 


아이보다 어른인 나의 욕구가 너무 앞섰던 탓이었을까. 

좋은 동화는 내면 아이뿐만 아니라 지금의 아이까지 담아야 하는 거였다. 마음속 우물에서 길어 올린 글쓰기는 어린이를 위한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으로 깊어졌다. 아직 난 진짜 어른도, 작가도, 아무것도 되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사랑이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  엄마처럼 커피를 마시고  싶기 때문이에요. <커피 한 모금> 어썸키즈

그림책을 조금씩 내며 삽화가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마치 글을 전문으로 쓰는 작가의 뒤처리를 맡은 느낌이었다. 동화에서 그림이 글을 도와주는 보조적 요소라는 시각은 그림책에도 비슷하게 적용되었다. 그림책은 동화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그 어디쯤 걸쳐 있는 것 같았다.  

그림책에 쓴 글을 자기 마음대로 고친 편집자가 있었다. 글의 앞뒤 맥락이 매끄럽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결국 그림과 맞지 않는 글이 되었다. 그림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자판을 두드려 쉽게 고칠 수 있다면, 그것도 고쳤을지 몰랐다. 결국 다른 곳에서 그런 일도 일어났다. 

이번엔 더 심각했다. 수작업으로 그린 그림을 포토샵으로 마구 고쳐 놓았다. 논의하며 그렸던 그림인데, 그 크기와 배치까지 다 바꾸었다. 캐릭터를 더 돋보이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책을 받아 들던 날, 깊은 충격을 받았다. 거기에 담긴 내 마음이 난도질당한 기분이었다. 더구나 믿고 따르던 곳에서 그런 일을 당하고 보니 도무지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큰소리로 따져 묻고 싶었지만, 소리가 막혀 나오지 않았다. 몸이 또 얼어붙었다. 아직도 난 그 책을 잘 보지 못한다.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며 절망했다.     


아마 그들에게 내 글과 그림이 별로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들은 그림을 그린 작가의 영혼 따위 애초부터 고려하지 않았다. 상업 출판사의 상품이기 전에 그림책은 한 존재의 내면 풍경이 고스란히 담긴 그 무엇이다. 아직 난 어린이를 위한 문학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다만 내 안의 이야기와 현실의 아이가 만나는 지점을 찾아서 느리지만 꾸역꾸역 나아갈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있다.      


이 세상에 나쁜 그림책은 없다.      


최소한 작가의 진심과 치열한 고민이 담긴 그림책이라면, 그것만으로 존중받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비록 별로고 후진 그림책일지라도 말이다. 그건 그들의 기준일뿐이다.


외할아버지 혼자서만 새로운 놀이를 하는 거라고 생각한 가령이는 그만 단단히 토라지고 말았습니다. <집>

"내면의 황금은 최고 가치의 인간 정신으로서 우리의 영혼, 자아,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이다. 우리는 누구나 내면의 황금을 갖고 있다. 그것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우리를 위해 황금을 짊어져 달라고 부탁하지 않을 때라야 상대를 한 인간으로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상대를 한 인간으로서 바라보아야 우리는 외롭지 않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우리의 외로움을 덜어줄 수는 없다. 

외로움은 내면의 문제이다...우리는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고 구름 속으로, 외로움의 격렬한 고통을 향해 나아간다. 땅에 발을 디디고 있으면 우리는 세상의 에너지와 연결된 느낌을 갖게 되며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먼저 자신의 내적 기반과 연결되어 있어야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맺을 수 있다. 땅 위를 딛고 거닐면서 땅에다 자신을 연결시켜 보라, 이것은 외로움을 치유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내면의 황금> 로버트 A. 존슨, 인간사랑

     

그들에게 존중받지 못했던 내 안에도 저 내면의 황금이 있을 것이다. 

그림책에서 발견한 나와 지금의 나 어디쯤 숨겨져 있을 보물과 같은 것. 아주 작은 도토리 안에 거대한 상수리나무가 숨어있듯이 나의 내면에도 그런 작은 씨앗 하나쯤 있다. 아직 내가 찾아내지 못했을 뿐. 그러나 그것을 외부에 투사한다면, 이 외롭고 쓸쓸한 날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우울이 또 나를 잠식시켜버리기 전에 행동해야 한다.     


두 발을 땅에 연결시키는 가벼운 산책이라도 해보는 거다. 내 경험상 분명 미세한 효과라도 나타난다. 산책은 웬만한 항우울제보다 낫다. 나의 본성을 자연에 맞추어 걷는 행위에서 치유가 시작된다. 천천히 걸을 때 뒤엉켜있던 나의 뇌는 부드럽게 흔들리며 제 자리를 찾아가고, 숲 속의 풍경을 바라보며 경직되어 있던 가슴은 경이로 다시 뛰기 시작한다. 문제는 자기 그림자와 딱 붙어 묵직해진 몸을 침대에서 일으켜 집 밖으로 나오는 마음의 결단이다. 그게 성공했다면 일단 반은 된 거다.     


“인간이 새로운 환경을 탐험하고 자원을 찾아 나서면 도파민이라는 뇌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어 일시적인 흥분을 느끼게 된다. 소위 ‘채집 황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이 채집 수렵 생활자였던 과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내가 오늘날 낙엽을 주워 모으며 느끼는 기분은 그러한 본능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이 뿌듯한 감정의 진화적 근거가 무엇이든 간에, 이런 행동이 내 뇌의 화학적 균형을 미세하게 조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건 확실하다. ..나는 화사한 낙엽 카펫 옆을 서성이며 마법 같은 항우울 효과가 나타나길 기다린다. 햇살이 따스하다. 눈부신 빛깔들 속에서 보낸 몇 분이 기분을 돋워주어 정말로 입안에 상큼한 맛이 느껴질 것만 같다.”

<야생의 위로> 에마 미첼, 푸른 숲      

엄마는 올겨울 내내 집에만 있었어요. 어쩌다 나를 산책시킬 때만 빼고요. <빈 집>
엄마와 난, 집 뒷산으로 산책을 하러 가곤 했어요. 엄마는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그곳엔 신비한 비밀도 숨겨져 있죠.         <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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