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오타쿠 강국이다. 오타쿠는 ‘만화 · 애니메이션 왕국 일본’을 지탱하는 뿌리이자 자양분의 상징이다.
2020년 일본 야노경제연구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의 인구 10분의 1인 1,200만 명이 만화와 애니메이션 마니아로 꼽힌다. 원래 오타쿠는 1980년대에 이질적인 취향을 가진 '특이한 사람들'이라는 부정적인 표현으로 쓰기 시작했다. 지금은 분야나 주제를 막론하고 어떤 대상에 심취해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국내에서도 '덕후'로 널리 쓰인다. 일본의 '오타쿠노믹스' 3대 시장(만화 · 애니메이션 · 게임)은 한류처럼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도 일조하는 등 연간 4조 엔 규모의 소비시장으로 급성장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강한 일본의 전통은 에도시대(17세기~19세기 중반) 목판화인 '우키요에(浮世繪)'에서 찾기도 한다. 우키요에와 만화 · 애니메이션은 2차원 공간을 균일하게 채색하고 상상의 세계와 환상적 공상적인 소재를 다루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키요에는 1851년 런던과 1867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통해 유럽에 알려졌다. 당시 공예품을 포장하는 완충재로 우키요에가 그려진 종이를 사용했는데, 유럽인들에게는 이 포장지가 이국적이고 신선한 느낌으로 눈에 확 들어왔던 것이다. 그건 지금껏 접하지 못한 과감한 구성과 생략, 거침없고 과장된 표현이 주는 충격이었다. 우키요에의 간판 스타인 호쿠사이의 <후지산 연작>을 보면 이런 특징이 잘 드러난다. (위 표지 사진: 우키요에 대표작 호쿠사이(Katsushika Hokusai)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1832)). 집채만 한 파도가 후지산을 집어삼킬 듯이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보면 가슴속에 '뭔가 느낌이 팍 오는 것'이다. 서양 회화의 전통적인 문법과 규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대담한 파격을 즐기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일본풍의 문화는 당시 유럽의 사회와 예술계에 일대 선풍을 일으킨다. 19세기 말에 30년 이상 유행한 '자포니즘(Japonism)'이다. 고흐와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의 간판스타 화가와 음악가 드뷔시 등 많은 예술가가 동양에서 온 이국적인 문화 사조에 빠져들었다. 미술사학자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에서 "인상주의자들이 새로운 소재와 참신한 색채 구성을 야심 차게 찾아 나가도록 협력해준 조력자"로 일본의 채색 목판화를 들었다.
일본의 우키요에를 모작한 고흐의 작품(왼쪽이 원본, 가운데가 고흐 작). 오른쪽은 모네의 <기모노를 입은 카미유>
20세기 들어서도 일본의 대중문화는 주목을 끌었다. 특히 일본의 영화는 1950년대에 황금기를 구가했다. 일본 영화의 거장인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은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라쇼몽(羅生門)>(1951)으로 작품상을 거머쥐었고 은사자상 수상작인 <7인의 사무라이>(1954)는 할리우드의 리메이크 작 <황야의 7인>(1960)을 비롯해 수많은 오마주를 받았다. 이후 오리엔탈리즘이 불러온 동양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일본 영화와 작가, 사무라이 정신과 같은 일본의 독특한 문화가 꾸준히 관심을 모았다.
근래 아시아 문화가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사례가 이어졌다. 1980년대 <영웅본색> , <와호장룡> 등 홍콩 영화에 이어 장이머우 감독을 대표로 한 중국 영화가 부상했고, 1990년대는 일본 문화의 시대가 열렸다. 만화(망가), 게임과 함께 아시아와 일본 스타일로 팝을 재해석한 J-팝은 10여 년 동안 인지도를 키우며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음반 산업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로 성장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그 자리는 점차 K-팝과 한국 드라마가 대신하고 있다. 한류가 국제무대에 진출한 것은 이제 20여 년 정도로 볼 수 있다. 한류의 성공 요인은 한국인의 역동성과 디지털 인프라로 요약된다. K-팝은 미국과 유럽 팝 음악의 영향을 받았으나 우리만의 독자적인 방식을 통해 응용과 재창조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따라 하기 쉬운 춤 동작, 중독성 있는 멜로디, 현란한 뮤직비디오, SNS를 통한 폭발적 반응이 특징이다. 한국인 특유의 감성과 열정을 세계인이 호응할 만한 콘텐츠로 표현했고,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와 디지털 마케팅을 통해 빠르게 퍼져나갔다.
한류는 지속 가능할까? 전망이 마냥 낙관적이진 않다.
다양하고 창의적인 콘텐츠로 세계적인 경쟁력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한류 콘텐츠의 '공간적 세계화와 시간적 지속화'가 핵심 과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류가 반짝 인기나 열풍이 아닌 세계의 문화 주류로 꾸준히 인정받아야 한다. '변방의 북소리'로 그쳐서는 곤란하다. BTS는 한류 스타를 넘어 이제 세계 팝 음악계의 주류 반열에 올라서고 있다. 한 명의 스타, 한 번의 히트가 아니라 제2, 제3의 BTS가 계속 나와야 한다. 영화에서는 봉준호의 <기생충>과 윤여정의 <미나리>, 드라마에서는 <오징어게임>, <지옥>에 이어 제3의 스타와 작품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
중장기적으로는 대중문화 일변도의 한류에서 벗어나 확장성과 포용성을 가지고 발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순수예술, 인문학, 생활문화를 포함한 한국 문화 전반, 나아가 한국이라는 나라의 총체적인 호감으로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 미국, 영국, 일본 등 이른바 ‘문화강국’은 오랜 역사와 전통으로 다져온 문화 스펙트럼이 다양하고 국가적 기반이 탄탄하다. 미국은 팝과 할리우드, 영국은 브릿팝과 (셰익스피어, 조앤 롤링으로 대표되는) 풍부한 스토리 콘텐츠가 강하다.
만화 · 애니메이션 왕국인 일본의 실력도 과소평가할 순 없다. 일본이 디지털 만화인 웹툰 시장에서는 늦었지만 '묵묵히 한우물을 파는' 장인 정신과 도제 시스템은 오랜 자산이다. 오타쿠는 바로 문화의 풀뿌리이고 콘텐츠 창조의 전사 역할을 한다. 노벨상 수상자를 보면 일본의 저력과 인프라를 확인할 수 있다. 총 28명의 수상자는 세계 6위, 2001년 이후 과학 분야 노벨상은 18명으로 미국에 이어 2위를 차지한다. 응용과 디지털 트렌드에는 약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기초과학과 원천 기술 경쟁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는 지표다. 기초가 탄탄하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일본의 자포니즘은 19세기 말에 새로운 형식과 대담한 파격으로 유럽 문화계에 어필했다. 일본 영화는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특유의 장르적 특성으로 서구 영화계를 사로잡았다. 또한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등 그들의 문화 포트폴리오는 다양하다. 예전 같은 기세는 아니지만 일본의 움직임을 여전히 주시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도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를 창조적으로 융합해 세계 속에 보편적인가치와 정신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 민족은 특유의 정과 흥, 해학과 어울림의 문화가 특징이다. 대표적인 한류 드라마인 <겨울연가>와 <대장금>은 정과 예의(충), K-팝은 흥겨움과 역동성의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시대와 환경의 변화 대응에도 빠르고 효율적이다. 이를 성공적으로 지속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강점인 문화의 기초 체력과 오타쿠 정신도 계속 보완해야 할 부분이다.
문화 현상은 물결처럼 흐르고 파도처럼 굽이치는 것이다. 한 군데 머물지 않고 자연스레 어디론가 흐른다. 한 나라의 문화, 한 가지 문화현상이 영원히 지속될 순 없다. 다양한 문화가 광활한 대양에서 조화롭게 서로 어울린다면 세계는 더욱 풍요롭고 다채로워질 것이다. 그중에서도 인류가 '한류의 물결(Korean Wave)' 속에서 오래도록 행복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