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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Jan 03. 2021

최고의 집콕 영화로 웨일스 여행하기

- 언덕을 산으로 만든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 <잉글리쉬맨>

서대문의 안산을 자주 찾는다. 독립문역에서 가깝고 여기저기서 오르기도 편하다. 사방팔방으로 전망도 시원해서 조선 시대에는 궁궐에 보고하는 마지막 봉수대가 꼭대기에 있었다고 한다. 나무 덱을 깔아 전체 7㎞를 무장애 숲길로 한 바퀴 돌 수 있게 조성하면서 가족 단위로 걷기에도 적당하다.


안산의 높이가 296m이. 언젠가, 산은 300m를 넘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딱 4m 부족하다. 남산은 243m. 기준이 맞는다면 안산이나 남산이나 모두 산이 아니라 언덕이다. 조금 당황스러운 순간이다.




1917년 산 높이로 멘붕에 빠진 사람들이 있었다. 1995년 영화 <잉글리쉬맨> 이야기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교회에 모인 평화로운 일요일, 영국 웨일스(Wales)의 한 시골 마을에 측량 조사단 2인조가 방문한다. 지도 제작이 목적으로 마을 뒷산(Ffynnon Garw, 피넌가루)을 실측하려는 것이다. 이 전문가들에게 산이란 1,000피트(304.8m)를 넘어야 한다. 마을 사람들의 이목은 온통 산의 높이에 집중한다. 그런데 결과는 984피트, 16피트(약 5m)가 부족하다. 그야말로 충격,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산은 그들에게 과학이나 측량의 영역이 아니었다. 마을의 상징이자 자부심이었고 대대로 주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한 역사나 다름없었다.      


영화 <잉글리쉬맨>


측량 조사단 이 자들은 더구나 잉글랜드인이다. 역사적으로 앙숙이자 얄밉기 짝이 없는 것들 아닌가? 1차 세계대전 중이라 남자들은 전쟁터에 끌려가거나 후방의 광산에서 전쟁 연료를 캐다 석탄 가루에 쓰러지는 비극의 시대였다. 전쟁으로 모두 지쳐 있고 희망이 사라진 시대에, 그 잉글랜드인들이 우리의 산까지 빼앗아간다고 생각하니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들은 결국 외친다. 흙더미를 쌓아 5m를 높이자, 산을 만들자!!


주민들은 조사단의 출발을 지연시키기 위하여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차를 고장 내어 출발을 못 하게 하는 데는 성공. 그런데 열심히 흙더미를 쌓아 올린 다음날부터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고장 난 차 대신 기차역을 찾은 2인조 일행을 골탕 먹이며 다시 따돌리고, 미인계를 투입하여 유혹한다. 가까스로 일을 다시 시작하여 산이 되려나 하는 순간, 이번에는 마을의 지도자인 82세의 존스 목사가 작업 도중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만다. 해가 지면서 측량은 불가능해지고 조사단은 다음 날 아침이면 떠난다. 과연 주민들의 희망대로 산이 될 수 있을까?


영화는 시종 경쾌하고 유머러스하다. 이야기가 탄탄하고 연기도 좋다. 휴 그랜트의 35살 시절이 훈훈하고 다른 배우들과의 조화도 훌륭하다.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라 그런지 가슴이 따뜻해지고 잔잔한 감동이 느껴진다. 흙더미를 산 정상으로 나르는 주민들의 행렬은 노동이 아니라 마치 혼연일체의 축제 같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현실이 힘들더라도 이렇게 다 같이 축제의 정신으로 희망을 키우는 법이다.      


영화의 매력 중 하나는 웨일스의 아름다운 풍광이다. 


푸른 자연과 부드럽고 완만한 구릉, 넓게 펼쳐진 들판은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다. 그 풍경 어디서나 양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는 광경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우리 제주의 오름과 비슷한 분위기다.


영화를 보고 나면 웨일스의 어느 한적한 시골을 여행한 것 같다. 펍에서 맥주를 한잔하고 오래된 집들 사이로 마을 길을 느릿느릿 걸어보는 느낌이다. 왁자지껄하지만 그곳의 인간미 넘치는 사람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낸 것 같기도 하다. 진정한 여행은 이런 것 아닐까? 이름난 명소나 유적지, 소문난 이벤트를 보는 게 꼭 여행은 아닐 것이다. 비록 영화 속이지만 마음이 통하는 순간의 기분 좋은 느낌이 전해진다.      




웨일스는 영국 본섬의 중서부에 있다. 기사도의 상징인 아서왕의 전설 시대를 구가하였지만, 인구나 영토 규모가 작고 경제력도 약한 편이다. 지금은 영국의 일부로 존재가 희미하고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다. 이른 시기에(1301년) 잉글랜드에 병합되어 정치적 문화적으로 동화된 탓이 크다. 같은 켈트족의 후예인 스코틀랜드와도 비교된다. 스코틀랜드는 훨씬 이후인 1707년까지 잉글랜드에 저항했고, 산업혁명과 금융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북해 유전, 양모와 위스키 산업 등 먹을 것도 많기 때문이다.      


웨일스와 스노도니아 풍경


웨일스는 연안의 평지 외에 해발 고도 200m를 넘는 고지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스노도니아(Snowdonia) 국립공원에는 북부의 스코틀랜드를 제외하고는 영국 본섬에서 가장 높은 산인 스노든 산(1,085m)을 비롯하여 높은 산맥이 형성되어 있다. 산악열차가 유명한데 일대의 경치가 아름답고 볼 것이 많아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진다. 서해안 일대는 기후가 온난해서 살기에도 좋다. 코로나 이후 여행지로 숨겨진 명소, 웨일스를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산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어 누구에게나 친근하다. 가볍게 찾는 동네 뒷산이나 산 자락길부터 어느 정도 장비를 갖춰야 오를 수 있는 높은 봉우리까지 선택지도 다양하다. 산은 평소에 우리가 지상에서 바라보는 대상이지만 언제든 그 안에 우리를 품어주기도 한다. 산의 높이가 산을 평가하는 기준은 아니다. 내 어릴 적 놀던 성산은 146m, 내게는 단 하나의 산이었다. 유년의 놀이터였고 언제나 따뜻한 고향의 품이었다.      


성산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글

https://brunch.co.kr/@sik2038/21


이번 주말에는 어느 산으로 가볼까? 높이와 상관없이 산은 우리에게 늘 친구 같다. 그 산의 매력과 아름다움은 계속될 것이다.



* 산을 정하는 명확하고 통일된 기준은 여전히 없다고 한다. 나라마다 기준이 있고, 국내에도 기관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높이와 경사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전문적인 산의 개념과 관습적 역사적으로 산으로 불리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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