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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 Oct 09. 2017

을의 아우성(2)

갑님에게만 아름다운 세상

집에 와서 3시간을 내리 잤다. ‘따르릉’ 휴대폰 소리에 잠이 깼다. 

하지만 여전히 눈꺼풀이 무거웠다.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다. 

눈을 뜬다면 숨통이 끊길 것 같았다. 


여전히 머리는 돌덩이처럼 무거웠고 전화기까지 손을 뻗는 과정이 부담스러웠다. 

정말 지독한 감기다. 


혹시 몰라 누가 건 전화인지 정도만 알자하는 심정으로 발신번호를 확인했다. 

우리 회사의 돈줄이라고 하는 한 공연기획사 대표의 전화였다. 


분명히 시덥잖은 일로 전화를 한 거겠지만, 

내가 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일개 직원에게조차 대접받지 못했다며 노발대발할 게 분명했다. 

전화를 받는다면, 이 공연기획사 대표의 매우 개인적이고, 그지 같으며 하찮은 민원을 처리하기 위해 동분서주 해야할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마음에 차는 선택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전화를 받기로 했다. 

아픈 건 순간이고 돈벌이는 영원해야 했으므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대표님.”

“그래, 바쁜가보구만. 전화를 늦게 받는 걸 보니.”

이미 마음이 상한 목소리다. 


“전화기를 놓고 화장실 다녀 오는 길이었습니다. 죄송해요.”

있지도 않은 거짓말이 술술 나오고 있다.


“뭐, 그건 됐고.”

엄청 봐주는 말투다.


“우리가 내일 보도자료를 하나 내야 하는데 얼른 하나 써서 보내라고. 음? 여보세요?”

“네. 듣고 있습니다.”

“응. 얼른 보내. 내가 1시간 뒤에 회의에 들어가니까 서둘러.”


골이 지끈 거렸다. 

앞뒤 설명 없이 1시간 내에 내놓으라니, 

마음으로는 네 놈이 한 번 써보라고 쓴 소리를 하고 싶었다. 

현실에서는 맥아리 없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지만.


이제 정신력 싸움이다. 

나는 이 갑님의 갑질에 매우 공손한 말투와 결과물로  반응해야 한다. 

차가운 물을 한 잔 들이켰지만 감기 기운이 무겁게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튼 텔레비전에서는 

한 회사 영업부 사원들의 희망찬가가 흘러 나오고 있다. 

고객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하루 24시간을 침해 당하고도 

내일을 위해 달려나가는 열정적인 사회인들이 수두룩하게 등장했다. 


밥 한 숟가락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여러 대표님, 실장님, 이사님의 전화에 몸살을 앓았다.


“네. 바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한 두 명이 아니라 단체로 구호를 외치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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