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가 쓴 살아남은 자의 슬픔
난 가끔 아끼는 책을 누군가에게 빌려주었다가 찾지 못하고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마음에 책을 다시 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도 그런 케이스 였는데 책은 읽고 싶은데 누구한테 빌려주었는 지 기억도 안나고 문학동네에서 이쁘장한 장정으로 새 판본이 출간되었길래 그냥 사버렸더랬지. 문제는 이전 판본은 표제작을 제외한 나머지는 다른 유럽 작가의 단편을 수록한 작품집이었다면 재판본은 로맹 가리의 작품만 수록된 로맹 가리의 단편선집이었다는 사실. 물론 난 후자가 더 좋았다. (그런데 이전 판본은 대체 어디서 구하나)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책은 또 다시 읽어도 역시 훌륭한 책이었다. 죽음과 같은 시공간의 경계에서 고립의 극한을 상징하는 철새들의 떼죽음과 남자의 이미지를 병치 시키는 절대 걸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이외에도 인간성에 대한 냉소의 극한을 달리는 '어떤 휴머니스트'나 '가짜'와 같은 단편과 일종의 현대성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히는 특이한 SF 소설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있으라'에 이르기 까지...... 그의 단편은 그의 장편과는 또 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다양한 단편 중의 개인적인 압권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잔혹한 교도관에게 학대 당하던 유태인이 세계대전이 끝난 후 볼리비아로 탈출한 그 교도관의 노예 노릇을 한다는 이 충격적인 내용은 읽을 때마다 전율을 돋게 한다. 자신이 가장 증오하고 괴롭히던 존재에게 완전히 굴종하게 되는 폭력의 메커니즘. 과연 세계대전에만 해당 되는 것일까?
이젠 기억도 희미한 군생활 동안 날 모질게 학대하던 고참이 있었다. 정신적,육체적으로 멸시와 고통을 참으며 후임병 생활을 하던 나는 어느날 실수한 후임병들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온 몸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하는 욕이나 말투, 남을 훈계할 때 하는 행동이나 빈정거림들이 모두다 내가 그렇게 증오하던 그 고참의 행동과 판박이 처럼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난 그렇게 미시적인 그 공간의 폭력에 완전히 몸과 마음을 점령당해 버린 것이다.
온갖 수모와 모욕을 당하다가도 그 고참이 인심 쓰는 양 베푸는 작은 친절에 난 쉽사리 마음이 누그러져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 고참은 사실 좋은 사람일꺼야' 하는 비 이성적인 호감이 피어 올랐었다. 난 그렇게 폭력에 허약한 내 자신이 미치도록 싫었다. 그리고 폭력이 폭력을 재 생산하는 그런 시스템에 너무 쉽게 익숙해지는 내 자신이 너무 미웠다.
자신을 고통의 극한까지 내몰았던 나치 장교를 충심을 다해 모시는 그 유태인은 그런 미시적 폭력의 철저한 식민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 하나의 기계가 된다. 폭력을 재생산하는 기계가. 로맹 가리는 이 짧은 단편을 통해서 그 폭력의 영구화를 이렇게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저놈은 일 년여 동안 자넬 매일 같이 고문한 자가 아닌가! 저놈은 자넬 괴롭히고 학대하지 않았나! 그런데 경찰을 부르는 대신 저 작자에게 매일 저녁 먹을 것을 갖다 주다니? 그럴 수가 있나?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희생자의 얼굴에 떠오른 교활한 표정이 뚜렸해졌다. 아득한 과거로부터 들려오는 아주 오래된 목소리가 재봉사의 머리카락을 쭈뼛 곤두서게 했고, 가슴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가 다음번에는 잘해준다고 약속했다네!"
난 아직도 군대가서 '사람'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런 말을 자연스럽게 내 뱉는 사람들도 경멸한다. 폭력에 의해 질서로 편입되고 제도화되는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긍정하는 사회...... 그리고 그러한 수직적 폭력은 가족의 상대적 약자(인 여성 혹은 아이), 직장의 약자(노동자), 이해관계로 얽혀지는 인간 관계에서의 약자들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가해진다. 군대는...... 이러한 합법적 흉기를 생산하는 공간일 따름이다.
전쟁으로 인한 홀로코스트의 현장을 살아 남았던 희생자의 시각으로 그려낸 로맹 가리의 단편들은 이러한 폭력적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을 만나는 우리들에게 치유의 메시지를 던진다. 이 문학이라는 치유의 메시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