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직장인으로 살던 사람과 카페 바리스타로 일하던 사람이 양양에 건물을 짓고 이런저런 사업을 벌린다.
대부분의 반응은 "성공했네"이다.
그들이 말하는 "성공"은 어떤 의미일까?
귀촌에 성공했다는 것일까? 사업에 성공했다는 것일까?부동산에 성공했다는 것일까?
어떤 형태의 성공이든간에 아직 성공이라는 단어는 적합하지 않은것으로 보이는데 대부분 성공했다고 이이야기 한다.
그 의미는 아마 성공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경험에 기반한 표현이리라 생각되는데
어느 방향이든 한 단계 진전이 되었고 그것을 해낸것에 대한 성공이라고 받아들이는 중이다.
2024년, 나는 40의 중반을 향해 가는 나이에 두번째 대학원에 진학했다.
3월이 되어 개강이라는것을 했고 또 다시 공부라는 것을 시작했다.
읽어야 하는 책들이 생겨나고 봐야하는 자료들이 쌓인다.
석사 이후 또 다시 석사를 하는 패기있는 도전은 사실 앞서 말한 "성공"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것에 대한 선택이었다.
서류 제출하고 면접을 볼때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은 아니었는데 지나고 보니 지역에서 살아가기 위한 절박함이 낳은 결과였던것 같다.
주어진 과제를 하나씩 해가며, 한권 두권 읽어가는 책들의 수가 늘어가며 그 책속에 수없이 등장하는 "양양"에 여러번 놀란다.
책 속의 "성공한 양양"은 그들에게 이렇게 회자된다.
1. 민관 협력으로 여름철 레저문화가 활성화 되어 관광객이 늘어났다.
2. 서핑이라는 문화가 자리잡았다.
3. 서핑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 많아졌다.
4. 양양은 인구소멸에 성공적으로 대응했다.
과연 그럴까?
결과만 보면 고개를 끄덕끄덕 할 만한 이야기들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온전히 보고 지낸 사람으로서 무섭게 느껴지는건
"포장되는 과정"에 있다.
지역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떤가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을 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성공"이라는 기준의 잣대가 어디에 있는가가 아닐까 생각된다.
최근 읽었던 몇 권의 책에 언급되는 양양의 이미지를 되새겨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것 같다.
그리고 약간의 반감이 들었던 이유는 밖에서 보는 이미지와 보도자료만으로 추측의 언어가 아닌 확언하는 발언들이 거만하게 느껴져 거부감이 드는 책도 있었다. (이건 아마 자기가 속한 지역에서 자기의 역할에 따라 다르게 보일것같기도 하다.)
지금은 숨어있는 케릭터가 되었지만 오직 서핑하는 관광객이었던 나 역시 2014년~2017년 사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많이 받았다.
조용한 시골마을에 왠 거지들이 나타나서 화장실쓰고 마을을 더럽힌다고 꽤나 눈총을 받았다.
한 마을 해변은 화장실을 여름 성수기에만 열고 해수욕기간이 끝나니 자물쇠로 잠그기도 했고 지금은 서핑하는 해변이 되었지만 서핑을 금지 시킨 해변도 있었다.
물론 모든 서퍼가 젠틀하지 않고 모든 마을이 호의적이지 않은건 비단 서핑신만의 문제는 아닐것이라 생각한다. 농어촌이든 도시재생이든 기존의 주민들과 새로운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다른데 어찌 합심이 될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소소한 이슈들이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와중에 양양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서핑을 하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 기하급수적이라는 말은 겨울철 바다를 보면 더 절감하게 된다.
처음 내가 서핑을 시작했던 시기만 해도 겨울 서핑은 특정 몇몇 스팟에 10명 남짓의 사람들이 있는게 다였고 그 차갑디 차가운 겨울바다에 입수하는 사람들이 대단하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지금은(특히나 코로나시기엔) 겨울 바다에 후드와 장갑으로 무장한 서퍼들이 꽤나 많다. 날이 따듯해 지면 당연히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진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작은 마을 여기저기 서핑숍이 더 생겨나고 유흥문화가 전무한 동네다 보니 여기저기 파티문화가 생겨났다.
바베큐 파티, 펍에서 하는 파티, 버블파티 등등 양양 정확히는 현남면 일대에 파티 문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낮에 하는 서핑이 자연을 통한 즐거움이었다면 여러 형태의 나이트 파티는 해가 지고나면 갈 곳 없는 시골지역에서 찾을수 있는 낭만이었으며 생존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수위는 각자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서핑숍을 운영하는 사람들끼리도 파티를 운영하는것에 대해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 5년 정도는 독특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독특한 동네가 되어가고 있었고 매니아적인 측면이 강한 지역이었다.
여름,가을엔 서핑숍이 활성화되고 겨울, 봄엔 발리,필리핀,스리랑카등으로 서핑트립을 떠나는 사람들이 사는곳, 보헤미안 그 자체인 동네였다.
그러다 어느해인가 서피비치가 코로나 선셋파티를 유치하고 해변에서 파티를 성공적으로 치르게 되면서 "서핑"이라는 문화가 "해변"이라는 문화로 넘어가게 되는 기점이 되었던것 같다.
양양의 서핑하면 떠오르는 죽도 인구 지역을 제치고 서피비치가 떠오른 데에는 서퍼들 보다 서핑이라는 문화를 경험하고자 하는 관광객들을 대규모로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빈 공간(주차, 이동, 활동 등 모든 면의)이 있었고 확장이 가능한 배후지역들이 존재하는 공간적 인프라와 "Surf All Day Party All Night"라는 슬로건에 걸맞는 콘텐츠를 정확하게 짚어낸 그들의 노력과 버텨낸 인고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이야기들 보다 먼저 회자되는 이야기는 민관협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해변문화의 기초는 공유수면에 있다고 봐도 무방한데 서피비치의 성공을 이야기 할때 어김없이 나타나는 "민관협력"이라는 말이 바로 이 부분이다.
공유수면허가를 내어준 양양군이 있었기에 서피비치가 성공했다는 이야기...
물론 당연히 그렇다. 허가를 내어주지 않았다면 그 자리의 서피비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서피비치를 이루는 사람들의 엄청난 노력이 수반되었고 그것이 민관협력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게 못내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들의 성공을 그들의 노력으로 치하해 주는 단어였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이후 2019년 코로나가 터지고 양양의 관광객은 급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프라이빗에 대한 관광객의 수요와 상대적으로 단속이 덜한 환경 그렇게 몇번 뉴스에 오르내리며 양양은 더 "핫플"이 되어갔다.
그렇다면 "서핑이라는 문화가 자리잡았다"는 말은 옳을까?
핫플이 되고 관광객이 늘어났기 때문에 서핑이라는 문화는 자리를 잡은 걸까?
2024년 현재 양양군에서 서핑과 관련된 사업을 한 기록을 찾아보니 아래와 같다.
1. 서프로드조성사업
2. 서프특화지구지정
3. 나는양양의서핑강사다 (서핑강사양성사업)
이런 사업을 통해 양양은 "서프시티 양양" 이라는 이미지로 서핑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서핑과 관계없는 수많은 사업들을 냈다.
당연히 외부에서 봤을땐 서핑서핑 하니까 서핑으로 "성공한"지역 같지만 수치로 본 양양은 모두의 바램대로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지도 엄청나게 많은 청년들이 살고 있지도 않다.
여름철에 기하급수적으로 몰리는 관광객들을 통제할 제도적 장치도, 그들이 지역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조금 더 오래 머물기 위한 관광인프라도 없다.
그리고 그 곳에서 살고자 마음먹었던 사람들 조차도 하나 둘 떠날 준비를 하거나 떠나고 있는 추세다.
빈집을 활용하고 빈 공간을 재생시키라고 하지만 양양은 그런 공간도 별로 없거니와 바다를 쫒아 온 사람들에게 산으로 가라고 하면 옆동네인 주문진이나 속초로 가는게 더 쉬운 선택인 것이다.
통계로 단정짓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가장 정확한 수치이니 통계청의 주민등록 인구 현황을 참조해 보면 어느정도 맞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관광객이 많이온다는 것으로 성공을 논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돈을 많이 벌었고 사세를 확장했다고 해서 성공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단순한 논리로 지역을 판단하고 이야기거리로 오르내리게 하는것이 어쩌면 이 시대의 모든 시나리오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것은 익히 알고 있고 그것을 판단하는것은 개개인의 몫인것도 알고있지만 "지역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해야할 이야기일까?" 싶은 부분들이 아쉽게 느껴진다.
성공이라는 착각, 그리고 벤치마킹이라는 이름 하에 "그렇다"고 정의해버리는 수많은 사례들을 접하며 "좋아하는 것"으로 이주해온 나 역시 어떤 측면의 성공이 필요한건지 고민이 깊어진다.
삶에 가치가 주는 기쁨이 너무나도 큰 나의 라이프 스타일과 결이 다른 사람들의 주장에 흔들리지 않고 깊이 바라보고 천천히 그리고 느슨한 연결속에 양양에서의 삶이 지속되기를 바라며 나 스스로가 성공이라는 착각속에 빠지지 않고 나와 같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신중히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