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의 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몸살과 우엉차

by 아멜리 Amelie Feb 28. 2025

핸드폰 알람이 울리기 시작한다. 오른팔을 왼쪽으로 뻗어 창가에 올려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한쪽 눈을 실눈 뜨고 시간을 확인하니 아침 여섯 시 오십 분이다. 해가 바뀌며 해도 부지런해지기로 다짐한 듯, 일곱 시 전인데도 벌써 바깥이 밝다. 어서 거실로 내려가 마른 그릇을 모두 팬트리에 넣고, 아이들 아침을 준비하고, 간식을 싸야 한다. 큰 아이는 두유 한 잔과 딸기 서너 조각, 작은아이는 잘게 썬 두부와 주키니 호박, 소금만 넣어 끓인 국과 귀리밥으로 아침 식사를 한다.


사람마다 태어날 때부터 제각각이니, 아침에 먹고 싶은 음식도 다르다. 한 배에서 나고 자랐다고 해서 싫은 음식을 억지로 먹어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폭력처럼 느껴졌다. 그리하여 각자 먹고 싶은 것을 본인 양껏 먹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침을 먹지 않는 남편과 라떼 한잔이 아침인 나를 포함해 네 식구의 아침 식사를 챙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반면, 각자의 입맛을 맞춘 저녁 식사 준비는 가끔 고단하다. 면보다 밥을 좋아하는 작은아이와 채식주의자 큰아이, 고기가 없으면 섭섭하다는 남편과 토마토 샐러리 스프 한 그릇에 양배추 샐러드만 있으면 되는 내가 둘러앉아 먹는 저녁 테이블은 모자이크 그림 같다.


비슷해 보이지만, 같은 구석이 없기에 각자 자기 접시의 음식을 먹으면서도 자연스레 옆 사람 접시에 눈길이 간다. 남편 접시에 담긴 고기 요리에 호기심이 발동한 작은 아이는 포크로 작은 고기 조각 하나를 찍어 맛을 보고 엄지척을 날리기도 하고, 김가루와 들기름을 곁들인 나의 양배추 샐러드를 맛본 큰아이는 제 그릇에 샐러드를 옮겨 담아 배불리 먹기도 한다. 오늘의 입맛이 영원할 거란 보장은 없다. 때로는 내가 선택한 음식보다 남의 접시에 더 끌리기도 하고, 심지어 어제까지 좋아하던 음식이 갑자기 싫어지는 날도 찾아온다.


작은 아이가 좋아하는 미역국을 어제저녁에 끓여 뒀고, 큰아이가 즐겨 찾는 딸기도 미리 씻어 뒀기에 내려가서 전자레인지에 미역국을 1분 돌리고, 딸기를 한입 크기에 맞게 썰기만 하면 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뒷머리에 아령이라도 하나 달아 놓은 듯 머리가 묵직하고, 두 다리와 몸통을 누군가 땅 아래에서 끌어당기듯 무겁다. 밤새 기침을 해댔고 마침내 몸살이 찾아왔다. 이주 내내 아프다가 이제서야 말끔히 다 나은 작은 아이가 나에게 선물한 바이러스가 내 몸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나 보다. 옆에 누운 남편을 깨우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오른손으로 남편을 흔들어 깨우고는 왓츠앱으로 문자를 보냈다.


‘몸살에 걸린 것 같아. 애들 깨워서 학교 좀 보내줘. 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어.’


문자를 보내느라 잠깐 핸드폰을 들고 있었을 뿐인데 10킬로그램 아령이라도 들었던 것처럼 팔이 욱신거린다. 핸드폰을 베개 뒤에 쑤셔 넣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고쳐 누웠다.


아이들과 남편이 차례로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는 소리가 들리고, 우당탕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소리가 들리고, 알아들을 수 없지만 경쾌한 말소리가 들리고, 거실 문을 열고, 닫고, 대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리고, 곧 육중한 자동차가 끼익 소리가 나더니 이어 멈추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다시 집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난다. 남편이 재택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인지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며 설거지한다.


아이들이 집을 빠져나가면 고요함이 먼지처럼 바닥에 차곡차곡 쌓이는 게 느껴지는데, 침대에 누워있으니, 적막감이 나를 압도해 왔다. 적막을 거위털 이불 삼아 다시 잠을 청했다. 이제 몸살과의 전쟁만 남았다.


해가 짧은 미국 동부에서 조금이라도 밝게 지내기 위해, 나는 늘 테이블 위에 해를 닮은 노란 국화를 둔다. 해를 집으로 초대하는 마음으로.


허리가 아파 잠에서 깼다. 서울에서 직장을 잡고 자취를 시작했을 때는 주중에 야근 하느라 주말에 잠을 몰아 잤다. 열 시간씩 자고 일어나면 퉁퉁 부은 얼굴마저 이쁘게 보일 정도로 행복했다. 그땐 아무리 오래 자도 허리가 아프지 않았는데, 이제는 조금만 오래 누워 있어도 허리가 아파 일어나게 된다. 배꼽시계보다 더 정확한 게 허리 시계다.


남편은 점심으로 뭘 먹고 싶으냐고 물어보는데 먹고 싶은 음식이 하나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요즘 인기 다이어트 방법으로 떠오르는 간헐적 단식에 대해 찾아보다 최근 ‘오토파지’라는 개념을 알게 됐다. 단식 시간이 24시간을 넘어가면 몸속에 있는 젊고 건강한 세포가 늙고 병든 세포를 잡아먹는다고 했던가. 굳이 내가 음식을 찾아 먹지 않아도 세포가 알아서 챙겨 먹을 거라 믿고 누워 있기로 했다.


남편이 본인 점심으로 얼큰한 국물을 끓였는지 온 집에 고춧가루의 매콤한 냄새가 둥둥 떠다닌다. 나의 후각은 매콤한 자극에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식욕 자극으로 자연스러운 연결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다들 아플 때 생각난다는 소울푸드라는 것이 있다는데, 내 소울푸드가 뭔지 떠오르지 않는다. 오늘처럼 끙끙 앓았던 때를 떠올리고, 그때 먹었던 음식도 떠올려보려 애쓴다. 창밖에 바람 따라 흔들리는 앙상한 나뭇가지가 나에게 최면이라도 거는 듯하고, 거위털 이불은 더없이 포근하고, 세포들은 ‘오토파지’를 하며 든든히 챙겨 먹기에 안심이 되고, 나는 기억 속을 헤매다 잠시 몸살의 고통을 잊어 본다.


침대에 누워 창 너머 앙상한 나뭇가지와 겨울 하늘을 벗 삼아 끙끙 앓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마치 생각 속을 여행하는 듯하다.


살아오며 몸이 아팠던 수많은 날과 밤이 눈 앞에 펼쳐졌다. 작은아이를 낳고 일 년 후 젖을 끊을 무렵 심한 젖몸살을 앓았다. 이 정도 고통이면 유방 하나를 제거하는 것 따위는 일도 아니겠다는 생각이 통증이 잦아들 때까지 쉬 가시지 않았다.


아이 둘을 낳을 때 고통은 어떤 고통과 비교할 수 있을까? 산고와 아이를 만나는 기쁨을 맞바꾼 탓에 출산의 고통이 어느 수준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자궁을 진원지로, 온몸으로 끊임없이 퍼져 흐르던 고통의 파도는 고3때 운동장에서 친구와 분신사바를 하며 그렸던 원처럼, 그 고통은 줄어들 기색 없이 끝없는 파장으로 이어졌다. 그 느낌만큼은 또렷이 기억한다.


깜깜한 밤, 벽을 더듬어 화장실을 찾아가다 운동 기구에 걸려 넘어지며 왼발 가운뎃발가락이 부러졌다. 뼈가 부러진 적은 태어나 처음이었는데, 사시나무 떨듯 몸이 떨린다는 말의 의미를 내 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사실 이렇게 나열하는 몸의 아픔보다 더 아픈 건 마음이 아플 때다. 사람 때문에, 세상 때문에, 때로는 스스로 후벼 판 마음 탓에 아팠다. 그렇게 마음이 아프면 온 세상이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색을 뒤집어쓰고 다가온다. 아세톤으로 아무리 지워도 제대로 지워지지 않는 싸구려 매니큐어처럼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우중충한 색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웃지 않아 웃을 일이 없고, 웃을 일 대신 울 일은 많은 날들이 이어지다 보면 이 아픔에 끝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 몰려온다. 끝이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자취방 화장실에 올라오는 곰팡이처럼 뒤덮는다. 락스에 적신 화장지 뭉텅이를 살아 움직이는 곰팡이 위에 붙여 놓고 하룻밤을 자야 하는데, 화장지에 락스를 적실 힘이 없다. 마음이 아프면 몸에 남은 힘을 마음이 야금야금 갉아먹어 남아 있는 힘이 없다.


마음이 아플 땐 깡소주라도 들이켰지만, 몸이 아플 땐 무엇을 먹었는지조차 기억이 없다. 나는 어려서부터 과학적으로 입증된 ‘오토파지’를 행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자꾸만 아까부터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냄새가 있다. 우엉차 냄새다.


이파리 하나 남아 있지 않은 나뭇가지들은 겨울바람 따라 흔들리고, 겨울 햇살은 소국의 작고 노란 얼굴만큼 따스함이 창틀 너머로 스며들고, 어깨까지 야무지게 덮은 거위털 이불 속은 전기장판은 없지만 그런대로 따뜻한데, 나는 ‘우엉 우엉’하다가 ‘으앙으앙’ 울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토요일 저녁과 엄마의 일요일 아침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