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신발 전문가를 꿈꾸다
여행사를 그만 둔 나는 2개의 해외 연수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한 개는 대우세계경영회라는 곳에서 운영하는 GYBM이라는 프로그램이었고, 다른 한 개는 코트라에서 운영하는 코트라 해외 인턴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들은 정부지원사업 중 하나인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법인들이 현지에서 언어 교육과 생활을 책임질 교육 기관을 섭외하고(GYBM 프로그램을 예를 들면 현지 대학교를 교육 기관으로 섭외한다. 나는 하노이 문화 대학이라는 곳에서 언어 교육을 받고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연수생들은 그곳에서 약 6~7개월 동안 언어 교육을 받게 된다. 연수생들은 베트남 체류 생활비는 들지만, 교육비와 기숙사비는 무료다. 교육을 마친 뒤에는, 운영 법인에서 매칭해주는 현지 한국 회사들과 매칭되는 구조였다.
코트라의 해외 인턴 제도는 일자리가 매칭 되지 않았고, 언어 연수보다는 일을 하는 것이 주 목적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GYBM을 가고 싶었다. 또한 GYBM 1기 출신이 본인의 대학교 커뮤니티에 쓴 글이 있었는데, 해외 취업 준비를 하는 동안 그 글의 영향을 많이 받아 나도 그와 같은 프로그램 연수를 하고 싶었던 것도 꽤나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지원하기 몇달 전 열린 GYBM 설명회에 직접 참여하여 경쟁률을 물어보기도 하였는데, 4:1 정도라고 답변을 해주셨다. 이미 몇백대 일의 경쟁률을 뚫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무조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역시나 예상대로 합격하였고, 국내에서 1개월 정도의 연수를 마친 뒤 나는 하노이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게 되었다. 베트남어 능력이 나를 좀 더 희소한 존재로 만들 것이라는 희망에 부푼채로 말이다.
그곳에는 나 외에도 약 100여명의 연수생들과 같이 가게 되었는데, 연수생들마다 가는 목적은 달랐던 것 같다. 동남아 여행을 통해 동남아에서 살게 되면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다는 생각에 베트남 길에 오른이도 있었고, 한국에서 취업을 실패하여 새로운 기회를 얻고자 그곳에 가는 이도 있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정말 베트남에서 사업의 기회를 찾고자 온 이도 있었다.
이렇게 다른 목적을 지닌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다보니, 자신이 처한 처지에 따라 어울리는 그룹도 달라졌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어디나 정치가 존재하기 마련인데, 그 그룹들끼리도 파벌이 갈려 연수생 무리들은 서로 다른 그룹을 까내리기 바빴던 것 같다. 운이 좋게도 나는 마음이 맞는 형과 같은 기숙사를 배정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의 인연으로 나와 그 형은 아직까지도 가장 친한 사이로 지내고 있다.
우리는 약간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었던 것 같다. 굳이 베트남에 와서 한국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베트남 사람과 어울리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마음이 맞았다. 또한 그 형과 나는 한국에서 이미 취업에 성공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대기업에 대한 환상이 없었다. 어차피 둘 다 그걸 겪어본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래서 한국에서 취업을 실패해 마음에 결핍이 있었던 연수생들에 대한 무시가 내면에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과 굳이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나와 형은 그 부분에서 굉장히 Arrogant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런 부분이 오히려 잘 맞았고, 그래서 서로를 인정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형과 나는 베트남에서 현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노력했다. 베트남 친구라면 다 좋았지만, 당연히 베트남 여자친구를 만드는 것이 가장 큰 목표이기도 했다. 원어민 여자친구가 있으면, 언어 실력이 폭발적으로 늘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수 환경 자체는 원어민 친구를 사귀도록 격려하기보다는 공산주의 같은 통제적 환경을 조성하는데 집중했다. 그곳의 흔히 관리자라는 사람들은 80, 90년대에 회사를 다닌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고등학교 3학년을 통제하는 시스템으로 연수생들을 통제하였고, 평일에는 아예 학교 밖으로 나갈 기회 자체를 막아버리고는 했다.
물론 그런 통제는 오히려 연수생들이 어떻게 하면 이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를 역으로 고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무리에는 통제에 순응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고,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그룹과 통제에 순응하려는 이들의 대립이 존재했다. 통제에 순응하는 이들은 그를 통해 흔히 말하는 좋은 회사에 취업하고 싶어하는 이들이었다. 나와 형은 한국에서 이미 남들이 가고 싶은 회사에 들어갔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고 최대한 통제에서 벗어나려 노력했던 것 같다.
그렇게 약 6~7개월 동안의 연수 생활을 마치고 나는 한 신발 공장으로 매칭 되어 가게 되었다. 그 공장은 나이키, 리복, 아디다스 등의 신발 브랜드 제조 2차 벤더였다. 그 공장에서 신발 윗 부분인 갑피와 끈까지 생산을 완료하면, 그 생산품은 1차 벤더사로 들어가 쿠셔닝 등과 결합하여 완제품으로 거듭나게 된다.
내가 신발 공장으로 간 이유는 신발 전문가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부터 농구를 좋아했던 나는 고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농구화를 사면서 신발에 중독이 되었다. 그 당시 슈즈홀릭이라는 사이트에 맨날 드나들며, 농구화에 대한 정보를 섭렵하기도 했다. 특히 나는 쿠셔닝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고등학교 시절 농구를 하며 무릎을 한번 다쳤던 경험 때문이다. 무릎이 한번 나빠지기 시작하니, 쿠셔닝이 안 좋은 신발은 신을 수가 없었다. 그 이후부터 새로운 쿠셔닝 시스템이 나오면, 가게에 가서 한번씩 신어보고 최대한 좋은 쿠셔닝을 가진 신발을 신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적어도 신발을 좋아하니 신발 만드는 공장에 가서 신발 공정의 A부터 Z까지 경험해보면 무언가 나만의 무기가 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첫 주는, 내 인생에서 가장 숨 막히는 일주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