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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아바 Jan 11. 2023

1-2. 이 결혼의 주인공은 신랑입니다

첫 번째 관찰│이상한 결혼 준비

결혼을 생각해본 적 없으니 로망 따위 있을 리 만무. 마지막 퇴사 전 온갖 행사를 기획 및 진행해야 했던 내게 ‘나의 결혼식’은 또 하나의 행사일 뿐이었다. 반면, 남편은 (언제 결혼할지도 모르면서) 이미 상상해둔 결혼식이 있었고, 어떤 업체에 연락하면 되는지 구체적인 정보까지 확보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땡큐! 결혼식을 앞두고 나는 당당히 선언했다.


“이 결혼의 주인공은 신랑입니다.”


예신(=예비신부)으로서 나의 요청 사항은 딱 두 개였다.

하나, 웨딩포토를 찍지 않는다.

둘, 신부대기실에 얌전히 갇혀(?) 있지 않겠다.


핸드폰에 셀카 사진 한 장 없는 나는 웨딩포토가 싫어서 결혼을 포기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꽉 조이는 드레스를 입고, 무거운 메이크업과 헤어를 하고, 스튜디오에서 몇 시간을 웃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그렇다고 요즘 유행하는 셀프 웨딩포토를 찍는다? 그런 건 정말 부지런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위대한 일이었다. 결혼식에 대한 로망이 가득한 예랑(=예비신랑)이에게 첫 번째 요청사항을 조심스레 말했을 때, 그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웨딩포토 안 찍는 사람이 내 이상형이었어요!”


듣도 보도 못한 이상형이었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소개팅을 열심히 하던 시절부터 웨딩포토를 안 찍어도 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함께 일하는 선배들에게 자주 말했단다. 그때마다 선배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런 여자가 어디 있냐? 그래서 네가 결혼을 못 하는 거야.”


그런 여자는 있었고, 그게 마침 나였다. 그렇다면 오케이. 이제 두 번째 요청사항을 말할 차례. 초대받은 결혼식에 갈 때마다 ‘신부대기실’이라는 곳을 찾아 헤매야 했다. 거기에 꽃처럼 앉아 얌전히 웃으며 손님을 맞다가 극적인 순간에 짠 하고 등장하는 신부, 이상했다. 손님들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하고 싶었다. 손 내밀어 악수도 청하고, 하이파이브도 하고, 와주셔서 고맙다고, 민망하지만 이렇게 됐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친하지도 않은 아버지와 걷다가 신랑에게 넘겨지는 대신, 짝꿍의 손을 잡고 처음부터 함께 입장하고 싶었다.


요청사항을 접수한 신랑은 그날부터 혼자서 웨딩플래너를 만났다. 결혼식장은 그가 다니던 교회, 주례는 그 교회의 목사님, 축가는 부목사님 부부가 맡고, 화려한 꽃장식 대신 농장에서 직접 가져온 화분을 교회 앞마당에 깔기로 했다. 식이 끝나면 원하는 손님들이 각자의 집으로 데려가 키울 수 있도록. 일명 ‘웨딩드레스 투어’는 하루로 끝냈다. 세 벌의 드레스를 입어봤고 그중 하나를 곧바로 골랐다. 바라는 게 딱히 없는 이에게 모든 결정은 속전속결이었다.


“그래도 한 번은 신부를 만나야 하지 않을까요?”


플래너의 요청이 있었다고, 딱 한 번만 같이 만나자는 신랑의 말에 정말 딱 한 번만 만났다. 그리고 결혼식 당일, 나는 “신부님, 제발 얌전히 좀 계세요!”라는 이상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아뿔싸! 교회 2층 현관에는 요청한 적 없는 ‘신부 대기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2층에서 얌전히 드레스 자락을 잡고 사뿐사뿐 1층으로 내려오면, 1층에서 기다리던 신랑이 내 손을 잡고 주례 앞으로 이동하는 경로였다. 신랑, 신부 누구도 요청한 적 없는 플래너의 큰 그림이었다. 하지만 나는 얌전한 사람이 아니었다. 손님들이 올 때마다 몸이 먼저 반응했고,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자락을 홱 걷어 올린 채 볼품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1층 계단에서 주례 앞까지 이동하는 내내 “와, 안녕하세요” “어, 오셨네요. 감사합니다” 인사하며 국회의원처럼 입장했다.


주례사가 끝나고 이어진 축가 시간. 부목사님 부부와 교회의 형제자매가 함께 부르는 찬송가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아, 드디어 끝나는구나!’ 안심하려던 찰나, 갑자기 신랑이 마이크를 잡았다. 뭐지, 이 불길한 예감은. 이벤트 같은 거 절대 하지 않기로 분명히 약속했는데.


예감은 적중했다. 갑자기 하객들에게 인사 멘트를 하더니 ‘야곱의 축복’이라는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하는 신랑. ‘어라, 저 자연스러운 율동은 뭐지. 세상에, 관객 호응까지 유도한다고? 어째... 많이 해본 솜씬데?!’ 혼란스러웠다. 얌전한 교회 오빠st이겠거니 생각하고 결혼했는데,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저 프로 가수는 누구지? 목소리가 조용해서 참 좋았는데, 전문 MC 같은 저 멘트와 발성은 또 뭐람? 나비넥타이까지 매고 있으니 꼭 인기 많은 트로트 가수 같잖아? 고음 처리는 또 왜 저렇게 매끄럽고... 대체, 누구냐, 넌.


“신랑이 축가보다 더 노래를 잘하네. 허허.”

“쌤 표정 봐. 너무 웃겨. 큭큭.”


사방에서 관객들의 반응이 터져 나왔다. 내 성격을 아는 친구와 제자 들은 한껏 당황한 내 표정을 보며 배꼽을 잡고 있었다. 내 표정은 아랑곳없이 1절에 간주 멘트, 2절까지 완창하고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신랑의 얼굴이 낯설었다. 아뿔싸, 잊고 있었다. 이 결혼의 주인공은 신랑이었음을.


+

잊을 수 없는 그날의 축가는 친구의 핸드폰에 찍혀 남편에게 전송되었다. 2015년 4월에 촬영된 그 영상을 남편은 요즘도 본다. 아니, 핸드폰 사진첩 속 첫 번째 폴더에 넣어두고 자기 전에 늘 한 번씩 자기 목소리를 듣는다. 자기 노랫소리를 들으면 그렇게나 잠이 잘 온다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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