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아 Sep 23. 2022

글 더 잘 쓰는 건 의미가 없다

콘텐츠 마케터로서는!

콘텐츠 마케터라면 마음속에 소중한 특기 하나씩 품고 있을 거다. 광고 카피를 잘 쓴다거나, 이미지와 영상 편집에 능하다거나. 나는 몇 문단 넘는 긴 글을 읽기 쉽게 쓸 수 있다.


21살 때부터 긴 글을 주기적으로 써왔다. 교지를 만들고, 뜻 맞는 친구들을 모아 웹진을 만들고, 사회생활 시작하고 나서도 매주 한 편씩 에세이를 쓴다. 애초에 글을 쓰며 돈을 벌고 싶어서 콘텐츠 마케터가 된 것이기도 하다. 읽고 쓰는 건 내가 제일 좋아하고 자주 하는 일이니까. 그래서 남몰래 키워온 나의 목표는 ‘이 구역에서 가장 글 잘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 목표에 계속 가까워지는 일을 해 왔다.


다행히 좋은 신호들이 보였다. 회사 블로그에 올린 글이 칭찬을 받기도 하고, 퍼블리에 기고한 다섯 편 글이 모두 인기를 얻기도 했다. 내 글을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다양한 채널로 생겨서 으쓱했다. 이 정도면 내가 글은 잘 쓰는 편이지? 으쓱으쓱.


그런데, 그게 콘텐츠 마케터로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얼마 전, 우리 회사 ED(Experience Design)팀 리더 M님의 인터뷰 콘텐츠를 발행했다. 그때 M님이 하신 말씀에 디자이너가 아닌 나까지 뼈를 맞았다.


"디자인은 ’툴’입니다. 목적지를 향할 때 이동 수단으로 차가 필요하듯이, 저희 디자이너들이 A에서 B로 가기 위해 사용하는 툴이 주로 디자인이에요.

다만, 디자인을 잘하기만 해서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 조금 잔인하게 말하자면, 탁월한 디자인 아웃풋을 내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잘한다’는 건 ‘차가 잘 굴러간다'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차는 잘 굴러가야겠죠.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 <디자인의 경계를 허무는 와이즐리 ED팀> 중


글 쓰는 콘텐츠 마케터에게 ‘글을 잘 쓴다’는 건 당연한 것이다! 직업인으로서 당연한 걸 나의 최고 자랑거리로 삼으면 안 되는 거였다. 글 잘 쓰는 게 전부가 아니어야 한다. 나는 우리 회사의 스토리텔링을 위해 글, 그중에서도 긴 글이라는 도구를 사용할 뿐이다.


사실, 내가 회사에서 콘텐츠를 만들 때 공을 들이는 여러 부분이 어쩌면 가성비 낮은 일이다. 어떤 표현을 쓸까? 어떻게 어미를 바꿔야 우리 회사다운 목소리가 될까? 같은 것들. 아 다르고 어 다른 건 나만 알아보는 것들이다. 물론 그것들이 합쳐져서 전체적인 글의 퀄리티를 좌우하는 거고, 그 퀄리티가 중요한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건 내가 충분히 잘하는 일이라 더 잘하려 안달 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콘텐츠 마케터로 몇 년 일하면서, 글이 기반이 되는 콘텐츠는 거의 다 만들어봤다. 내가 만드는 콘텐츠는 회사의 스토리텔링을 위한 것이라는 목적도 세웠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스토리텔링 콘텐츠는 무엇일까? 나는 그 스토리텔링을 충분히 잘하고 있을까?


내가 요즘 지쳤던 것, 일이 지겨워질 뻔했던 것의 원인을 찾았다. 일을 시작한 지 7년이나 되었는데, 내 일의 본질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부수적인 것들에만 집중해서였다.


이전 <우당탕탕 채용공고 작성 대작전> 글에서도 썼듯, 나는 무난한 글을 빠르게 잘 쓴다. 조금 더 나아가서, 목적을 정의하고 그에 맞는 글 기반의 콘텐츠를 만드는 것까지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더. 콘텐츠의 범위를 한정 짓지 않는 것까지가 나에게 필요한 역량 같다. 더 나아가 우리 회사에 필요하다고 믿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을 설득하는 역량까지 갖출 때가 되었다.


단순히 좋은 글을 작성하는 것을 넘어, 우리 회사에 필요한 콘텐츠를 만들려면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아이디어가 모자란 적은 한 번도 없다. 내 아이디어가 지지를 받고, 나와 우리 팀에게 그 일을 할 시간이 주어지도록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그게 당연하다. 우리의 리소스는 한정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걸 힘들어하는 것 같다. 많은 사람과 부딪힐 생각에 ‘이건 어렵겠지’ 하고 조용히 내려놓은 아이디어 중에 두고두고 멋진 브랜딩에 도움이 될 아이디어가 정말 없었을까?


글을 잘 쓰는 것만으로 내 가치를 높이는 것은 끝났다. 나의 가치는 이제, 우리 회사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그걸 만들어내는 데서 높아질 것이다. 완성물이 꼭 글의 형태가 아니어도 된다. 우리 고객이 제품과 브랜드를 더 사랑하게 하려면 어떤 접점에서 어떤 형태의 콘텐츠가 필요한지, 그리고 그 콘텐츠를 어떤 목적과 기획으로 만들어낼지가 가장 중요하다. 회사의 마케팅과 브랜딩을 위해서는 물론 채용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제 ‘글 잘 쓰는 마케터'가 되는 데 집착하지 말자. ‘필요한 글을 쓰는' 콘텐츠 마케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글은 어차피 계속 쓸 거고. 지금부터 다른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글을 못 쓰게 되지는 않을 거다. 회사 밖에서 나는 여전히 아 다르고 어 다른 데 집중하며 에세이를 쓰겠지만, 회사에서의 나는 콘텐츠로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집중할 거다.


공부할 것들이 쌓였다.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싶은 것들이 생겼다. 으쓱으쓱할 시간이 없다.

아 진짜 좀, 언제쯤 나도 일잘러가 될 수 있을까?



* 제 글을 메일로 편하게 받고 싶으시다면? > https://bit.ly/yoona-work

매거진의 이전글 7년 만에 새로운 도전: 그만두지 않고 계속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