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대한 고민의 결론은 내맘대로 일단 쓰는거다.
소설이라고 써놓은 게 영 맘에 안들어 이런 저런 글쓰기에 대한 책을 보고 있다. 김연수님의 소설가의 일, 글쓰기의 교본이라는 문장강화, 이외수님의 글쓰기 공중부양 등...
글쓰기 책을 여러권 읽어봐도 글 잘 쓰는 비결은 바로 내 방식대로 줄창 쓰는거다.
문장이 너무 길다 혹은 너무 짧다는 지적질에 짧게도 써보고 길게도 써봤다. 허나 길게 늘어지는 게 내 문장의 허점이라면 허점으로 남기고 너무 짧아 거슬린다면 읽는이를 배려하지 않고 느낌가는대로 쓸 것이다. 미숙한 나도 나이고 모자란 나도 나이기에 미숙한대로 표현하다보면 내 진심이 더 잘 전달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전이나 유명소설가들의 문장을 필사하기도 한다지만 난 나의 색이 없어질까봐 시도하지 않았다. 표현하는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글쓰는 이의 진정성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처음 글 쓰려고 소설창작교실을 다니던 스물일곱 때보다 현재의 나는 나이도 더 많이 먹었고 온갖 실패와 좌절을 맛보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 배신과 후회의 나날들을 거쳐 여기까지 왔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괴로워했고 우울했고 슬펐다가 웃었다가 말을 하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왜 괴로운지에 대해 썼고 그들이 배신한 일들을 기록해두었다. 누군가에게 고자질하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누군가가 혼내줬으면 하는 바람에서일까. 써놓고 읽어보면 큰 좌절도 아니고 누군가도 겪었을 법한 일이었다. 내가 겪어서 더 고통스러웠고 내가 당해서 더 분노했고 내가 사랑한 일이라 더 아름다웠다.
내 마음이 기억하고 있는 일들을 이제 하나 둘씩 써내려가려고한다. 내가 겪은 이야기와 다른 이가 들려준 이야기가 내 머릿속에서 가공을 거쳐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처음엔 서투르겠지. 소설가들의 초기작품과 왕성한 집필활동이후의 작품들은 많이 비교된다. 많이 쓰다보면 그만큼 글도 매끄러워지고 읽기 편해질 것이다. 지금 내가 고민하는 것들은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직 내가 쓰려고 했던 감각들을 잊지않고 기억하며 써내려가기만 하면 그뿐인 것이다.
여덟살, 아주 무덥고 후텁지근했던 여름이었다. 마루 끝에 앉아 장바구니를 손에 든 채 장보러 가자던 영미엄마를 기다리던 엄마의 넓은 등과 엉덩이는 지루함 그 자체였다. 지루하다는 말은 내가 받아쓰기 스무번 연습이 끝나 연필 깎는 걸 마칠 때까지 꿈쩍이지 않던 엄마의 펑퍼짐한 엉덩이다.
한줄쓰고 쳐다봐도 엉덩이가 앞에 있었고 열줄이 넘어가도 엉덩이는 그대로였다. 그 지루함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엄마의 팔옆으로 퍼지던 아자랑이도 기억하고 찌렁찌렁 시끄럽게 우는 매미가 아닌 경쾌하게 맴맴 하고 울던 매미소리도 기억한다. 늘 등만 보이며 내 얘기엔 귀 기울이지 않았던 엄마.
내눈과 내귀와 코, 혀가 기억하는 엄마를 그냥 써내려가자. 그러면 좋은 글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