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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Jun 09. 2016

내가 사랑하는, 미운 엄마

에세이

나는 엄마가 싫다.

여섯살 때도 싫었고 중학교 이학년 때도 싫었고 고일때도 싫었다. 자식이 많으면 많은대로 힘드시겠지만 방치하고 알아서 크는거라 생각하는 우리 엄마 얘기 좀 해야겠다.


아버지는 말단 철도공무원.

낮밤 교대근무로 힘들어하셔서 집안일은 늘 엄마 몫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셋집을 보러 다니면 늘 퇴짜맞기 일쑤. 분통터지는 맘으로 엄마는 할아버지한테 논을 팔아달라고 조르셨다. 아버지도 꺾지 못했던 할아버지를 우리 엄마는 며칠만에 땅문서를  받아내 집을 장만하셨다. 셋방에서 나오는 월세와 월급으로 팍팍한 살림을 하시며 위안 삼으셨던 건 공부 잘하는 자식들이었다. 나만 빼고...

자식 네명이 다 공부 잘하면 좋으련만 꼭 밉고 못난 자식은 있는 법.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잘 해 항상 일등을 놓치지 않았던 아홉살 위 큰오빠, 사격선수로 금메달을 따서 자랑거리였던 큰언니, 예민해서 매일 울기만했던 작은언니도 공부를 잘 했다.


두살 차이나는 작은언니는 생일이 빨라 학교를 일찍 들어갔는데 산수도 잘하고 국어도 잘하고 피아노도 잘치고 그림대회에선 상도 타고 글짓기대회에서조차 상을 타왔다.

그들에 비해 나는 말도 잘 못하고 수 세기도 서툴고 가전제품을 건드리기만 하면 망가뜨리는 재주만 있었다.


학교 들어가기 전 여섯살 때였다. 엄마와 여덟살 둘째 언니를 따라 시장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길에서 내가 모르는, 처음 보는 아줌마를 만났다. 그 아줌마는 우리 엄마를 오랜만에 본 건지 반가워했다.


"훈이 엄마. 어디럴 갔다와?"

"장에, 김치 담궈야지"

"얘가 큰 눔이구나"

"아냐. 얘가 둘째 얘가 막내"

"둘째 참 똘똘하게 생겼네."

"우리 둘째는 학교에서 공부럴 잘 해"

"막내도 잘 허겄네"

"얘는 욕심이 없어서 공부럴 못 해"

"둘째가 공부럴 어찌나 잘혀는지..."


엄마가 말하는 공부 잘하는 둘째는 초등학교 이학년이고 나는 여섯 살인데 뭘로 평가해서 내가 못한다는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화였다. 유치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내 또래 아이가 있어서 비교대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내가 공부를 못해야 하는 건지 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를 하지 말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막무가내로 둘째는 잘 하고 나는 못 한다고 말하는 엄마가 밉고 싫었다. 언니가 듣는 칭찬을 나도 꼭 듣고 싶었다.


'초등학교 들어가면 나도 잘 해서 칭찬 들어야지'


그러나 일학년 처음 본 시험에서 80점, 85점이었다. 그 점수로는 부모님의 칭찬은 커녕 관심도 받지 못 할 점수였다. 그러니 여전히 나는 부모님의 관심 밖이었다. 그래도 백점을 향한 나의 노력은 계속되었고 6학년을 졸업할 때는 오십여명 반에서 십등 안에 들어 우등상은 받고 졸업했다. 우등상 받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엄마는 뭐가 바쁜지 오지 않으셨고 큰언니가 와서 상 받는 것도 봐주고 상장과 부상으로 받은 오편을 대신 들어주었다.

'오편이라도 보여드리자'

그러나 나의 오편은 언니의 손에서 흘러내려 진흙탕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떻게 그걸 떨어뜨릴 수가 있을까? 비닐커버는 물걸레로 닦는다쳐도 종이에 묻은 흙탕물은 얼룩이 져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저게 뭐냐고 물어보기만 하시고 내 대답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밥이나 먹자고만 하셨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사는 게 아닌데 김치 길게 찢어 밥에 계속 놓아주셨다.


중학교에 들어가니 또 칭찬받을 기회가 왔다. 반장, 부반장 투표.

공부 잘 하는 아이들만 후보가 될 수 있었다. 모의학력평가등수가 잘 나와서 후보가 되었고 원하던대로 내가 부반장이 되었다. 집에 가서 엄마한테 자랑하려고 가보니 엄마가 기분좋은 표정으로 먼저 말씀하신다.


"언니가 반장됐데"


"난 부반장 됐는데..."


중학생보다는 고등학생이 반장된 게 더 칭찬받을 일인가보다.


'엄마는 언제 나를 칭찬해주실까'


손잡이가 있는 둥그런 뺑빼이를 돌려 학교를 배정받던 시절.

난 복도 없는지 신설중학교, 그것도 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 이십분 걷고 만원버스타고 삼십분 가다가 내리면 사십오도 경사로를 십분 도보로 걸어야 교실이 나오는 중학교를 배정받았다. 초등학교는 집에서 오분거리. 그러다 통학시간이 긴 중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다. 적응이 쉬울리 없지. 게다가 무거운 교과서와 도시락까지 챙겨 교실에 도착하면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그래도 첫 중간고사에서는 반등수가 육등이었다. 기말고사에서는 이십오등. 손을 놔버린 등수다. 집에 가면 숙제만 겨우 해놓고 잠들기 바빴으니 성적이 좋을리 없었다.


하필 기말고사 후 반임원 부모님들이 학교에 오는 행사가 있었다. 담임선생님과 부모님들의 대화시간에 갑자기 등수가 떨어진 내가 거론되었다.

집에 오신 엄마는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엄마가 얼마나 챙피한 줄 알아. 은미는 공부 잘 해서 난리인데 넌 등수가 많이 떨어졌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시는데 얼굴도 못 들고 있었어."


나 때문에 엄마가 창피하단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내가 창피하고 또 창피했다. 그런데 왜 내가 창피하단 말인가. 자식이 어떻게 창피하단말인가.



티비에 우리엄마가 나온다. 드라마에 나오는 고두심이 우리 엄마를 똑 닮았다. 콩나물값이라도 벌려고 여러가지 부업거리에 지치셔도 저렇게 항상 밝은 표정이셨는데...  

교대근무를 마치고 예민해서잠들기 어려운 아버지를 위해 우리들에게 조용하라고 단속하셨다. 위가 안좋은 아버지는 엄마가 끓여주시는 찹쌀밥이 아니면 끼니가 힘드셨다.


이제 나도 부모가 되었다. 여자아이 둘도 힘에 겨워 애들 재워놓고 몰래 울기도 했다. 우리엄마도 그랬을까. 밤에 몰래 우신 건 아닐까.

중학교 가서 비쩍 말랐다고 먹은 보약 덕에 살이 쪄서 엄마를 원망하며 투정부리기도 했다.


어찌보면 작은언니한테 더 마음이 쓰인것이 당연한건지 모른다.  

언니는 손가락 하나가 조금 짧다. 소독시기를 놓쳐 썩어 들어간 손가락 끝을 잘라내야했다. 그 손을 볼 때마다 부모는 얼마나 자책할지 짐작이 간다. 나도 볼 때마다 안타까운데 부모맘은 오죽할까. 언니랑 말싸움하다 질거같으면 '손가락병신'이라며 욕도 서슴지 않았다. 언니가 황당한 표정으로 엄마얼굴을 쳐다보며 "내가 왜 병신이야"라고 물었다. 혼날거라 생각했지만 엄마는 크게 혼내기보다는 언니의 흉을 내가 더 감싸고 덮어줘야한다고 설명해주셨다.


자식들은 항상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한다. 나도 우리엄마가 나를 많이 안아주고 바라봐주고 얘기들어주길 원했다.


고일때 엄마를 위해 준비한 생일선물을 꺼내보지도 않으신 게 속상해 방문 닫고 소리내 운 적도 있다. 늘 그렇게 나는 안 봐주고 언니만 챙겨주고 동네아줌마들한테는 의대 간 오빠자랑에 침이 마를 줄 몰라 하시면서도 내 얘기는 한마디도 안하셨다. 공부도 못하고 잘 하는 게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자식인데 이쁜 구석이 하나도 없을까.


엄마는 늘 밥만 챙겨주셨다.

총각김치, 배추김치, 갓 담은 겉절이에 밥을 두공기나 먹었었는데...

엄마가 담근 전라도식 김치는 점심시간에 펼쳐놓으면 분홍소시지반찬 부럽지않은 인기를 누렸었는데...

엄마, 우리엄마가 담근 배추겉절이에 따끈한 밥이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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