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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듬 Jan 10. 2023

미안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하여

<지금 시작하는 나의 환경수업> 을 읽으며 환경교육 고민하기


1. '미안함'이라는 동력


우리는 인간의 관성을 거스르는 ‘부자연스러운’ 행동이라야 ‘자연친화적’이 되는 역설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실천’에는 따라서 많은 에너지 소모와 스트레스가 따른다. 그 끝에는 도대체 환경을 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회의가 생기기도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행위들이 전부 자연에 해롭게 되는 이 세상이 싫어지기도 한다. 우리가 이 전세계적으로 연결된 착취의 고리 속에 위치하여 살아가는 이상, 우리의 생존 자체는 무수한 폭력과 파괴 위에서 유지되는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뜻하는 이상과 경험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는 결국 지독한 우울감으로 연결되고, 나는 이를 경험할 때마다 환경파괴에 대한 죄책감, 인간종으로 사는 ‘미안함’으로 시작되는 환경운동이 얼마나 유한(지속불가능)한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 모든 짐을 홀로 이고가는 것과 같은 부담감으로 사는 것에 다름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체제전환의 가능성이 매우 미미하고 희박하게 전망되는 상황 가운데서 말이다. 환경운동은 따라서 개인적 실천에 갇힐수록 장기화되기 어려우며, 연결과 연대의 확인을 통해 나의 실천이 위치한 거시적 구조가 포착될 수 있을 때라야 장기전을 위한 동력이 충분히 마련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환경의식의 출발점은 더더욱 공동체 속에서 학습하는 환경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2. 그 놈의 '환경 잔소리'


“저만 지치지 않는다면 저의 환경 잔소리가 아이들에게 단기적인 그리고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거라는 확신. 그리고 그 영향은 분명 긍정적인 것이라는 확신. 이 확신이 저를 환경교육자로 키웠습니다. 제 경험에 따르면 환경 수업은 아이들을 바꾸고 또 교사를 바꿉니다.”


나의 인생은 엄마가 열성적인 환경운동가가 되면서부터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저자가 말하는 ‘환경 잔소리’라는 것이 청소년기 전반에 걸쳐 학습되어 나는 플라스틱을 비롯한 분리수거, 제로웨이스트 등의 쓰레기 문제에 제법 강박적인 사람이 되었다. 나는 엄마의 문제의식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환경보호의식이 일상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제약하는 엄마의 ‘잔소리’가 되었을 때, 나는 급격히 환경의 일상실천 담론에 피로감을 느끼고, 나아가 거부감을 가지게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친환경적 소비에 대한 근래의 인식 고조가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강박적인 환경실천에 지쳐가는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자신에 대한 ‘환경 잔소리’가 도그마화되는 것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를테면 이제는 익히 알려진 사안이지만, 텀블러 사용이 친환경적 실천의 대표 사례가 되며 텀블러 과잉이 역으로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문제 등, 무엇이든 환경을 ‘보호’ 할 수 있는 방법에 있어 절대적인 규칙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예컨대 나는 종종 엄마의 제로웨이스트 상품 소비가 과하다고 지적하는데, 이는 친환경 딱지를 붙이지 않았더라면 사지 않았을 것들을 오히려 제로웨이스트라는 모종의 면죄부로 ‘안심’하고 소비함에 따라 집안에 불필요한 물건들이 쌓여가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었다. 환경문제는 더더욱 모종의 ‘유연함’과 면밀하고 꾸준한 자기성찰이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속적인 엄마의 환경 잔소리에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말, “대체 뭣이 중헌디!”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성찰이 없고서는, 그저 관성적이게 되기 쉽다. 



3. 나도 지구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학교 내로 들어온 환경교육은 환경문제에 대한 공동의 책무감과 실천에 따른 공동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며, 학생들에게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주체적 자각’을 선물한다. 저자는 글 말미에 “나도 지구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학생의 고백을 통해 환경교육이 진정 목적해야할 바에 대해 역설하기도 했다. 

기후변화에 대해 심각하게 이야기하고서 우리가 정말 달라져야 한다는 말을 덧붙이면 어른과 아이의 반응이 극명하게 다르다. (…) 아이들은 확실히 어른들보다 긍정적이다. 그리고 실천해 보는 데 진심을 들인다. (…)그리고 아이들의 반응과 변화는 즉각적이다. (…)또한 아이들은 철저하고 끈질기게 지켜내기도 한다. (…)아이들의 마음은 말랑말랑하다. 어른들보다 수용적이고 긍정적이고 창의적이고 희망적이다. (…)아이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자연을 좋아하고 자연을 위해 기꺼이 행동하려는 용기와 의지가 있다.

어린 아이들은 마음을 먹는데 큰 품이 들지 않는 것 같다. 근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필요성을 느끼는 일을 추진할 때 우리가 부담감을 느끼는 만큼 생각보다 많은 품이 들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지레 겁을 먹는다. 어떤 ‘읏챠-!’하고 몸을 일으키는 커다랗고 힘찬 움직임에 더 많은 준비와 안전에의 확신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나 환경의제에 있어서는 그 문제조차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기 때문에 문제해결은 더더욱 요원하게 느껴진다. 그것이 우리의 문제의식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유예시킨다. 


동해바다 플로깅: 30분만에 가득찬 자루


근래에 동해바다에 가서 처음으로 플로깅을 경험했는데, 쓰레기를 줍는 행위만으로 우리가 일상속에서 얼마나 많은 책임을 손쉽게 방기하고 사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해변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넘쳐나는 풍경은 나로 하여금 인간사회에 대한 환멸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물론 내가 쓰레기를 줍는 입장이었다고 해서 나를 그 인간사회에서 열외로 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쓰레기를 줍는 동안, 다른 것보다도 이것이 진정한 환경교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우리가 남긴 것조차 잘 돌아보지 않는다. 그것에 대한 문제의식은 더더욱 미비하다. 우리는 우리가  X조차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다.


저자는 환경교육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힌다: 

환경교육은 환경운동과는 대상도 목적도 달라야 옳다. 국가나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이며, 각자가 환경에 대한 생각과 감정, 태도를 되돌아보게 하고 변화시키고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 환경 교육이다. 그렇다면 환경과 관계 맺고 있는 ‘나’를 환경교육의 중심축으로 삼는 게 타당하다.


그런 의미에서 환경교육을 할 적에 환경오염에 대한 문제의식 뿐 아니라 나 자신이 쓸모있는 사람, 의미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바로 이 믿음이 인간을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환경교육의 의의는 모든 것이 컨베이어 밸트에 올라선 듯 빠르게 한 방향성을 가지고 흐르는 속에서 주체성을 가지고 버티고 설 수 있는 용기를 제공해준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오염하지 않는 인간’이 되기 위하여 가장 먼저 ‘거절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과 맞닿아 있다. (e.g. 불필요한 플라스틱 제공 거절하기) 세상이 공급해주는 방식대로 내 삶이 조정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기업에게 “노(No!)”라고 할 수 있는 소비자가 되는 것, 그런 주체적인 의식을 기르는 것이 진정 환경교육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환경교육은 관성적인 삶의 흐름에서 잠깐 정지를 외치고 편리하면 만사 오케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인 것이다. 이것이 곧 저자가 이야기한 컨셔스 라이프(conscious life), 즉 환경을 의식하는 삶이 아닐까. 이것은 환경에 ‘미안해 하는’ 삶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이 땅에 사는 의미를 성찰하고, ‘나’를 주체적인 인간, 내가 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때로 그러한 자기성찰이 죄스러운 마음, 미안함으로 이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기도 하지만, 미안함이 우리 실천의 영원한 동력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뭣이 중헌지”를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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