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곡의 중요성

by 낭만피셔

KTX가 어둠을 가르며 북쪽으로 향했다. 차창 밖은 칠흑 같았고 이따금씩 이름 모를 도시의 불빛들이 붉고 흰 점이 되어 번져나갔다. 기차의 일정한 진동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창문에 비친 내 어색한 표정. 그게 보기 싫어서 귀에 이어폰을 꽂앗다. 스포티파이의 플레이리스트는 어떤 맥락도 없이, 알고리즘의 무책임한 선택에 따라서 노래를 재생하고 있었다. 나의 감정과는 전혀 무관한 음악들.


의미 없는 멜로디의 나열 속에서 문둑 익숙한 음이 고막을 통과했다. 우효의 '민들레'였다. 아주 오래전, 기억의 저장소에 깊숙이 밀어 넣어 존재조차 잊고 있던 음악이었다. 하지만 머리가 아닌 신경이 먼저 그 선율의 파동을 기억해냈다. 가사 하나하나에 힘을 뺀 채 툭툭 내뱉는 목소리, 감정의 과잉 없이 사실만을 읊조리는 듯한 화법. 생각해보니 우효의 노래는 놀라울 정도로 그분의 방식을 닮아있었다. 그분의 다정했던 말투와 꾸밈없는 솔직함이 음악 속에 그대로 녹아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기억의 문이 열릴 때마다 조건반사처럼 엄습하던 마음의 통증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거나, 눈물이 쏟아지지도 않았다. 나를 짓누르던 중력이 사라진 것처럼 기억은 기묘할 정도로 가벼웠다. 깃털처럼 허용에 부유하는 듯했다. 통증이 없는 기억.


선율을 따라서 고통의 필터가 제거된 과거의 장면들이 스냅샷처럼 떠올랐다. TV 채널을 두고 사소하게 다투다 나를 흘겨보던 그분의 눈. 짜증 섞인 표정 속에서도 따뜻함이 묻어났던 순간. 소파에 나란히 앉아 각자의 책을 읽었던 주말 오후의 먼지 낀 공기. 햇살이 부유하는 먼지 입자들을 비추던 평화로운 순간. 아무 말이 없어도 서로에게 불편하지 않았던 시간의 밀도. 그것들은 흑백 사진처럼 흐릿했지만, 동시에 지독하게 선명했다.


의도하지 않은 선곡,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화학 반응. 빠르게 어둠을 스쳐 가는 KTX 안에서, 무심한 알고리즘은 우연히 내게 아프지 않은 과거를 선물했다. 차창 밖의 불빛들을 보면서 나는 오랜만에 다정했던 시간의 질감에 대해 생각했다. 이 짧은 평화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순간만큼은 기억 속의 고통에서 벗어나 편하게 숨쉬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작은 단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작은 희망을 품고 나는 계속해서 밤하늘을 달리는 기차 안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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