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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Oct 08. 2019

곰팡이

1984_김소연 시인


 기름 얼룩에 절은 옷가지며 이불들

어먼는 개켰다 폈다만 하였다


풍경이 일그러진 가족사진을 장마
끝에다 널어 놓았다


양지에 앉아서 동생은 젖어 못쓰
게 된 일기장을 태웠다


잘 타지 못하는 젖은 생각들
이 매운 연기를 피워올렸다


하얀 안개 내뿜으며 저편
에서 소독차가 달려왔다


꽁무니에는 아이들이 우르르
따라가고 있었다


휘어지고 모서리가 터진 장롱처럼
나는 골목에 우두커니 세워져 있었다


소각되는 미래가 집집마다

연기로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곰팡이 호흡을 했다
아침도 어두웠다


조그만 비에도

우리는 어지러웠다


물의 발바닥이 밟고 다니는 낮은 위치를
더 낮게 낮추기도 했다


꿈들은 자꾸 누전되었다
고래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는 젖은 꿈을 꾸었다


물이 빠진 자국은

뚜렷한 선을 남겼고


우리는 해매다 마지막이어야 한다고 주문을 외며
해마다 도배지를 발랐다


더 이상은 젖은 꿈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슨 힘일까,


벽지를 들고 곰팡이가 일어서는

지칠 줄 모르는 그 것은


1984년_김소연




그날 소년의 표정이

가슴속에 박혀서 지워지지 않는다


한 줌의 희망도

재로 날아간 하늘의 한 구석


소년의 손비닥만한

꿈도 피할길 없던 곰팡이 폭포가 내리던 밤


지나가던 쥐들이 고양이를 피해

들락날락거리던 소년의 방문 앞


죽음이란 걸 던져 놓고는

한참을 접었다 폈다 했다


어린나이라고 하지만

먼 미래의 마지막에 닿은 듯한 소년의 눈


지금 생각해보면

맑스라도 붙잡고 싶었으리라


그 유명한 신학자가 그랬다지

희망의 신앙이라고.


불가능한 현실을 벗어나라는

허무한 소리처럼 들렸을텐데


소년은 용케도 그 가느다란

의심으로 가득찬 동아줄이라도 잡았다


그 후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기까지


작은 역사의 돌뿌리 하나

근근히 잡고 버터며


쏟아져 내려오는 천장의

습기찬 곰팡이들과 싸우고


저 멀리 지옥에서부터 올라오는

사나그림자들을 잘도 무시하고


서른을 넘었다

여전히 1984년의 곰팡이는


마음 안쪽에 흠벅히 달라붙어

하고 있었다


곰팡이_민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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