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블루라는 말이 무색할만큼 어머니의 코로나 우울증은 좀처럼 가시지를 않았다. 삶에 희망이 마지막잎새에도 없는 듯이 창밖을 바라보시며 화가 나고 때론 가슴이 꺼지는 것 같다고 하시는 어머니의 한숨을 본듯 만듯 한지도 어느새 1개월이 지난 어느저녁. 바쁜 일상속에서 해야할게 너무 많은데 어머니의 한숨은 그것들을 넘어서서 절망에 가까운 듯이 보였다. 하던 일을 접고, 비폭력대화의 방식으로 어머니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엄마 어디가고 싶어?' '아니야 가고 싶은데 없어, 그냥 속이 안 좋아서 그렇지'. '아니야 그러지 말고 한번 말해봐봐, 엄마가 힘들어가하는 걸 보니깐 아들된 도리로 맘이 쉽지 않아서 그래' ' 아니 그럼 너네 학교 한번 가보고도 싶고, 경주 불국사에 한번도 못 가봤는데 혹시 어떠니?'라며 속이야기를 털어 놓으셨다.
아들이 10년 다닌 학교를 어머니는 한번도 가보지 못하셨고 그 흔한 학사모 한번 씌워드리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의 한숨이 나 때문인 것 같고, 지금까지 너무 많은 인생의 무게를 어머니의 어깨에 살짝 옮겨 놓고서 나는 이 세상을 바꾸네 마네 이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작은 것은 언제나 큰 것과 연결되어 있다. 작은세계에서 운동하는 것은 큰 세계에서도 운동한다. 작다고 느끼는 관계는 언제나 큰 세계에서 큰 효과를 발휘한다. 결국은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미래에 가정과 연결되어 있고, 한국의 여러 가족들과 함께 또한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불국사를 가는 길이라서 화엄의 세계가 열린 것인가?ㅎ)
울산공항에 내리자 마자, 바로 앞에 있는 그린카를 빌려서 나이스하게 부모님을 태우려 왔다. 어머니가 아버지께 매일매일 쏟아내는 잔소리는 '빨리빨리, 부지런하게'라서 그런지 최대한 어머니의 마음에 들고자 차량을 대절했다. 꽤나 큰 차를 빌려서 안정감있게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전날 과음을 하셨던 탓인지 아침부터 눈동자에 힘이 없으셨다. 그래서 가는 길에 소고기 국밥을 함께 드시면서 기력을 회복했다. 그래봐야 시각은 9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은근 맛이 괜찮았던 울산공항에서 경주로 가는 길에 있는 토담 국밥집.
1. 석굴암과 불국사
석굴암은 중학교 교과서에서 허구헌날 봤지만 부모님은 마치 sf소설에 나오는 우주선처럼 생각으로는 존재하나 현실에서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미지의 곳이었다. 7킬로미터나 넘는 꾸불꾸불한 길을 달리던 도중에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나무들을 만났다. 어머니의 얼굴에 부처님 같은 환한 미소가 어리고, 세계가 안정된 듯한 느낌이 내면까지 스며들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행복과 추억, 낭만으로 살지 않던가? 아이들에게 항상 새로운 경험을 주기 위해서 멘토링 하면서도 부모님께는 너무 소홀했나라는 생각을 잠시 하면서도 눈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꽃내음과 봄의 잔치가 여간 즐거운게 아니었다.
석굴암 입구에 도착하니 동해바닷가쪽으로 장엄한 광경이 펼쳐졌다. 마치 부처님의 눈빛으로 세상을 헤아릴듯한 미소가 터져 나왔다. 어머니는 우울증이 완전히 가신 상태로 마음의 평안을 찾으신듯했다. 물론 다리는 쑤시고 아프셨지만 시원한 바람과 신선한 공기 그리고 앞에 보이는 세상은 빛나는 일들이 가득한 설레임들의 연속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석굴암으로 향했다. 거의 15분정도는 걸어서 가야하는 거리여서 좋은 운동화를 신고 오지 않으신 어머니는 힘들어하셨다. 물론 아들이 좋은 운동화를 사드렸지만, 어머니는 또 소시적 패션감각이 있으셨기 때문에 굳이 봄바람과 어울리는 단화를 신으셨다. 나의 패션에 대한 애착은 아마도 유전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국사 입구에서 바라보는 동해안은 화엄이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중생을 바라보며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린 역사의 선조들이 생각났다. 물론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사람의 삶 자체에 대해서 배타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서 교회든, 절이든, 이슬람이든 그 분들이 살아온 인생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되고 말이다. 어찌되었든 이런 마인드 덕에 우리집은 항상 어디를 가면 유명한 절을 찾아서 여행하는 관습이 생겼다. 절은 사실 가장 좋은 위치에, 풍수지리상으로도 가장 최적의 장소에 위치하기 때문에 그 곳에 가면 보이는 풍경은 다른 곳에서 보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석굴암을 바라보면서 함께 바라보면서 만들어지던 시기의 정경을 상상햏 보았다. "엄마 벌써 1000년도 넘었는데 저 때는 어떻게 저런 기술을가지고 있었을까?" 이런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다.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사실은 공감의 기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석굴암을 돌아나와서 2km를 나왔더니 차들이 제법 많이 들어섰다. 우리가 도착한게 9시였고, 나온게 10시였는데 석굴암 주차장에 이미 절반이나 차 있었다. 사람들이 가벼운 마음, 그리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석굴암에 도착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꼬불꼬불한 산길을 내려 갔다. 이윽고 불국사에 도착했다. 불국사는 20년전에 만났던 그 모습 그대로 있었다. 역사가 마치 우리의 기억속에 사라졌다가 어느순간 자신이 존재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불국사는 그대로 그렇게 있었다. 대학 1학년 시절 처음으로 밟았던 불국사의 정원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물론, 부모님은 처음으로 방문해보는 길이라서 그러진 낯설고 새로운 느낌으로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하셨다. 모르겠다. 요즘들어서 부모님의 뒷모습이 계속 들어온다. 두분이 걸어가는 시간이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무엇인가 내가 저 두 공간 사이에서 태어났나?라는 생각도 든다. 천년의 고도에서 부모님과 함께 걷는 이 순간, 그 순간 자체로 감사하고 행복했다.
중학교 3학년,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통일신라 시대에 불국을 위한 염원이 대단했으며 사람들은 그 염원을 담아서 탑을 만들고 사찰을 지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중학교 때 이 감흥을 느꼈지만, 부모님은 지금에서야 불국이라는 존재와 함께 인간의 죽음과 삶, 기쁨과 희락에 대해서 느끼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급하게 짜내지 않아도 살아 있는 생각들이 나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어머니는 불국사의 풀내음을 맡으셨고, 아버지는 불구사에 찾아온 사람들의 향기를 맡는듯했다. 인생은 이런식으로 흘러가나 보다 했다. 아들은.
2. 경주 보문단지와 첨성대
경주는 처음 방문해보는 우리 박병희 여사님과 민원기 선생님. 처음으로 경주를 밟아보신다니 경치 좋은 곳으로 안내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첨성대로 가는 길에 아주 예쁜 호수가 있는 보문단지로 향했다. 특히 스타벅스 보문단지 지점에 있는 호수는 마치 그림과 같이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었다. 부모님은 마음이 환해졌다고 하셨다. 투명한 호수에서 비취는 하늘의 모습에 자신들의 영혼을 띄워놓는 것처럼 걸어다니시면서 계속 어딘가를 가리키셨다. 거기에는 무엇인가 있을까? 한참을 걸으면서 부모님과 점심을 먹으로 갔다. 때마침 등장한 오리고기가 기가 막힌 곳이 있었다. 부모님과 가래떡 쪼개며, 오리고기를 즐겼다.
첨성대 첨성대~하시던 부모님 앞에 첨성대는 실망 그 자체였다. 아니 허우벌판에 돌들을 쌓아 올린 탑 한개가 우뚝 서 있는 정도? 대능원이 있기는 했으나 티비에서 보던 그런 장엄하고 무엇인가 역사의 얼이 서려있는 느낌은 아니셨나보다. 지나가다 차에서만 봐도 될 것을?이라고 하시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0평생을 티비로만 봐왔던 첨성대를 보시고는 이제 되었다~라고 하시는 걸 보니. 먼가 안도의 한숨도. 들어가는 길이 너무 막혀서 부모님을 내려드리고 차로 한번퀴를 쉬이~돌고 오니 다시 가자고 하신다. 그냥 동네 앞처럼 휘이~잉 들렀다가 온 첨성대였다.
개인적으로는 고대의 얼이 서려 있는 경주에서 첨성대는 미래를 내다보는 새로운 공간이었으리라. 누구도 알 수 없던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별자리는 우리에게 앞으로의 시간들이 무엇인가 희망을 줄것이라고 생각했지 않았을까? 인생은 현상학적으로 살고, 추억은 해석학적이니 말이다. 날씨 좋은 첨성대의 주변의 경치에, 사람들은 행복감을 느꼈다. 완만한 등성이에서와 연결된 첨성대의 지혜는 왠지 신라가 좋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역사과 기분과 함께 춤추고 있었고 봄의 기운은 어느덧 별자리들을 다른 곳으로 빠르게 옮겨 놓고 있었다. 아~천년의 고도에서 맞이하는 봄이라~.
3. 구룡포와 숙소
이제 숙소로 가야할 차례다. 아침 6시부터 바쁘게 움직여서 불국사도 경주도 막히지 않은 시간에 다녀와서 좋았다. 그러나 운전하면서 뒤를 돌아 보니 부모님은 잠을 못자신게 영 불편하셨는지 골아 떨어지셨다. 생각해보니 나야 이팔청춘을 가까스로 넘었지만 부모님께는 너무 무리한 일정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는 호미곶에 위차한 풀빌라였다.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은 곳이지만 그래도 부모님과 하루밤을 함께 기억하기에는 아주 좋은 장소였다. 가는 길에 물론 동백꽃필무렵의 무대였던 구룡포 일본인 마을이 있었으나 너무 많은 인파가 있어서 그냥 지나쳤다. 그 대신에 구룡포 해수욕장에 잠시 들렸다. 아직 개장을 하지 않아서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푸른 동해안의 시원함이 서려 있었다.
구룡포에서 자주가던 수산횟집을 갔다. 영덕개는 보통 가늘과 살이 쫄깃한데, 양이 적어서 러시아산 대게 한마리와 조가비와 회를 사서 숙소로 들고 들어왔다. 편안한 마음과 평안한 마음이 아버지께는 소주 한잔과 인생의 기쁨을 만끽하는 시간이셨나보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숙소에서 저녁내내 떠들과 tv보며, 수다 떠며 재잘재잘 잘 놀았다. 벌써 얼굴에 주름의 흔적들이 있을 나이에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생글생글하는 아들을 보며 어머니는 '에효~아직도 어린애 같은데~'하시는 것 같았다. 다른 곳에서는 어른흉내를 다양한 목소리와 무난한 표정으로 짓고 있지만 부모님 앞에서는 그런것 하나 없이 순수한 모습으로 서니, 어린아이와 같으셨나보다.
숙소사진을 직접찍은 것은 아니지만 풀빌라로 멀리 바다가 보이는 안정적인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해가지고 해가 뜨고. 비록 구룡포의 선셋을 맞이하지는 않았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넘실대는 바다 위에 한참이나 높이 햇갈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느새 어머니는 방을 정리하시고 갈 채비를 하고 앉아 계셨다.
4. 호미곶과 독수리 바위
석굴암과 구룡표를 다녀오는 것이 이번 여행의 목표였다. 경상도를 처음 오시는 부모님께, 그래도 포항하면 생각나는 것들, 경주하면 떠오른 곳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2일째 아침일찍 숙소를 나서서 해가 벌써 중천에 떠 있는 새천년 광장으로 갔다. 호미곶은 대한민국의 가장 동쪽이다. 도착하자마자 상생의 손이 태양을 받히고 있었다. 새천년 광장에도 상생이 손이 있었다. 우리는 양쪽을 번갈아가면서 돌아보았다. 개인적으로 20년전에 처음 경상도, 포항, 호미곶에 왔을 때가 생각났다. 벌써 세월은 나를 여기로 데리고 왔다보다 하고 돌아보는 순간 어머니 아버지의 두 눈에 깊게 파인 세월의 흔적을 발견했다. 젊음을 전해주고 어머니 아버지는 점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었고, 나도 누구가에게는 젊음을 전해주고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구룡포에서와는 조금 다른 물살의 깊이를 경험하고 여기저기서 돌아다니는 물고기들을 살펴보느라 어머니는 정신이 없으셨다. 어린시절 전라도 해남의 땅끝마을 해창에서 물고기 잡으며, 밭 갈며 자라셨던 어머니는 항상 자연에서도 바다에 대한 관심이 많으셨다. 어디가나 물고기가 있는지 없는지, 있으면 어떻게 생겼는지를 살펴보셨다. 어김없이 여기 포항에서도 구룡표에는 어떤 물고기들이 있는지 살펴보시느라 고개가 빠질 지경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즐거웠다. 아니 즐겁다기보다는 행복했다.
구룡포에는 요즘에 작은 놀이기구?가 생겼는데 바로 깡통열차다. 부모님이안타실줄 알았는데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즐기시는 모습을 보았다. 물론 다 타고나서는 실망하셨지만 말이다. 누구나 동심은 있는 법, 동심으로 돌아가서 즐겁게 쳐다보시는 부모님의 미소에 나도 모르게 아빠미소가 나왔다. 사람은 누구나 어린시절이 있고, 그 시절에 좋은 감정과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면 추억이 되는 법이다. 그리고 개인의 역사는 또 새로운 해석으로 새로운 감정과 정체성을 가지게 만든다. 부모님은 새로운 역사를 쓰시는 중이었다.
5. 포항과 한동대
지나가면서 포항을 다 둘러보고 소개시켜드렸다. 그리고 10년을 다닌 포항 한동대학교에서 모교의 추억을 부여드렸다. 대학졸업도 늦어서 졸업식에 부모님을 모시지도 못했고, 지금도 직장은 언제 잡을꺼냐?라는 농담반 진담반의 핀잔도 죄송할 따름이다. 말로만 들었던 한동대학교를 방문하시고는 "정말 여기는 할게 공부밖에 없겠네~"라고 안심하시는 말을 들으면서, '아 나는 그럼에도 공부는 잘 안했는데'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교정에 오니 봄기운이 아스라이 올라오면서 10년전 함께 거닐던 친구들도 생각나고 새벽마다 기도하던 채플의 정취와 힘들때마다 다녔던 본관 4층의 기도실도 떠올랐다.
6. 문무대왕릉과 주상절리
여행이 막바지에 다다랐다. 우리는 포항을 떠나서 다시 울산으로 내려왔다. 불과 40시간밖에 안되었지만 일주일을 여행한듯 꽉찬 여행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는 길에 한 곳은 더 가고 싶어서 들른 곳이 문무대왕릉이었고, 또한 양산의 주상절리였다. 역시 동해안의 험난한 물속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듯한 주상절리와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문무대왕릉은 어디서나 볼 수 없는 신기한 광경이었다. 긴 여행의 끝에서 마지막까지 역사공부를 하면서 돌아오는 길에 부모님은 어느새 잠이 드셨다.
0. 여행을 마치고
이번여행은 내인생에서 여행열정을 모두 쏟아 넣은 작품이었다. 어머니가 우울증에 걸릴 것 같다고 들었던 3일전부터 밤새 일정을 짜고 맛집을 찾고 비행기를 예매하고, 울산공항에 도착해서는 운전하면서 미스터트롯을 틀어 드리면서 열심히 달렸던 민기사였다. 맛집투어도 물론 빼 놓을 수 없었다. 포항 물회는 원래 물이 없다. 이럴수가? 바다가 보이는 포항의 어느 횟집에서 바다를 보면서 먹었던 물회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울산공항에 도착하니 나 역시도 기진맥진했다. 밤 늦게서야 집에 도착했지만 그래도 행복한 미소로 꿀잠을 잘 수 있었다. 다음 여행은 부산을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혹은 울릉도를 가볼까? 더 부모님이 나이가 드시기 전에 얼른얼른 다녀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