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프랑스에서 사회학과 철학 및 제15장 심리학과 철학에 대한 논고
에밀브레이어의 '서양철학사' 강독을 수강하고 있다. 지금까지 유럽의 서양철학의 흐름을 살펴보았고, 오늘은 20세기 초 프랑스 지성계가 사회학과 심리학이 철학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학문으로 정립되는 격동의 시기를 살펴본다. 이 시기 학자들은 산업화와 근대화가 야기한 사회적 위기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방법론을 모색했다. 사회학은 에밀 뒤르껭(Émile Durkheim)의 실증주의 학파를 중심으로 학문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한편, 르 플레(Frédéric Le Play)의 사회 개혁적 접근이나 따르드(Gabriel Tarde)의 모방론 같은 다양한 사조들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며 경쟁했다. 이처럼 프랑스 사회학은 꽁뜨와 생시몽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당대의 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실천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동시에, 심리학 역시 테오도르 리보(Théodule Ribot)의 주도 아래 철학의 영역을 벗어나 실험적이고 객관적인 과학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과정에서 삐에롱(Henri Piéron)의 행동주의적 선구적 연구, 삐에르 쟈네(Pierre Janet)의 병리학적 연구, 그리고 알프레드 비네(Alfred Binet)의 지성 측정 연구 등이 활발히 전개되었지. 특히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정신분석학이 프랑스 지성계에 상륙하면서 심리학은 인간 정신의 무의식적 영역까지 탐구하는 폭넓은 학문으로 확장되었다. 이 논고는 죠르쥬 다비가 제시한 사회학의 네 갈래 흐름과 심리학의 주요 사조들을 심도 있게 고찰하여, 당시 프랑스 지성사의 풍부한 지형을 그려보는 데 목적이 있었다. 오늘은 에밀브레이어의 '서양철학사' 제14장 프랑스에서 사회학과 철학 및 제15장 심리학과 철학에 대한 논고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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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뒤르껭(Émile Durkheim, 1858-1917)은 프랑스 사회학의 정점에 서서, 사회 현상에 대한 실증적인 법칙을 발견하는 데 전념했다. 뒤르껭은 인구 증가에 따른 노동분업이나 자살률 같은 현상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사회학을 철학적 사변에서 벗어나 독립된 학문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실증주의적 접근은 과학과 의식(경험론과 상대론) 사이의 적대감을 해소하고,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비인격적이고 절대적인 정의를 요청하는 당시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그의 학문적 동기는 명확하게 위기 상황에 대한 치료제의 탐구에 맞춰져 있었던 것이다.
뒤르껭은 사회 위기의 치료제를 규칙의 진리 증명에서 찾았는데, 이는 프랑스 전통 사상가인 보날(Louis de Bonald)의 원리와도 연결된다고 보았다. 사회 규칙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증명을 통해, 개인은 비로소 사회 질서에 통합되고 도덕적 기준을 확보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단순히 학문적인 것을 넘어, 19세기 말 프랑스가 겪던 정치적·도덕적 혼란에 대한 사회적 처방전의 역할을 수행했다. 뒤르껭의 사상은 위베르(Henri Hubert)와 마르셀 모스(Marcel Mauss) 같은 당대 최고의 지성들에게 계승되어 프랑스 사회학의 주류를 형성했다. 특히 마르셀 모스는 뒤르껭의 조카이자 제자로서, 그의 이론을 확장하고 발전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뽈 포꼬네(Paul Fauconnet), 죠르쥬 다비(Georges Davy), 셀레스땅 부글레(Célestin Bouglé) 등 수많은 학자들이 이 학파에 속하며 뒤르껭의 유산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이들의 활동 덕분에 뒤르껭 학파는 프랑스 대학과 교육 시스템에 깊숙이 뿌리내릴 수 있었다. 뒤르껭이 사회 현상 자체에 집중하고 정신과 지성의 관점(신칸트주의)을 취했다면, 레비브륄(Lucien Lévy-Bruhl)은 심정과 영혼의 관점에서 사회 발생 과정을 탐구했다. 레비브륄은 '열등사회 속에서 정신적 기능'(1910) 등의 저서를 통해 토속인의 원시적 심정성과 정신 구조를 연구하는 데 집중했다. 비록 둘 다 실증적인 접근을 추구했지만, 뒤르껭이 근대 사회의 법칙을 찾았다면 레비브륄은 인류 정신의 근원을 탐색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였던 것이다.
뒤르껭의 '자살론'
뒤르껭은 자살을 개인의 심리적 문제에서 해방시켜 사회학적 연구의 핵심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자살을 개인의 의지나 심리 상태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외재적이고 강제적인 사회적 사실로 정의한다. 이 접근법은 개별적인 자살 행위가 아닌, 특정 사회나 집단의 일정 기간 자살률에 집중하며, 이 자살률의 변동이 바로 해당 사회의 구조적 상태를 반영한다는 논리를 제시한다. 이로써 '자살론'은 사회 현상을 개인의 내면이 아닌 객관적인 집단 환경에서 설명하는 사회학의 기초를 다진 기념비적인 저작이 되었다.
뒤르껭의 연구는 사회가 개인을 얼마나 단단하게 통합(Integration)하고 엄격하게 규제(Regulation)하는지에 따라 자살을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 독창적인 유형론을 제시했다. 사회 통합이 약할 때 발생하는 이기적 자살(Egoistic Suicide)과 너무 강할 때 발생하는 이타적 자살(Altruistic Suicide), 그리고 사회 규제가 약해 규범이 붕괴될 때 발생하는 아노미적 자살(Anomic Suicide)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이 유형론은 자살 현상을 통해 근대 사회의 병리학적 상태, 즉 지나친 개인주의와 급격한 사회 변동으로 인한 규범의 혼란을 진단하는 도구 역할을 수행한다.
뒤르껭은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통계적 비교 연구 방법을 광범위하게 적용하여 사회학 연구의 과학적 엄밀성을 확보했다. 그는 가톨릭 대 개신교, 군인 대 민간인, 기혼 대 미혼 등 다양한 사회 집단의 자살률을 객관적인 통계 자료를 통해 비교 분석했다. 이를 통해 종교, 결혼, 경제 상태 등 사회적 변수와 자살률 사이에 일정한 상관관계가 존재함을 명확히 입증했으며, 이는 사회학이 추상적인 사변이 아닌 객관적인 데이터와 실증적 방법을 통해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독립된 과학임을 보여준 결정적인 선례가 되었다.
마르셀 모스(Marcel Mauss, 1872-1950)의 '증여론'(Essai sur le don)
모스는 증여가 단순히 물건을 주고받는 경제적 행위에 국한되지 않고, 법률적, 종교적, 도덕적, 정치적, 심미적 측면을 총체적으로 포괄하는 현상임을 밝혀낸다. 원시 사회의 선물 교환은 개인 간의 거래가 아니라 집단과 집단, 씨족과 씨족 간의 관계를 맺는 행위였다.
예를 들어, 태평양 북서부 포틀래치(Potlatch)와 멜라네시아의 쿨라(Kula)와 같은 교환 의례는 재산의 이전뿐만 아니라 명예, 지위, 권력의 경쟁과 분배를 동시에 포함했지. 따라서 증여는 그 사회의 모든 제도와 믿음 체계를 응축하여 보여주는 하나의 작은 사회 모델과 같았다.
증여의 핵심은 세 가지 상호 연결된 의무, 즉 줄 의무(Obligation to Give), 받을 의무(Obligation to Receive), 그리고 되갚을 의무(Obligation to Repay)로 구성된 역동적인 순환 체계에 있다. 이 삼중 의무는 증여를 받은 자가 빚을 지게 만들고, 이 빚이 관계를 지속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받지 않거나 되갚지 않는 행위는 관계의 단절이나 적대 행위를 의미했기 때문에, 증여는 자발적인 행위의 형태를 띠면서도 실제로는 사회적 압력에 의해 강제되는 의무였다. 이 순환 고리를 통해 공동체 내의 평화와 결속, 그리고 사회적 위계질서가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다.
모스는 마오리족의 ‘하우(Hau, 사물의 영혼)’ 개념을 분석하여, 되갚을 의무가 발생하는 근원적인 이유를 설명했다. 증여되는 물건은 단순히 물질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증여자(주는 사람)의 정체성이나 영혼의 일부를 담고 있다고 믿어진다.
즉, 선물은 인격의 일부가 되어 받는 사람에게 넘어갔으므로, 받는 사람은 그 ‘하우’가 증여자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보답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느꼈지. 이러한 ‘하우’의 개념은 증여를 순수한 자선 행위나 합리적인 상품 교환과 구분 짓게 하며, 비시장적 논리가 어떻게 사회 관계를 구축하고 지탱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르 플레(Frédéric Le Play, 1806-1882)는 뒤르껭 학파와는 별개로, 사회 문제 해결에 중점을 둔 사회 개혁파의 시조이다. 그는 '유럽민족들과 비교 관찰에서 연역해 본 프랑스에서 사회 개혁'(1864)을 저술하며,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개혁 방안을 제시했어. 그의 접근법은 이론적 논쟁보다는 가족 단위 연구와 실제 생활 조건 관찰에 기반하여 현실 사회를 개선하려는 데 초점을 두었다. 르 플레의 개혁적 정신은 투르빌(Henri de Tourville)과 드몰랑(Edmond Demolins)을 거쳐 뷔로(Paul Bureau)에게로 이어졌다. 뷔로는 '새로운 시대의 도덕위기'(1908)를 통해 근대 사회가 겪는 도덕적 붕괴를 진단하고, 르 플레 학파의 개혁적 윤리관을 다시 한번 강조했어. 이들은 사회의 근본적인 도덕적, 경제적 문제를 개별 단위에서부터 진단하고 치료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에스피나(Alfred Espinas, 1844-1922)는 스펜서(Herbert Spencer)의 영향을 받아 사회를 하나의 생물학적 유기체로 보는 사회유기체설(l'organicisme)의 길을 걸었다. 그는 '동물 사회들'(1877)에서 동물 사회의 협동과 조직화 현상을 관찰하며, 사회가 유기체화되는 다양한 형식들을 탐구했다. 그의 이론은 사회를 단순히 개인들의 합이 아닌, 생명체와 같은 자체적인 생명력을 가진 실체로 이해하려는 시도였다.결론적으로, 프랑스의 실증주의는 뒤르껭의 사회 현상 법칙 발견 외에도, 르 플레의 사회 개혁이나 에스피나의 유기체론과 같이 여러 갈래로 분화되었다. 이러한 다양성은 프랑스 사회학이 단 하나의 교리로 획일화되지 않고, 사회의 여러 측면에 대한 탐구를 허용하며 학문적 풍성함을 더하는 데 기여했다.
르 플레의 사회 개혁
프레데릭 르 플레는 사회 문제를 추상적인 이론이 아닌, 실제 생활에 기반하여 해결하고자 했다. 그는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족을 현장에서 심층적으로 관찰하고 기록하는 모노그라피(Monographie, 단일 주제 심층 연구) 방법을 창시했다.
이 방법론은 노동자 가정의 예산, 도덕성, 노동 조건 등을 상세히 분석하여 빈곤과 사회 불안의 근본 원인을 개인의 도덕적 결함과 가족 구조에서 찾으려 했다. 그의 개혁은 학문적 논쟁이 아닌, 현장 밀착형 실천에 목적을 두었음을 보여준다.
르 플레는 산업화와 혁명으로 붕괴된 사회 질서를 회복하는 열쇠가 도덕적 권위와 안정된 가족 구조에 있다고 믿었다. 그는 개인주의가 팽배한 '불안정한 가족'을 비판하고, 가장의 권위를 중심으로 세대 간의 재산과 규율이 유지되는 전통적인 '권위적 가족(Famille-souche)' 모델로의 복귀를 주장했다.
따라서 그의 사회 개혁은 경제적 평등보다는 노동자들에게 절제와 근면 같은 도덕적 의무를 주입하고, 사회 계층 간의 위계 질서를 확립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르 플레의 개혁은 중앙집권적인 국가 개입을 최소화하고, 지방의 공장주나 권위 있는 지도층이 자발적인 책임을 지고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그는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에 상호 의무(devoirs réciproques)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고용주가 노동자의 복지에 책임지고, 노동자는 고용주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개혁 방식은 법적 강제보다 도덕적 지도와 사회적 책임감을 통해 보수적인 질서를 재건하려는 그의 반(反)중앙집권적 성향을 명확히 보여준다.
에스피나의 사회유기체설
에스피나에게 사회유기체설(l'organicisme)은 단순한 비유가 아닌, 사회가 생물학적 유기체처럼 성장, 분화, 기능을 수행하는 실체라는 관점이다. 그는 허버트 스펜서의 영향을 받아 사회의 각 구성 요소(개인)와 제도(정치, 경제 등)가 유기체의 세포와 기관처럼 전체의 생존과 유지를 위해 특정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에스피나가 '동물 사회들'(1877)에서 동물의 협동과 조직화 현상을 연구한 것은, 이러한 유기체화 작업이 인간 사회 형성의 근원적인 방식임을 입증하려 했던 시도였다.
에스피나는 사회가 정체된 것이 아니라 협력(coopération)을 통해 점진적으로 조직화되어 가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파악한다. 그는 생물학적 진화론의 관점을 사회에 적용하여, 사회가 하등한 형태에서 고등하고 복잡한 형태로 발전하며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스스로를 적응시킨다고 보았다.
따라서 사회의 존재 이유는 이 유기체화 과정을 통해 구성원들의 생존과 복지를 최대한 보장하는 최적의 조직 상태를 달성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유기체설은 기본적으로 개인보다 사회 전체의 생존과 안정을 우선시하는 전체주의적인 경향을 내포한다. 유기체의 각 세포가 전체 생명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개인은 사회라는 거대한 실체의 기능적 부분으로서 존재하며 사회적 목적에 종속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사회의 집단적 권위와 도덕적 결속을 강화하는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개인의 심리적 환원을 거부하고 사회 현상의 자율성을 강조했던 뒤르껭 학파의 사상과도 맥을 같이하는 측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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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드(Gabriel Tarde, 1843-1904)는 뒤르껭과는 대척점에 서서 개인 간의 상호작용과 모방의 현상을 사회적 모든 사실의 근본으로 보았다. 그의 '모방의 법칙들'(1890)은 사회 현상을 개인들의 심리적 메커니즘, 즉 모방의 반복과 확산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또한 그는 범죄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역할을 하며, 범죄 역시 모방을 통해 사회적으로 학습되고 확산된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그의 접근법은 사회 현상을 집단적 구조가 아닌 개인 심리에서 환원하여 설명했다는 점에서 뒤르껭 학파와 첨예하게 대립했다.
따르드는 '사회 논리'(1893), '보편적 대립: 반대들의 이론에 대한 시론'(1895), '사회 법칙들: 사회학 소묘'(1898) 등 활발한 저술 활동을 통해 자신의 모방론을 철학적, 논리적, 사회학적으로 체계화했다. 흥미롭게도 당대의 저명한 철학자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따르드의 사상에 심리학적 관점에서 관심을 표명했다는 사실은, 따르드의 이론이 사회학을 넘어 심리학과 철학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한다. 오도르 리보(Théodule Ribot, 1839-1916)는 심리학이 철학에서 완전히 독립하여 실험 과학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는 사유, 품행(conduites), 행실(comportement) 등을 객관적인 관찰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흐름은 곧 삐에롱(Henri Piéron, 1881-1964)의 행동주의(behaviourism)적 연구로 이어졌다. 삐에롱의 '두뇌와 (1923)'는 미국의 행동주의적 방법론보다 앞서 프랑스에서 독자적으로 이 분야를 개척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삐에롱은 꼴레쥬 드 프랑스 교수로 재직하며 심리학의 과학화를 이끌었는데, 그의 행동주의적 방법은 심리 현상을 관찰 가능하고 측정 가능한 행동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이는 심리학을 철학적 내성(內省)이 아닌, 생리학적 기반 위에서 과학적으로 정립하려는 당시의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가브리엘 따르드(Gabriel Tarde, 1843-1904)모방의 법칙들(Les lois de l’imitation, 1890)
따르드에게 사회적 삶이란 본질적으로 반복(Répétition)과 차이(Opposition)의 상호작용이며, 이 반복의 핵심 기제가 바로 모방이다.
모방은 사회적 사실의 원리이다: 그는 사회적 사실을 뒤르껭처럼 외부적 강제력으로 보지 않고, 개인의 신념(Croyance)과 욕망(Désir)이 다른 개인에게 모방을 통해 전파되고 반복되는 현상으로 정의했다.
전파의 법칙: 모방은 접촉을 통해 전염병처럼 퍼져나가며, 이는 하급 계층이 상급 계층을, 혹은 내부인이 외부인(유행)을 모방하는 방향으로 주로 이루어진다.
창조(Invention)와 반복: 사회는 누군가의 창조(발명)로부터 시작되며, 이 창조는 다른 사람들에게 모방되면서 사회 현상으로 굳어진다. 사회 질서는 이처럼 소수의 창조와 다수의 반복적 모방으로 이루어진다.
모방의 기하학적 법칙: 근접성 및 논리성
모방이 전파되는 방식에는 일정한 패턴과 속도가 존재하며, 이는 두 가지 주요 원리에 따른다.
근접성의 법칙 (시간적, 공간적): 모방은 시간적으로 가까운 것을 공간적으로 가까운 곳에서 먼저 모방하는 경향이 있다. 즉, 새로운 유행이나 관습은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더 빠르게 퍼진다.
논리성의 법칙: 모방은 비논리적 모방에서 논리적 모방으로 진화한다. 처음에는 맹목적으로 따라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방된 행위가 개인의 욕망이나 합리적인 목적에 더 부합할 때만 지속되거나 확산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모방을 받아들일 때 기존의 신념이나 욕망과 모순되지 않는 것을 선택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모방의 쇠퇴 법칙: 모순과 상호 간섭
모든 모방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새로운 창조나 다른 모방과의 충돌을 통해 쇠퇴하거나 변형된다.
모순의 법칙 (논리적 상호 간섭): 사회 내에서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모방(예: 두 가지 종교, 두 가지 유행)이 충돌할 때, 둘 중 하나가 쇠퇴하거나 두 모방이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로 변형된다.
습관의 법칙: 모방된 행위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습관이나 관습으로 굳어지면, 그 모방 행위는 더 이상 의식적인 모방의 대상이 아니게 되고, 사회 구조의 일부로 자리 잡는다.
범죄와 모방: 따르드는 자신의 범죄학 연구를 통해, 범죄 행위 역시 사회적 모방의 산물이며, 범죄자 간의 접촉을 통해 그 수법과 형태가 전파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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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에르 쟈네(Pierre Janet, 1859-1947)는 샬페트리 병원에서의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병리학적 심리학 분야를 선도했다. 그는 심리적 외상과 해리 현상 등을 연구하며, 인간 정신의 무의식적 작동 기제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기여했다. 샤를 블롱델(Charles Blondel, 1876-1939) 역시 '병적인 의식'(1928)을 저술하며 병리적 정신 상태를 '순수 심리학적인 것'의 중요한 영역으로 다루었다. 이들은 병리적 현상을 통해 정상적인 심리 기능의 본질을 역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프랑스 심리학에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 중 하나는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정신분석학의 도입이었다. '정신분석학 시론'(1922)과 '꿈의 해석'(1926)의 프랑스어판 출간은 무의식과 성(性)의 문제를 심리학의 중심 주제로 끌어올렸다. 특히 1910년에 베르그송이 프로이트를 프랑스에 처음 소개했다는 사실은, 프랑스 지성계가 이 새로운 심리학적 혁명에 얼마나 열린 태도를 보였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알프레드 비네(Alfred Binet, 1857-1911)는 '지성의 실험심리학적 연구'(1903)를 통해 실험 심리학의 토대를 다졌으며, 그의 연구는 지능 측정 및 아동 심리학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삐아제(Jean Piaget, 1896-1980)는 '어린이에서 언어와 사유'(1923)를 저술하며 인지 발달 심리학이라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들의 연구는 심리학을 단순한 감정이나 의식의 연구에서 벗어나, 지성과 사고 과정의 객관적 분석으로 확장시켰다. 뷔르루(Albert Burloud, 1888-1954)는 '와트, 메서, 뷜러의 실험적 탐구에 따른 사유'』(1927)에서 게슈탈트 심리학(형태 이론)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는데, 그는 인생의 복잡성은 수학처럼 절반과 전체를 단번에 이해할 수 없다는 비판적 시각을 제시했다. 20세기 초 프랑스에서는 이처럼 스무 가지가 넘는 심리학의 갈래가 공존하며, 인간 정신에 대한 깊고 폭넓은 이해를 위한 다양한 탐구를 벌였던 것이다.
샤를 블롱델(Charles Blondel, 1876-1939) '병적인 의식'(1928)
블롱델은 정신 질환에서 나타나는 병적인 의식 상태를 연구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정상적인 의식이 어떻게 기능하고 통합되는지를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는 의식의 붕괴, 분열, 왜곡 현상을 상세히 분석하여, 정상적인 의식이 통합성과 합리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밝히려 했다. 이처럼 그는 병리학을 "순수 심리학적인 것"을 탐구하는 중요한 영역으로 간주하며, 정신 병리학을 일반 심리학 연구에 통합하는 데 기여했다.
블롱델은 병적인 의식의 발생 원인을 단순한 개인 내부의 심리 문제로 한정하지 않고, 사회적 환경과 집단 심리의 영향을 중요하게 고려했다. 그는 의식의 내용과 형태가 사회적 관계나 뒤르껭 학파의 집단적 표상(Représentations Collectives)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는다고 보았다. 특히 환자들의 의식 속 비합리적인 요소들이 문화적, 사회적 맥락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탐구하며, 심리학적 현상을 분석할 때 사회학적 요소를 필수적으로 통합해야 함을 강조했다.
블롱델은 병적인 의식 상태가 야기하는 도덕적, 윤리적 문제와 판단 능력의 변화에 주목했다. 그는 정신 질환이 단순히 인지 기능의 손상에 그치지 않고, 개인의 감정, 의지, 도덕적 책임감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접근은 그의 연구가 단순한 임상적 진단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의 의식과 도덕적 삶 사이의 연관성을 깊이 있게 성찰하려는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알프레드 비네(Alfred Binet, 1857-1911) '지성의 실험심리학적 연구'(1903)
비네는 지성을 단순한 감각 능력이나 반응 속도로 측정하려 했던 기존의 초기 실험 심리학 방식에서 탈피했다. 그는 지성이란 판단, 추리, 이해, 비판과 같은 여러 고등 정신 기능들이 결합된 복합적인 과정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지능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이 복잡한 과정 전체를 아우르는 과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단순한 요소 측정으로는 지성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는 비네의 철학을 반영한다.
이 연구의 특징은 보편적인 심리 법칙을 찾는 것에 주력했던 당대의 주류 심리학과 달리, 개인 간의 지적 차이를 과학적으로 측정하고 분류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이다. 비네는 다양한 인지 과제를 설계하고 실험을 통해 정상 아동과 지적 결함을 가진 아동 사이의 인지적 수행 능력 차이를 정량화하고자 했다. 이는 심리학의 영역을 철학적 사변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측정과 실험을 통한 응용 과학으로 확장하는 데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
비네의 연구는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을 넘어, 프랑스 교육 현장의 실제적인 필요성에 응답하려는 실용적인 목적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이 연구의 토대는 1904년 프랑스 정부가 특수 교육이 필요한 아동을 식별하기 위해 비네에게 공식적인 도구 개발을 요청했을 때 빛을 발했다. 그는 동료 테오도르 시몽과 함께 최초의 실용적인 지능 검사(Binet-Simon Scale)를 개발하며 정신 연령(Mental Age)이라는 혁신적인 개념을 도입했고, 이로써 지능 검사학(Psychometrics)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창시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장 삐아제(Jean Piaget, 1896-1980)의 '어린이에서 언어와 사유'(1923)
삐아제는 아동의 언어 사용을 관찰하여, 자아 중심적 언어라는 독특한 현상을 발견하고 그 특성을 분석했다. 자아 중심적 언어는 아동이 타인의 관점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독백처럼 발화하는 형태이다. 이 언어는 타인과의 실제적인 소통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아동의 초기 자아 중심적 사유가 언어로 표출된 것이다. 이 연구는 아동이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점차 타인 지향적인 언어로 나아가는 발달 과정을 밝히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삐아제는 언어가 사고의 단순한 거울이 아니며, 사유(인지)의 발달이 언어의 발달을 선행하고 이끈다는 관점을 확립했다. 그는 아동이 경험과 행동을 통해 먼저 인지 구조, 즉 사고의 틀을 형성하고, 언어는 이 이미 형성된 인지 구조를 표현하고 구조화하는 도구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은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관점과 명확히 구분되며, 삐아제 인지 발달 이론의 핵심적인 기반을 제공했다.
이 연구는 궁극적으로 아동이 자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논리적이고 사회화된 사고로 나아가는 전환 과정을 언어적 변화를 통해 분석하는 데 집중했다. 삐아제는 아동이 또래와의 협력이나 논쟁을 통해 자신의 관점과 다른 관점이 존재함을 인지하게 되면서 자아 중심적 언어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규칙과 논리를 따르는 사회화된 언어로 이행한다고 설명했다. '어린이에서 언어와 사유'는 이처럼 아동의 언어 발달을 인지 구조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처음으로 체계화한 선구적인 연구이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사회학과 심리학은 철학의 오랜 그늘에서 벗어나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으로 우뚝 섰다. 사회학에서는 뒤르껭 학파가 실증주의를 통해 사회적 위기의 진단과 치료를 목표로 학계의 주류를 형성하는 한편, 르 플레의 개혁파와 따르드의 모방론이 각자의 관점에서 사회 현상을 해석하며 지적 다양성을 더했다. 심리학 역시 리보의 독립 주장 이후 쟈네의 병리학, 삐에롱의 행동주의, 비네의 실험 심리학, 그리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등 20여 가지의 풍부한 이론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며 인간 정신의 모든 영역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모든 영역으로 정신분석학이 적용된다
이러한 지적 활동들은 단순히 학문 내부의 발전에만 머무르지 않고, 당대 프랑스 사회의 근대화와 도덕적 위기, 그리고 개인의 심리적 문제에 대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해답을 제시하려는 시대적 소명에 응답한 것이었다. 뒤르껭이 사회의 도덕적 통합을, 프로이트가 무의식적 고통의 해방을 추구했듯이, 이 시기의 학문들은 과학적 진리를 통해 사회적 구원과 인간의 이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했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프랑스 지성사는 더욱 풍성해졌으며, 이들이 쌓아 올린 토대는 오늘날 사회 과학과 심리학 연구의 근간이 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20세기 초의 프랑스 사회학과 심리학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다음 시간에는 1930년대 이후의 독일처학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에밀브레이어의 서양철학사가 거의 끝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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