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든 쓰레기, 내가 만드는 우주
가끔 길을 걸을 때, 버스를 타고 갈 때, 시시때때로 지금 이 순간의 현실감각이 무뎌집니다. 문득 내가 생각하는 이곳이 현실이 맞는지 의심스러워요.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올해 조금 극심한 공황발작을 일으킨 후 종종 그런 기분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모두가 연기를 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거나, 나의 자아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만 같은 그런 모호한 기분.
어디 가서 이야기를 꺼내기도 두려운 것이 그렇다면 또다시 누군가 저를 걱정하겠지요. 나의 노멀함, 보통의 존재로서의 확신이 불안과 떨림으로 돌아가게 될까 봐 진지하게 말은 꺼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로 그런 기분, 감정을 느껴요. 뭐 생각해 보면 저의 모든 감정이나 기분을 모두와 나눌 필요는 없겠죠. 이것은 지극히 제 개인적인 상념이니까요.
그래도 좋은 점은 그 기분이나 상념은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인 쪽에 가깝습니다.
예전에 아빠가 하던 말이 생각나요. 인간은 하루에 한 번 살고 죽는다고. 아침이 오면 생이고 밤이 오면 죽음이라고요. 저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에게는 하루만치의 삶이 주어지는 거라고.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남 교수님의 책 제목은 어쩌면 지극히 정답인 삶에 대한 이야기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모든 것을 바꿔버리고 싶다면 정재승 교수님은 큰 사고나 죽음이 닥치면 된다고 하시죠. 많은 동기부여 강연자들이 그렇게 한 목소리로 말하지만 사실 쉽게 마음에 와닿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저 또한 저의 삶을 그냥 방치하며 오랜 시간 살아왔어요. 저의 생은 원룸의 방 한구석에 꼬깃하게 접혀 아무도 펼쳐주지 않고 쓰레기처럼 박혀있었죠. 누군가 그런 저를 보며 혀를 찾지만 그때는 그게 와닿지 않았어요. 그때는 그렇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거든요. 누군가에게 간절한 그 하루를 저는 그렇게 쉽게 내다 버리곤 했습니다.
그렇게 내다 버린 조각난 생들이 쌓여 커다란 쓰레기 장이 되어 저 자신을 짓누르고서야 저는 이 모든 것들을 정리해버리고 싶어 지죠. 저는 그제야 생을 찾습니다. 생이 뭉터기로 붕괴되기 직전에서야 숨을 고르고 삶을 정비합니다.
저는 공황발작을 겪게 되면서 영화 처음 만나는 자유를 종종 떠올립니다. 저는 그 어느 때보다 주인공 수잔나가 된 기분을 느껴요. 그녀의 독백, 그녀의 아픔, 정신병원에서의 경험들이 마치 제가 그 이전에 겪었던 일처럼 아스라이 느껴지곤 합니다.
며칠 전 남편과 함께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는 버스 안. 저는 맨 뒷자리 중앙에 자리합니다. 저는 순간, 그 순간이 굉장히 비현실적이다는 기분을 느껴요. 무언가 알 수 없지만, 조금만 잘하면 다른 세계의 내가 될 것만 같은 그런, 혹은 두 가지의 현실을 동시에 살아가고 있는 그런 기분을요.
그때 저는 남편의 뒤통수를 봅니다. 그리고 강렬하게 이곳이 현실이기를. 이곳에서 살아가게 되기를 기도해요. 제가 믿는 현실은 여기에 있노라고. 그렇게 저는 다시 이 현실을 붙잡는 것입니다. 결국 제가 바라는 삶은 이곳에 있어요. 이 우주에 수많은 파편 속에 제가 살더라도 지금 제가 믿는 현실은 지금의 남편과 함께하는 이곳에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저는 한결 가볍게 다시 이 일상에 만족하고 또 흔들리지 않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꿈을 꽤나 선명하게 꾸는 편입니다. 일전에 썼던 장자의 나비 이야기처럼 저의 꿈은 때때로 너무 생생해서 지금 현실이 오히려 재미가 없다고 느낄 때가 있었어요. 다시 꿈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잠을 청하던 때가 종종 있었지요. 특별히 현생이 힘들어서라기보다는 정말 꿈속이 재미있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꿈을 꾸지 않는 밤을 사랑합니다. 더욱더 현재, 현실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말이죠.
요즘만치 죽음에 대해 편하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 오히려 그 덕분에 저는 생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아이러니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미련 없이 살기 위해 노력해요.
예전에 주워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어요. 노숙자분들이나 나이 드신 분들이 속옷만큼은 정말 깨끗하게 입고 다닌다고. 언제 어느 순간 죽을지 모르니 그 죽음의 순간에 자신을 존중하고 싶은 그 마음을 어찌 모른다 할 수 있겠습니까.
나이가 젊을수록 죽음은 멀리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님의 말을 빌리지만 세상에 살아있는 것 자체가 별로 없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어요. 가끔은 제 스스로도 제 자신이 맞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어요. 수많은 세포들이 그 주인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생각이라는 것은 통속의 뇌처럼 그저 상념 하는 것이 전부일까. 하는 그런 생각들을요.
최근에 저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오펜하이머를 봤습니다. 제가 정말 존경하고 또 좋아하는 감독님이시고요. 저는 특히 그분의 전쟁영화를 좋아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대부분의 장르영화를 좋아하지만 전쟁영화는 좀 어려운 구석이 있어서 잘 즐기지 못해요. 그런 제게 덩케르트는 새로운 전쟁영화로의 초대였습니다.
전쟁을 큰 틀이 아닌 개인의 인간사로 가져왔을 때 전쟁이란 얼마나 인간의 거대한 어리석음인지 우리는 깨닫게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를 보면서 저는 최근 저의 이야기와 비슷하다는 기분을 느꼈어요. 제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라서가 아니라 제가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모습, 그리고 그것을 끊임없이 조롱하는 누군가들에게 증명해야 하는 상황. 꼭 저뿐만이 아니라 저의 부모 혹은 남편이 겪었던 일들도 떠올랐습니다.
제가 두 번째로 정식으로 정신상담을 받을 때 상담사님께서는 저에게 삶의 주인은 나이며 제가 삶을 지탱하는데 도움이 되는 글귀를 항상 잘 보이는 곳에 품으라고 조언해 주셔요. 그것은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답니다.
저는 여러 가지 문구들을 적었고 그중에 하나는 바로 유시민님이 말씀해 주신 "내가 원하는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인물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이념이나 정치 이야기를 넘어 한 개인으로서 존경하시는 분이자 이 글귀가 저에게 주는 강한 힘을 누군가에게 또 나누기 위함입니다. 요즘처럼 누군가를 입에 담는 것이 어려운 시기인 만큼 더욱더 그 말과 책을 쓴 인물들을 또렷이 기억하기 위해 노력해요.
그것은 어쩌면 오펜하이머에서의 법정 증명과정과도 같은 기분입니다. 오펜하이머가 가졌던 최종 목적에 대해 끊임없이 누군가는 오해하고 조롱하지만 아니에요. 그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좁은 시야로 보면 좁게 밖에 보이지 않아요.
최근 읽는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아는 만큼 보인다'처럼 세상은 결국 알고자 하는 자에게만 열린다고 생각해요. 물론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어요. 그 시기는 각자 다르겠지만 우리는 한 곳에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어요. 그렇게 믿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저의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저는 제가 쓴 글들을 다시 꺼내보고 제가 좋아했던 작품, 작가들의 말씀들을 다시 꺼내보겠지요. 그리고 그들의 삶, 여정, 시기에 따른 고뇌와 실수들을 하고 저의 과거도 미래도 짐작해 보고 떠나보내고 하겠지요.
PS
이번 그림에는 오펜하이머의 가장 강렬했던 장면을 추상적이게만 그려 넣었어요. 왜냐면 정말 너무 감동했기 때문이죠. 저는 때때로 눈을 감으면 느껴지는 빛의 파동이나 눈과 바깥사이의 경계를 보려고 애쓸 때가 있었는데 그 장면이 마치 그 순간을 시각적으로 진정하게 보여준 듯한 기분이었거든요.
참 세상엔 멋진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황량한 삶에도 살아갈 이유들이, 온기들이 모이게 되겠지요. 모든 것이 차디차게 느껴지더라도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진리를.. 언제 어느 때라도 잊지 않을 수 있도록 오늘도 기도드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