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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Oct 25. 2024

대수롭지 않게 불면증과 함께하는 일상

수면센터에서의 마지막 상담

 




- 약의 효과가 줄어서 어떨 땐 두 시간도 못 버텨요.

  약의 용량을 여기서 더 늘리는 건 불가능한가요?

- 다른 약으로 해보죠. 지금 복용하고 있는

   약은 긴 시간 각성을 가능하게 하는데, 

   새로 처방할 약은 더 짧은 시간 동안 

   각성할 수 있는 대신 각성의 정도가

   훨씬 강력해요.

- 저한테 지금 문제는 그 각성의 시간이

   짧아져서인데요. 이 약보다 더 짧은 시간

  동안 각성하는 약으로 대체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 그런데 지금 약은 일단 효과가 없는

   거잖아요. 그리고 복용하는 약의 종류가

   많으니까 ㅇㅇㅇ약도 일단 뺄게요.

   오래 먹으면 좋지도 않고.

- 제가 자다가 소리 지르는 건 아직도

   간혹 있어요.

- 어떻게 소리 지르죠?

- 저는 기억이 나지 않아서 다음 날 가족들이

   말해주는데요. 가끔 욕이 섞이기도 하고 큰

   소리로 악몽 꾸듯 소리 지르나 봐요.

   바로 어제도 그랬어요.

- 그럼 ㅇㅇㅇ약을 빼면 안 되겠군요.

   이 약이 꿈을 줄여주는 약이어서.

- 네, 그래서. (말씀드린 겁니다).

- 그래도 많이 나아졌어요. 본인도 느끼죠?

- 네. 그건 확실해요.

- 좋아요. 그럼 일주일치만 처방할게요.

   오늘도 꼭 스스로를 칭찬해 줘요. 알죠?

   완벽주의는 좋지 않아요.  완벽한 건 세상에

   없어요. 다 장단점이 있는 것뿐이라서.

   내가 잘하는 게 있는 거고, 그게 중요하지.

   그리고 내가 이렇게 핸디캡이 있었는데도

   이 정도 한다는 게 대단한 거예요.

   그게 얼마나 힘든 건데. 딴 사람들은 핸디캡

   없어도 적당히 사는 사람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도 환자분은 뭔가 성취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유지를 하고 있고…

   그 외에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게 얼마나 많아요.

- 너무 감사합니다. 


3개월 만의 단약은 실패였다. 뭐 괜찮다. 기존 약은 더 이상 효과가 없어지고, 피로감은 늘었지만 그렇다고 약까지 늘진 않았다. 다행이다. 아직 시도해 볼 새로운 약이 있어서 또, 정말 다행이다. 나는 치료기간을 아주 아주 길게 보기로 했다. 악몽도 수면발작도 이 약의 도움으로 차차 줄어들 수도 있다.



나는 왜 꿈에서까지 불안과 싸우는 걸까.


총알이 난무하는 서바이벌 도중,  중간에 소리를 지르며 깬 적이 있었다. 심장은 미친 듯 뛰고 있었지만 꿈이란 사실을 인지하고는 바로 안도했다. 그래서 이내 다시 잠에 들었다. 그런데 글쎄, 다시 그 격투장 안이네. 그리고는 직전에 나를 공격하려 했던 상대가 따지듯 물었다.


"어디 갔다 이제 와?"


나를 훤히 꿰뚫고 있다는 듯 희번뜩거리며 말하는데, 어찌나 공포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황당하던지. 그렇게 다시 치열히 싸우고 도망 다니며 한 판의 악몽을 끝냈던 밤이 있었다.


나는 무서운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가 주는 긴장감과 카타르시스에는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공포의 원천에 맞닿는 순간 내 정신을 자해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놀랍게도 무서운 영화를 찾아보는 심리 중 하나는 오히려 안도감이라고 한다. '영화'와 '나' 사이에 스크린이라는 큰 벽이 있다는 안도감. 화면 속 유혈이 낭자해도 이는 저 멀리 다른 세계 이야기일 뿐이고, 영화가 끝나면 관객은 다시 자연스레 평범한 현실로 돌아온다는 순리.


문득 내가 꾸는 무수한 악몽들도 이런 역할을 하기 위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이 아무리 암담해도 잔인한 꿈에서 깨고 나면 안도하니까. 그나마 현실이 낫다고 스스로 위로할 수 있으니까.


모르겠다. 만약 그래서 내가 악몽을 꾸고 있다면, 이는 좀 잔인한 처사라고 하늘에 말하고 싶다. 꿈과 현실 한 군데라도 도망칠 곳을 줘야 되지 않나. 그러니까 현실이 마뜩잖으면, 꿈에서라도 숨 쉴 곳을 줘야지. 그곳에선 말도 안 되게 즐거워야지. 이를테면 하늘을 난다던가.


역시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역시, 공포영화가 싫다.


미셸 공드리, <수면의 과학>



설명이 힘들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 상태가 일반적인 궤도에 닿지 못 하자, 괜찮은 척하기에는 큰 노력이 필요하자, 언젠가부터 나는 이런 나를 설명해야 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막막했다. 시작하기 전부터 벅찼다.


나를 설명하는 일.


설명은 병의 명칭, 증상에서 시작해 원인까지 닿았다. 금방 끝날 곧은길이었으면 좋았으련만. 여기도 닿고, 중간에 저기도 들려야 했다. 나의 병의 역사는 구불구불하면서도 구구절절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소회를 밝히니 마음이 훨씬 가볍다. 글이 있어 다행이다. 내가 말하고 내가 듣는 일. 나를 설명함과 동시에 나를 알아가는 일. 이해시키기에 앞서 이해하게 되는 일. 마음을 다잡고 되려 위로받는 일. 글로써 나를 설명하는 일은 참…이토록 개운하다니.


instagram @naoko.machida_art

기록을 마친 자아는 너무나 중독적입니다. 작가님도 저도 그 눈물 나는 순간을 겪었기에 지금도 치욕을 이기고 글을 적어내고 있겠지요. -남궁인




이제 나는 어떻게 될까.


당장의 목적은 자주 웃는 것이다. 내가 웃는 것과 주변을 더 자주 웃게 만드는 것. 그러려면 제정신인 시간을 늘려야 하니, 치료에는 언제나 호의적일 것. 하늘을 틈틈이 볼 것. 또 꾸준히 튼튼할 것이다.


다른 목적은 자주 잊는 것이다. 고칠 수 없는 과거도, 앞으로의 괜한 염려도 잊는 것. 병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잊기 위해 내가 몰두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꾸준히 씩씩할 것. 그렇게 글을 쓸 것. 계속계속 글을 쓸 것이다.


그리고 장기적인 목적은 그냥, 뭐든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것.


그리고 다시. 기면증 치료는 길게 잡기로 했다. 바뀐 약에 내 몸의 반응을 보는 것부터가 또 한 번의 시작인 거겠지. 그래. 15년 동안의 많은 시작에 하나를 더 얹는 것뿐이다. 별거 아니다.


그리고는 또 어떻게 될까. 뇌파검사를 새로 하기로 했으니 치료의 방향이 조금 달라질 수도 있겠다. 아예 또 다른 질병이 추가될 수 있을 거야. 그러면 또 혼란스러워하다, 잠깐 좌절하다, 마음을 다잡겠지. 대수롭지 말자고. 치료를 계속해보자고. 아, 뚱, 멍, 단이되면 안 되니까 다시 내 목적을 되뇌자고.


그리고 얼마 안 지나 언니가 보낸 숏츠를 보고 또 피식 웃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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