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보는 연습
내 인생이 이렇게 흘러가리란 예고였던 걸까? 우습게도 10대 시절, 내 버디버디 아이디는 '졸려잠잘래∾' 였다.
버디아이디
불면증을 겪던 중, 버디버디는 옛 사진첩에 접근을 가능케 하며 재유행의 날개를 펴려 했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잊고 있던 버디 아이디가 떠올랐는데, 그게 바로 ‘졸려 잠잘래∾’였다. 황당하고 신기했다. 중고등학교 때를 돌이켜보면 악몽과 가위눌림은 심했지만 딱히 '불면증으로 괴롭다'라고 느낄 새는 없었으니까.
이게 무슨 모순인가 싶기도 했다. 기왕 미래를 때려 맞출 거면 ‘안졸려죽겠어∾’ 라고 정했어야지. 그게 아닌, ‘졸려잠잘래∾‘ 라고? 하지만 기면증이 밝혀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모순이 아닌 복선이었다.
아이러니
그러나 인생은 모순 투성이다. 복선은 흔치 않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아이러니다. 몇 살이나 먹었다고 이런 소리를 하는지, 나보다 훨씬 어른이 본다면 "그렇게 생각하니? 하지만 아직 멀었단다~"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 깨달아 버렸다. 누군가 말했듯 병은 삶에 제한을 주지만, 그 안에서 최대치를 살게 된다는 것을. 이게 아이러니가 아니면 뭘까.
매일 내가 제대로 깨어 있는 시간은 2-5시간 남짓. 그마저 예측 불가능하고 제비 뽑기와 같은 랜덤. 그러니 나는 이 소박한 시간을 십분 활용해야 한다. 제한된 시간 내 최대치를 살아야 한다. 무엇이 소중한 가치인지 기민하게 알아채야, 하루를 허투루 낭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 생각해 보자. 내게 무엇이 중요할까. 그리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를 정하려면 내가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했다. 나는 특별하지 않은 사람인 대신, 유별난 사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특별하진 않고 유별난
우선, 나는 특별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생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니 헷갈렸을 법도 하다. 하지만 무대에는 제한이 있었고 모든 사람이 주인공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는 조연, 어쩌면 엑스트라 행인 1일 수도 있다. 그러니 어떤 역경에도 불구하고 종국엔 모두 이룰 수 있으리라는 확신은 지나치게 순수했다. 또한 스스로에 대한 과한 기대는 독이었다.
나는 특별하지 않은 대신, 유별나긴 했다. 우선 수면장애 중에서도 확률이 매우 적은 기면증의 증상을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전형적인 패턴은 아니었다. 또 나는 과민했다. 전두엽 기능이 상실된 상태에서 자주 놀랐다. 이에 더해, 생각이 많고 예민했다. 심리학적 용어로 '반추한다'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생각의 물꼬가 끊임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툭하면 마음이 아팠다.
나는 나의 이런 유별남이 싫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이러한 유별남 덕에, 그러니까 과민하고, 생각이 많고, 공감이 과한 덕에, 주변인들의 아픔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었다. 적시에 많은 위로와 사랑을 줄 수 있었다. 유별남은 특이점이 아닌 이점이었다.
스스로가 특별한 줄 알았을 때 나의 장래희망은 거창했다. 부와 명성 모두 가질 거란 욕심, 그리고 이를 이룰 거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하지만 특별하지 않고 유별난 스스로를 깨닫자, 장래희망은 소박해졌다. 귀찮게 찾아오는 사람이 많은 할머니. 그리고 자주 웃는 할머니. 어쩌면 그리 소박하지 않고 더 어려운 꿈일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엉망인 세상. 진정 아끼는 사람과 나누는 다정함으로 그나마 견뎌왔고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까. 노력은 때때로, 그리고 꾸준히 배신당할 것이다. 부조리와 불합리가 난무해 뜻대로 되는 일도 거의 없겠지. 그러면 나는 가족, 혹은 친구들과 같이 ”제길“ 하며 욕하고, 조금 지나 대수롭지 않게 넘길 것이다. 그리고 웃을 거다. 그저 지금처럼 나는 그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 그러면 됐다.
혼자만 하는 농담
글에 대한 내 목표 중 하나는 ‘혼자만 하는 농담이 되지 않겠다.’였다. 글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토록 남을 의식하고, 남에 대한 마음이 지나치다 보면 다시금 인정욕이 솟구친다. 완벽해지고 싶어 진다. 스스로가 정한 '일반적인 형태의 나'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 ‘일반적인 나’는 열정적이고, 부지런하고, 밝고, 적극적이며, 가족에게 헌신한다. 그렇게 살던 때가 있었다. 그날들만 추억하며, ‘지금의 나’가 아닌, ‘그때의 나’만을 진정한 나로 여겼다. 그렇게 인정욕과 완벽주의를 키워왔다. 빨리 아는 편이 나았다. 나는 절대 완벽할 수 없고, 앞으로도 완벽해질 수 없음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알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완벽할 수도 있겠다. 내가 스스로를 인정한다면. 스스로에게만은 언제나 완벽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 인정욕과 완벽주의는 자존심이 아닌 자존감을 키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즘엔 연습 중이다. 이름하여 '한심해 보이기 연습.' 혹은 '한심해도 괜찮은 연습.' '한심하다 소리 10번 듣고 견디는 연습.' 다른 말로 하면, 이는 '제대로 보는 연습'이며 '똑바로 보는 연습'이다. '누가 뭐라든 나는 한심하지 않다는 걸 항상 인지하고 있는 연습'이다.
나는 나를 더 사랑하고 싶다. 타인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도 오롯이 충분하고 싶다. 혼자만 하는 농담에 혼자라도 많이 웃고 싶다.
나는 나랑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
이 깊은 겨울의 한가운데서 나는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는 여름이 내 안에 살아있음을 깨달았다.
- 알베르 카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