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by 선장
주간 <시선> 이번 주제는 '첫사랑' 입니다.
색시에게.
흰색과 남색이 배합된, 세일러복에 플레어스커트가 예뻤던 우리 중학교 교복 기억해? 입다 보니 나름 정들었는데, 그 애를 만났을 때에는 갓 초딩을 졸업한지라 밀리오레에서 산 휘황한 카고 반바지에나 익숙했지, 나풀거리는 치마는 영 어색했어. 그도 그럴 것이 중학교 1학년 때의 난 또래보다 체구가 많이 작았고, 오죽했으면 우리 반 내에서 월경을 아직 시작하지 않은 유일한 두 명의 여자아이 중 하나였지.
그 남자애는 나보다 한 학년 위였지만, 걔 역시도 작은 편이라 그 당시 키가 나랑 비슷했어. 그냥 둘 다 꼬꼬마였어.
처음 마주쳤던 순간은 중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같은 반이었던 영주와 양호실에 간 날.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품이 큰 교복을 입은 그 남자애가 불량함을 부러 전시하려는 듯 양호실 소파에 반쯤 누워 있더라. 소위 노는 무리에 있던 영주가 걔한테 먼저 인사했어.
"안녕하세요!"
중 1이 중2한테 꾸벅, 아주 절도 있고 예의 넘치는 모습!
나보다 키도 훨씬 크고 성숙했던 친구가 짐짓 어른처럼 느껴졌던 순간이었어. 나이가 배로 많은 양호선생님께 인사는 패기 있게 건너뛰던 영주. 딱 봐도 영주보다 훨씬 작은, 귀여운 인상의 남자아이는 선배 역할에 익숙하다는 듯 시크하게 인사를 받아줬지.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꽝스러워서 실소가 나오는데 양호선생님은 오죽했을까 싶다. 하여튼, 친구 때문에 손이 베여 투닥거리고 있던 날 빤히 보더니, 내 명찰을 세 번 정도 큰 소리로 읽는 거야.
“선장? 선장. 선장.”
‘쟤 뭐야?’ 싶었어. 주목받는 게 극도로 불편하고 싫었던 난 당황했고, 옆에 있던 영주도 의아해했지. 그 아이만 선배랍시고 의기양양하고 여유 있는 모습이더라. 중2가 중1과 무슨 큰 차이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거니와 양호실 내 모든 선배들의 갑작스러운 관심도 어색했던 나는 허겁지겁 자리를 떴던 것 같아.
근데 내가 무시하는 그 모습이 오히려 자기 딴엔 재밌었나 봐. 그 아이가 나와 마주칠 때마다 자꾸 내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기 시작한 거야.
"선장 안녕?! 선장!"
저 선배 아냐며, 너한테 갑자기 왜 저러냐며 주변 친구들도 황당해했다니까. 간혹 꾸벅, 하고 어쩔 수 없이 인사를 받아주는 날에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는데 그마저도 질색이었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체셔 고양이 알지? 그 혼자서만 잔뜩 신난 음흉한 미소. 고작 몇 개월 먼저 태어났다고 ‘선배’라는 타이틀을 얻고는 자못 우쭐해하던 모습이 얄밉더라. 애써 찾아와 알짱거리면서 말 걸던 모습도 친구들과 하는 내기나 게임인 것 같아 슬슬 짜증도 났어.
그리고 유독 꺼려졌던 게, 걔는 나름 우리 학교 간판 축구선수로 인기가 꽤 있었거든. 어느 날은 그 아이가 나한테 자꾸 말을 거니까 한 학년 위의 언니가 우리 반으로 날 찾아왔어. 그러더니 걔랑 계속 연락하면 나를 골목으로 끌고 간 뒤 내 명치를 주먹으로 때리겠다는 거야, 글쎄. 그 선배도 물론 중2, 15살. 그래도 그 당시에는 우락부락 아우라 넘치던 '2찐' 선배였어(더 센 '1찐' 여선배는 따로 있었던 거 알지?).
그날 하루 종일 수업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어. 태어나 처음 받아보는 협박! 자칫하다 처음 겪을 폭력! 이러니 그 아이가 나한테 인사할수록 얼마나 불편했겠어.
그렇게 어색함, 찝찝함, 난처함, 그리고 간혹 불쾌함까지. 1년 남짓 내가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느꼈던 감정들은 이 정도가 다였어. 그 범위에서 계속 왔다 갔다 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끝날 줄 알았는데.
왜지? 그날은 급식에 돈가스랑 옥수수 스프라도 나왔었나. 후식으로 먹었던 매점 비스마르크 빵이 유독 맛있었나. 점심 먹고 친구들과 운동장을 돌 때 선선하게 부는 바람이 쾌적했나. 유치하게 나를 소외시키던 같은 반 친구가 그날따라 내게 착하게 굴었던가.
그날 오후 다른 때와 같이 웃으며 인사하던 그 아이의 얼굴을 보는데, 문득 간지러웠어.
여전히 불편했지만 다른 류의 불편함 있지. 마주쳤을 때 얼굴을 찡그리기보단 고개를 돌리게 되고, 발걸음을 떼기보단 발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그런 긴장감. 그 아이 표정이 더 이상 얄밉지 않고 해사하더라.
갑작스레 그렇게 느꼈던 순간 눈에 들어온 그 입꼬리와 눈매가 아직까지 선연해. 그 아이가 매고 다니던 노란색 백팩이 유독 잘 어울린다고 느꼈던 때가 바로 그날이었어. 그 뒤로 쨍한 노란색을 보면 그 아이가 떠오르고, 그 표정이 떠오르고.
그러더니 언제부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을 노란색이라 말하고 있더라고.
14살의 내가 처음 겪었던 간질거리는 마음은 처음에는 불편하다가 조금 지나서 신기하더니, “내가 그 아이를 좋아하는 것 같다”라고 스스로 단정 짓자 마냥 재밌게 느껴졌어. 어른들이 말하는 ‘사랑’이라고 치부했던 것 같아.
그 아이를 생각하며 느끼는 감정을 매일 밤 일기에 썼어. 별 일도 없는데 친구들에게 괜히 상담도 했고. 그 전에는 뭉뚱그려져 있던 마음속의 무언가가 입 밖에 뱉으니 확실시되고, 오히려 배가되는 감정. 그리고 누군가를 동경하는 내 모습이 뭔가 멋지고 어른 같았나 봐. 말 그대로 중2병 말기. 시름시름 앓던 난 러브홀릭의 ‘인형의 꿈’을 일기장에 색연필로 적기에 이르렀지. (맞아 흑역사야...)
왜 좋았을까?
그 친구는 내가 특별하다고 처음으로 느끼게끔 해준 남자아이였던 것 같아. 인기가 많다는데 나에게만 쏟는 친밀감에 괜히 또래 사이에서 우쭐한 기분도 들고.
그렇게 점점 그 아이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갔어. 질릴 때까지 알고 싶은 감당 안 되는 호기심이 처음이었고, 낯설면서도 기분이 좋았어. 이쯤이면 첫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음, 솔직히 모르겠다. 사실 그 아이에 대한 풋풋하고 옅은 마음이 '첫사랑'이라 부를 만큼의 감정인지는 모르겠어. 어쩌면 바로 지난번 연애에 아직도 매여있는 30대의 내 마음이 너무 무거워서, 그런 류의 맹목적이고 질척이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은 회피하고 싶은 건지도 몰라. 30대의 나는 열네 살의 이야기로 도피하고 싶나 봐. '첫사랑.' 말만 들어도 산뜻하고 싱그럽잖아.
그러니까 나는 지금, 설익은 감정들이 그리운 것 같아.
엄마 몰래 가로본능 핸드폰으로 그 아이와 수없이 문자를 하던 그 밤이 떠올라. 다음날 등교를 위해 애써 자려는데, 그 아이 생각에 시계 초침 소리가 거슬려 잠 못 이루던 밤도. 연락이 끊긴 뒤 소식이 궁금해 모르는 선배들의 싸이월드를 파도타기 하던 밤도. 그러다 어떤 예쁜 언니랑 연애하는 걸 알게 돼 억장이 와르르 무너지던 밤 까지도.
오랜만에 이리 오래 그 아이를 회상하다니, 어색하기까지 하네. 오늘은 뒤척이다 걔 꿈 꿀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색시야, 아무래도 비스마르크 영향도 있었겠지? 아니면 역시 옥수수 수프?
영화 추천: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2011>
뻔한 공식을 따를 수 밖에 없는, 다소 오글거리는 '학창시절 첫사랑'을 주제로 한 영화에서 내 마음을 건드리는건 언제나 사소한 디테일이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속 볼펜자국이 여기저기 찍힌 '가진동'의 교복처럼. 신선하지만 있을 법 한 연출은 오글거림을 애틋한 간지러움으로 승화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