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이 중요하다면서 왜 얼굴에 혹할까

[끌림의 조건] by 선장

by 선인장

주간 <시선> 이번 주제는 '끌림의 조건'입니다.




미는 천재성의 한 형태지요. 실제로는 천재성보다 더 지고한 것입니다. 미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요.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중





지금껏 살면서 제일 못생겼을 때를 꼽는다면 아무래도 열일곱 살 즈음.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넘어가던 과도기에 새 교복을 입는다는 설렘이 무색하게도 외모 암흑기가 찾아왔어. 투명도 아닌 번쩍이는 철길 교정기와 입가에 몰린 뾰루지들 덕이 컸지.


비비크림이 보급화되지 않던 시절이라 나는 밀가루 같은 파우더를 얼굴에 찍어 바르고, 교정기를 최대한 가리기 위해 두 눈만 무섭게 웃곤 했어. 추가로 또래 필수템이었던 편의점 발 체리색 니베아 립밤까지. 그렇게 시뻘건 입술, 허옇게 둥둥 뜬 가부키 얼굴로 어정쩡한 사이코패스 미소를 지으면 뭐 좀 나아 보일 줄 알았나 봐.


외모 콤플렉스와 사춘기는 늘 쌍으로 붙어 다닐 수밖에 없는 걸까. 한 군데라도 더 칠하고, 또 가리기 바쁜 내게 혈육이 아무리 자존감을 높여주려 한들 들리지 않았어. 그러니 내게 대뜸 호감을 표현했던 학원 친구의 마음을 못 믿을 수밖에.


처음에는 나를 딱 한 번 봤으면서 호감을 표현하는 그 친구의 마음이 의아하다 못해 의심이 갔어. 언젠가 한 학년 위 남자 선배가 내 얼굴을 보고 “우웩” 하고 지나갈 정도였으니 개연성이 없다 느꼈거든. 그렇다고 나의 성격이나 성품 따위를 간파할 만큼 우리 사이에 충분한 시간이나 교류도 없었어. 사실 지금이라면 그저 기분 좋게, 취향깨나 특이하다 생각하고 넘어갈 텐데. 당시 나는 어찌나 자존감이 바닥인지 얘가 날 놀리는가 싶더라고.


따지듯 물었던 기억이 나.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좋다 그러냐!” 고 했지. 그러자 알이 작은 뿔테 안경과 드문드문 여드름을 가진 커다란 남고생은 “몰라도 좋은데 알면 얼마나 좋겠어?”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더라. 아유 풋풋해.


뭘 그리 구구절절한 이유를 찾아내려 했을까? 때때로 이렇게 한없이 관대한, 섣부른 낙관만으로도 충분한데. 나 역시 한 번 봤음에도 그런 낙관에 기대 누군가를 금세 좋아하곤 했으면서 말야. 어쩌면 10대의 나는 본능적인 이끌림만으로 중요한 결정을 하는 스스로에 은근한 수치심과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래도 다행인건, 그 아이 덕분에 그때쯤부터 조금씩 자기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





다시 말하지만 나도 대부분 첫 만남에 호감도를 결정짓곤 해. 딱 봤을 때 ‘느낌’이 오는 사람. 풀어 말해 외모 외에도 몸짓, 말투, 냄새, 분위기 등의 다양한 힌트들을 일순 습득하고는 상대의 본질까지 닿았다 착각해버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8자 눈썹 덕에 "억울하게 생겼다"는 말을 종종 듣는 나조차도, 그래서 정말 말 그대로 억울한데도 그렇게 되더라. 상대의 인상으로 상대의 내면까지 감히 가늠해버리는 오류를 범해. 단 한 번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일전에 내가 책 선물 받는 걸 좋아한다고 했잖아. 제목을 보면 타자가 보기에 현재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서. 이런 맥락에서 최근 선물 받은 책은 인상 깊었어. 제목이 <내면이 중요하다면서 왜 얼굴에 혹할까> 였거든. 웃프네 하하...


결혼한 친구들은 나만 (여전히)(늘) 싱글인 이유가 오직 ‘얼굴에 혹해서'라고 생각하나 봐. 그래서 정신 차리라고 책을 사준 것 같아. 일단 변호부터 하자면, 나 그렇게까지 ‘얼빠’ 아니야. 누군가에겐 다소 못나 보이더라도 내 취향에 맞으면 그만이거든. 그러니 눈이 높다기보다는... 그래, 조금 까다롭긴 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이성적으로 호감을 느끼는 외모는 늘 어떤 틀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긴 해. ...아, 그럼 결국 얼빠 맞는 건가.


나는 일단 눈매가 선한 인상에게 끌리는데, 소위 말하는 '쎄믈리에' 알지? 관상가도 아니면서 처음 본 사람이 유독 못되게 생기면 "저 사람 인상이 뭔가 쎄-해"라는 류의 말을 남발하는 이들 말야. "왜?"라고 물으면, "아니 그냥 설명할 순 없는데. 어딘가 쎄-해."라고 답하지. 특히 이 쎄믈리에들은 누군가 문제라도 일으키면 그제야 "어쩐지! 저 사람 난 처음부터 싸했어!"라고 뒤늦게 예언가라도 되는 양 굴기도 해. 그런데 그 얼추 비슷한 게 나더라고.


이 사람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까지는 알 턱이 없지만 ‘내가 좋아할 사람’인지의 여부는 정말 빠르게 판단해버려. 그래서 나는 소개팅에서도 두 번째 만남은 거의 하지 않아.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러니까 혼자인 시간이 길어질수록 반성하게 되더라. 섣불리 단정 지어 다른 중요한 가치들을 많이 놓쳤을 게 분명하잖아.


결과론에 기댄 쎄믈리에는 점점 자신의 촉을 신뢰할 수 없게 됐고, 그렇기에 친구가 장난 반 진담 반 선물한 책은 매우 시의적절했어.


나의 영원한 난제 : 내면이 중요하다면서 왜 얼굴에 혹할까.


책장을 펼치기 전에 제목에서부터 혼난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내심 들뜨기도 했어. 책을 보고 나면 선입견에서 비롯된 수많은 오류들과, 유독 이런 잘못된 판단을 범하는 사람들의 특징(= 나)을 알 수 있겠구나 싶었거든. 그리고 내가 이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확실한 해결책까지는 아니더라도 반투명한 지침 정도는 있으리라 기대했어.


나도 이제 누군가에게 훌러덩 빠지지 않고 신중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천천히 스며들 수 있는 걸까. 희망을 갖고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완독 했지.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에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어. 물론 책은 술술 읽히고 흥미로운 내용으로 가득했어. 그런데 첫인상에 모든 걸 판단하는 사람을 정신 차리게 해 줄 내용은 딱히 없더라고. 반대로 사람이 왜 첫 느낌을 중히 여길 수밖에 없는지, 또 얼마나 그것이 인간에게 필요한 본능인지에 대해 서술하고 있더라.


얼빠가 당위성까지 부여받은 순간! 더불어 작가는 얼굴과 첫인상이 실제 그 사람을 얼마나 정확히 나타내고 있는지까지 말해줘. 심지어 이 중대한 판단은 3초도 아니고, 0.3초 만에 결정된다니.





결국, 얼마 전 인터넷에서 읽은 미래의 ‘지하철 개찰구 소개팅’이 진정 내게 최선인 걸까.


역 안에서 개찰구를 사이에 두고 마치 복면가왕처럼 ”하나, 둘, 셋!” 하면 마스크를 벗는 그 소개팅 말야. 미래에는 그렇게 얼굴을 공개한 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뒤돌아 서로 갈 길을 간다고 해. 물론 “죄송합니다” 하고 꾸벅, 인사 정도는 하는 게 매너.


물론 우스갯소리지만, 교통비마저 절약하려 지하철 개찰구 앞에서 만난다는 발상은 신박하더라. 나처럼 실패한 소개팅에 쏟은 시간과 돈이 아까운 수많은 미혼남녀에게 후킹할 수밖에 없고.


아.

그래도 역시, 나는 이제 더 이상 첫인상만 보고 좋은 사람을 놓치는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아. 이제서야 시대의 트렌드를 역행하려는 걸까. 다행히도 책에서 조금의 희망도 찾아냈어. 첫인상이 안 좋아도 좌절하지 말라고, 사람은 자주 보며 익숙해질수록 더 호감으로 느낀다고.


심리학적으로도 만나는 횟수에 비례해 호감이 상승하는 단순 노출 효과 Mere exposure effect 라는 게 있잖아. 이 효과에 따르면 우리 뇌는 하도 게을러서 이미 한 번 처리해본 일을 좋아한대. 이미 기억 속에 있는 사람, 새겨져 있는 도식일수록 편안하게 느끼는 거지. 실제로도 주변에서 그런 경우를 흔히 보곤 하니 신뢰가 가는 이론이긴 해.


단 도표에서 내가 아웃라이어는 되지 말아야지. 뇌는 게으르게 두고, 만남은 오히려 부지런히 가져봐야겠다고 결론을 냈어. 그리고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어제 카톡으로 약속을 잡았지. 평소라면 한 번 보고 말았을 소개팅남과 이번주 토요일에 두 번째 만남을 갖기로 했어.


나도 궁금하다. 이 사람을 점점 더 좋아하게 될 수 있을까? 후기도 곧 올릴테니 기대해 색시. 상대의 내면을 면밀히 탐색하는 일에는 의욕과 더불어 어느정도의 끈기도 필요하겠지.


행여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아무쪼록 나에게도 이 명제를 적용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좋겠다. 그래야 내 팔자 눈썹도 덜 억울하지 않을까.





관련 영화: <세렌디피티, 2001>

첫눈에 반하는 운명적 사랑을 그렸으나, 어릴 적 본 기억으로는 불륜 미화 같아 혐오했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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